컵라면은 여섯 개 남아 있었다.
전날 확인한 열두 개 가운데 이동 가능한 여섯 명이 하나씩 먹었다. 세온은 비닐봉지에 묶인 나머지를 세어 장부와 맞췄다. 사람도 같았다. 걸을 수 있는 여섯, 들것이 필요한 환자 둘. 총 여덟.
창문 없는 응급실에서 아침을 알리는 것은 환기구 빛과 유리의 상태 기록뿐이었다. 유리는 복부 수술 환자의 호흡과 의식을 확인한 뒤, 다리 부상 환자의 발끝 감각과 피부색을 살폈다. 확실한 진단을 새로 붙이지 않고 변화를 같은 방식으로 반복해 적었다.
“회의할 거면 지금 해요.”
유리가 장갑을 벗으며 말했다.
“약국을 보긴 봐야 해요. 하지만 약을 가져왔다고 환자 상태가 해결되는 건 아니고, 포장과 기록을 확인할 수 있는 물품만 건드려야 해요.”
세온은 바닥에 병원 약도를 펼쳤다.
“서쪽 서비스 통로로 나가 주차장 외벽을 따라간다. 큰 도로는 피한다. 약국 앞에서 흔적부터 확인하고 위험하면 들어가지 않는다.”
정윤호가 곧장 말했다.
“동쪽은 안 됩니다.”
“그 판단의 근거가 구청 문건 기억이라고 했죠.”
“네. 원문은 없습니다.”
태민이 물었다.
“서쪽이 안전하다는 뜻은 아니고?”
“아닙니다.”
세온은 약도에 동쪽은 ‘미확인 통제 우선 구간’, 서쪽은 ‘접근 가능성, 안전 미확인’이라고 적었다. 선 하나가 안전을 보증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게 했다.
하린이 태블릿을 내밀었다. 전날 저장한 지도와 캐시 로그에는 서쪽 골목 진입 코드가 바뀐 흔적이 있었다.
“코드 표시는 군 우선 통제로 바뀌었어요. 그런데 이게 실제 검문 인원을 뜻하는지는 몰라요. 서버 시간이 맞는지도 확인 못 했고요.”
“현장에서 표지와 움직임을 다시 본다.” 태민이 말했다.
“태블릿만 보고 문 열거나 길 건너지 않는다.” 세온이 덧붙였다.
하린은 입술을 다물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짐 취급받지 않으려고 화면을 만능 열쇠처럼 내세우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의 한계를 말하는 것도 전력이라는 걸 받아들이는 얼굴이었다.
오도혁이 서비스 통로 쪽으로 반 걸음 옮겼다. 발소리를 줄인 움직임이었다.
“어디 가.”
태민이 물었다.
“화장실.”
“반대편이야.”
도혁은 어깨를 으쓱하고 돌아왔다. 잡힌 사람치고 너무 태연했다. 세온은 도혁의 신발과 손에 새 윤활유가 묻었는지 눈으로만 확인했다. 가까이 붙어 몸을 수색할 이유도, 안전장비도 없었다. 증거 없이 단정하면 팀이 먼저 갈라진다.
정찰조를 정하는 순간 유리가 말했다.
“나는 남을게요.”
전날 세온은 유리까지 넣을 생각을 잠깐 했었다. 하지만 환자 둘을 윤호와 도혁에게만 맡길 수는 없었다. 유리는 환자의 기존 기록과 의료 장비를 다룰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이동은 셋.” 세온이 장부에 적었다. “나, 태민, 하린.”
하린이 눈을 들었다.
“제가 가도 돼요?”
“네가 가진 자료가 필요해. 대신 현장 판단은 화면보다 먼저다. 모르는 코드는 시도하지 않고, 접속이 된다고 안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알겠어요.”
잔류조는 유리, 윤호, 도혁. 환자 둘과 함께 총 다섯. 정찰조 셋을 합치면 여덟. 세온은 출발과 귀환 때 다시 세기로 했다.
“잔류조 단독 이탈 금지.”
도혁이 웃었다.
“셋이 남는데 누가 누굴 감시해요?”
“감시가 아니라 마지막 확인입니다. 움직이면 목적지와 시간을 장부에 남겨요.”
윤호의 오른손이 안주머니로 들어갔다. 세온이 시선을 주자 손이 멈췄다.
“주머니 안 물건, 돌아오기 전에 확인하고 싶습니다.”
“지금은 안 됩니다.”
“왜죠?”
윤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유리를 보았다. 환자 침상, 산소통, 메모판을 차례로 본 뒤 입술을 닫았다. 말보다 침묵이 먼저 무언가를 고르는 순간이었다.
