토요일 오전 여덟 시 사십 분, 지점 사무실에는 불이 세 줄만 켜져 있었다. 도현우는 자리에 앉자마자 실적판 쪽 블라인드를 내렸다. 보이지 않는다고 숫자가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오늘 아침만큼은 빈칸보다 먼저 볼 것이 있었다.
모니터에는 김정호의 작년 계약 문서가 날짜순으로 떠 있었다. 원청약서, 계약 전 알릴 의무 질문지, 상품 설명 확인서. 현우는 작성일과 답변 표시, 서명 시각, 회사 보관본의 등록 번호를 하나씩 대조했다.
새 대조표에는 세 칸을 만들었다. ‘확인된 것’, ‘확인할 수 없는 것’, ‘따로 확인할 것’. 세 공식 문서의 날짜와 기재 답변은 서로 맞았다. 고객이 보게 될 사본과 회사 보관본 사이에도 다른 표시는 발견되지 않았다.
당시 상담 메모는 문서 목록과 별도 기록 조회 어디에도 등록돼 있지 않았다. 왜 없는지는 현재 자료로 알 수 없었다. 현우는 두 번째 칸에 ‘당시 구두 설명은 보관 기록으로 재현할 수 없음’이라고 썼다. 없어진 것인지 애초에 남지 않은 것인지 추측으로 채우지 않았다.
아홉 시가 조금 넘어 서아라가 들어왔다. 아라는 가방도 내려놓기 전에 현우의 대조표를 읽고 빈 칸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고객이 문제없는 계약이냐고 물으면 뭐라고 할 거야?”
“문서 사이에 다른 답은 없다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계약에 아무 문제도 없다고 넓혀 말하지 않고요.”
아라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현우는 세 번째 칸에 ‘향후 보장 판단은 실제 사유와 공식 절차에서 별도 확인’이라고 덧붙였다. 준비가 끝났는데도 종이는 시원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불편한 빈칸까지 정확해야 대조표였다.
열 시 정각, 현우는 김정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두 번 울린 뒤 피곤하지만 또렷한 목소리가 들렸다.
“김정호 고객님, 먼저 사과드리겠습니다. 제가 이 확인을 너무 늦게 했습니다.”
수화기 너머가 잠시 조용했다. 현우는 변명을 붙이지 않고 원청약서부터 차례대로 대조 결과를 설명했다. “세 문서의 날짜와 답변 표시는 서로 맞았습니다. 현재 보관된 문서 안에서는 답변이 다르게 옮겨진 흔적을 찾지 못했습니다.”
김정호가 곧바로 물었다. “그럼 작년에 든 건 문제없다는 뜻인가요?”
현우는 대조표 가장자리를 눌렀다. “그렇게까지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확인한 문서 사이에 다른 기재가 없다는 뜻입니다. 실제 보장이나 향후 지급 판단을 미리 확정하는 말은 아닙니다.”
“그때 무슨 설명을 들었는지는요?”
“별도 상담 메모가 등록돼 있지 않아 지금 기록으로는 재현할 수 없습니다. 모르는 부분을 괜찮았을 거라고 채워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현우는 기록 부재에 관한 확인 요청도 회사의 공식 창구에 남길 수 있다고 덧붙였다.
김정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아내의 최근 검진 결과 때문에 작년 계약까지 모두 잘못된 것처럼 겁이 났다고 털어놓았다. 지난 상담에서 상품 설명을 원하지 않았다는 말도 다시 꺼냈다.
현우는 두 일을 나눴다. “아내분의 검진 내용은 아내분의 의사와 동의가 있을 때 따로 확인해야 합니다. 오늘 대조한 고객님의 기존 계약과 섞어서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 새로 뭘 추천하는 건 오늘은 안 하셔도 됩니다. 확인한 문서와 대조표부터 공식 절차로 보내 주세요.”
“알겠습니다.” 현우가 답하자 김정호가 낮게 말했다. “늦긴 했지만, 이번에는 제가 물은 것에 답을 들은 것 같네요.”
통화를 마친 시각은 열 시 십칠 분이었다. 현우는 ‘공식 사본 교부 요청, 추가 상품 제안 없음, 배우자 관련 검토는 본인 동의 전 진행하지 않음’이라고 기록했다. 계약이 완벽하다고 단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김정호가 처음 가져온 질문은 확인된 것과 확인할 수 없는 것으로 분명히 나뉘었다.
월요일 오전 아홉 시 칠 분, 박은주 어머니 건의 최종 회신이 도착했다. 현우는 제목만 보고 전화하지 않고 첨부 문구를 처음부터 끝까지 두 번 읽었다.