세온은 억지로 빼앗지 않았다. 다만 장부에 썼다. ‘윤호 소지품 공개 거부, 09:14.’ 윤호도 그 글씨를 봤다. 지우라고 하지 않았다.
출발 전 태민은 손전등 두 개의 배터리를 바꿔 끼웠다. 하린은 지도와 로그를 메모리 카드에 복사해 하나를 유리에게 맡겼다. 세온은 빈 가방, 장갑, 마스크, 물 한 병, 응급 키트를 확인했다. 약국에서 유출되거나 깨진 물품은 만지지 않고, 냄새가 강하거나 분진이 보이면 돌아오기로 했다.
“접촉했으면 들어오기 전에 말해요.” 유리가 말했다. “정체 모를 오염인데 멀쩡해 보인다는 이유로 바로 환자 옆에 오지 말고.”
태민이 통로 셔터를 올렸다. 차가운 공기와 젖은 콘크리트 냄새가 들어왔다.
세온은 장부 마지막 줄을 읽었다.
정찰 셋. 잔류 셋. 환자 둘. 총 여덟.
규칙은 완성되지 않았다. 하지만 누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상태로 시작하지는 않았다. 세온은 그것만 확인한 뒤 어둠 속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출발 직전 다리 부상 환자가 세온을 불렀다. 목소리는 작았지만 의식은 또렷했다.
“약 가져오러 가는 겁니까?”
“약국 상태를 확인하러 갑니다. 쓸 수 있는 물품이 있으면 유리 씨가 포장과 기록을 보고 판단할 겁니다.”
“돌아온다고 말해 줄 수는 없고요?”
세온은 잠깐 침묵했다.
“돌아올 계획과 중단 기준은 말할 수 있습니다. 돌아온다고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환자는 실망한 듯 눈을 감았지만 거짓 약속을 강요하지 않았다. 유리는 그 대화를 듣고 들것 고정 끈을 한 번 더 확인했다.
태민은 통로 입구 바닥에 분필로 짧은 선을 세 개 그었다. 정찰조가 정상 귀환하면 세 선 옆에 원 하나, 오염 가능성이 있으면 엑스 하나, 추격이나 위험이 있으면 표식 없이 문을 두드리는 방식이었다. 소리가 없다고 안전하다고 단정하지 않도록 귀환 예정 시각도 따로 정했다.
“예정에서 이십 분 넘으면 문을 열고 기다리지 마.” 태민이 말했다. “유리 씨가 안쪽을 통제하고, 윤호 씨는 다른 출구 후보를 준비해.”
도혁이 웃었다.
“우릴 가둬 놓고 가겠다는 거네요.”
“아니.” 유리가 말했다. “문을 열어 둔 채 다섯 명을 위험에 노출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돌아온 사람이면 약속한 절차를 압니다.”
하린은 태블릿 배터리를 절반 이하로 쓰지 않기 위해 화면 밝기를 낮췄다. 지도는 종이에 필요한 구간만 베껴 놓았다. 전자기기가 꺼져도 길 전체가 사라지지 않게 하려는 준비였다. 세온은 하린의 가방에서 불필요한 충전선 두 개를 빼고 물과 장갑을 넣었다. 하린은 잠깐 불만스러운 얼굴을 했지만 무게를 직접 들어 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윤호는 끝내 USB를 공개하지 않았다. 대신 서쪽 골목에 오래된 방화문이 하나 있다는 사실을 말했다. 세온이 출처를 묻자 구청 시설도에서 본 기억이라고 답했다. 원본 미확인. 하린은 종이 지도에 점선으로만 표시했다.
도혁은 아무것도 보태지 않았다. 그러나 정찰조가 문 앞에 섰을 때 그의 시선은 서쪽이 아니라 남쪽 복도 끝을 향했다. 세온은 그 방향과 시각을 기억해 두었다.
셔터가 허리 높이까지 올라가자 태민이 먼저 바닥과 천장을 살폈다. 분진이 떠다니지 않는지, 금속 냄새 외에 다른 냄새가 나는지, 누군가 바로 앞에 숨어 있지 않은지 확인한 뒤에야 손을 들었다.
세온, 태민, 하린이 차례로 통로를 넘었다. 유리는 안쪽에서 세 이름을 불렀고 하린이 마지막으로 대답했다.
“정찰 셋, 출발.”
셔터가 내려오기 전 세온은 응급실을 돌아봤다. 잔류 세 사람과 환자 두 명이 붉은 빛 아래 서로 다른 자세로 서 있었다. 그 다섯을 배경처럼 두지 않기 위해 세온은 귀환 시각을 다시 한 번 크게 말했다.
문이 닫히자 어둠이 앞뒤를 갈랐다. 하지만 양쪽 장부에는 같은 여덟 이름이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