표준 조건으로는 진행할 수 없고, 일부 보장 범위를 제한한 조건부 인수안이 제시돼 있었다. 제한 항목과 기간은 서면에 적혀 있었고, 그 조건을 받아들일지는 고객이 다시 선택해야 했다. 현우는 병력과 결과 사이에 자기 해석을 보태지 않고 회사가 적은 문구만 따로 옮겼다.
현우는 결과도 세 칸으로 나눴다. 회사가 결정한 것, 결정되지 않은 것, 고객이 고를 것. 그리고 박은주가 아니라 어머니의 번호를 눌렀다. “어머니, 결과를 먼저 설명드리려고 연락드렸습니다. 지금 괜찮으실까요?”
“네. 딸도 옆에 있어요.”
“지난번 정하신 범위대로 은주 씨가 함께 들어도 괜찮으실까요?” 어머니는 자신이 같이 들으라고 했다며 전화를 스피커로 바꿨다. 박은주의 숨소리가 조금 멀리서 들렸다.
현우는 표준 조건으로 인수된 것이 아니며, 회사가 일부 보장을 제한한 안을 제시했다는 사실부터 설명했다. 이 안은 가입 완료도, 장래 보장 확정도 아니고 어머니가 받아들일지 다시 정해야 했다.
어머니가 물었다. “그럼 된 거예요, 안 된 거예요?”
“제시된 조건을 받아들이시면 그 조건으로 다음 절차를 진행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원래 조건 그대로 된 것은 아닙니다. 원하지 않으시면 진행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한된 부분은 나중에도 그 문서대로 빠지는 거고요?”
“네, 서면에 적힌 범위는 제한됩니다. 다른 보장이나 실제 지급까지 제가 지금 약속드릴 수는 없습니다. 문서를 먼저 받아 보시고 결정하셔도 됩니다.” 현우는 서두를 이유도, 오늘 안에 답해야 할 의무도 없다고 확인했다.
전화기 너머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가 났다. 박은주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급하게 하지 않아도 돼.” 어머니는 잠시 침묵했다. 현우도 그 시간을 설명으로 메우지 않았다.
“나는 딸이 겁을 내니까 여기까지 온 거예요. 그렇다고 그 겁 때문에 내가 다 알지 못하는 조건에 서명하고 싶지는 않아요.”
어머니는 이 조건부 안을 진행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결과 문서는 받되, 다음에 다른 선택을 검토하더라도 자신이 직접 듣고 정하겠다고 했다. 현우는 선택을 한 번 더 확인한 뒤 공식 기록에 남겼다.
박은주는 “엄마, 내가 너무 서둘렀지”라고 했고, 어머니는 “네가 무서웠던 건 알지만 내 일은 내가 정해야지”라고 답했다. 두 사람의 목소리 사이에 있던 조급함이 조금 느슨해졌다.
통화를 마치기 전 어머니가 말했다. “안 하기로 했는데도 전보다 마음은 편하네요. 처음부터 된다고 하지 않은 건 잘했어요.”
현우는 서면 교부 요청과 진행 거절을 기록했다. 박은주에게 따로 결과를 전달하지 않았다. 공동 설명은 어머니가 정한 범위에서 끝났고, 마지막 선택의 주인도 분명했다.
오전 열한 시, 아라가 현우 자리 앞에 멈췄다. “두 건 다 끝났어?” 현우는 김정호에게 원문서 대조 결과와 확인 한계를 전달했고, 박은주 어머니는 조건을 직접 듣고 진행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보고했다.
“계약은?”
“없습니다.”
현우는 실적판을 바라봤다. 자기 이름 옆 숫자는 늘지 않았다. 그런데 금요일처럼 화면을 끄고 싶지는 않았다. 계약이 없다는 사실과 상담이 끝났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같은 실패라고 여기지 않았다.
아라가 다시 물었다. “그럼 네가 미룬 건 뭐가 남았어?”
현우는 잠금 서랍을 열었다. 첫 상담 전 붙여 둔 ‘상담 뒤 확인’ 포스트잇을 떼어 반으로 접었다. “없습니다.”
점심 무렵 김정호에게서 ‘확인된 것과 모르는 것을 나눠 줘서 이해했다’는 문자가 왔다. 곧이어 박은주는 ‘어머니가 오늘은 자기 결정이었다고 한다’고 전했다. 현우는 두 문자에 확인했다는 짧은 답만 보냈다.
계약 건수는 그대로였다. 대신 오래 비어 있던 두 칸에 하나는 확인한 기록이, 다른 하나는 고객이 직접 고른 답이 남았다.
현우는 식어 버린 종이컵을 버리고 자리로 돌아왔다. 모니터 옆에는 더 이상 ‘나중에’라고 적힌 메모가 없었다. 이번에는 다짐보다 끝까지 한 일이 먼저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