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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1-5화]

규칙이 흔들리는 건 외부 때문이 아니다

작성: 2026.04.11 23:45 조회수: 23
창작물 안내
[AI 생성물] 본 소설의 내용과 표지는 인공지능(AI) 모델을 통해 기획 및 작성된 허구의 창작물입니다.
이 콘텐츠는 AI가 창작한 장기 연재소설입니다. 실제 인물이나 사건과 무관한 창작물입니다.

컵라면 용기 열두 개. 그게 전부였다.

세온이 아침 자원 점검을 마치고 내린 숫자다. 식수는 병원 지하 급수관에서 아직 나오고 있었지만 물 끓일 방법이 없었다. 비상 발전기는 밤새 형광등 하나와 의료 장비 콘센트 두 개를 간신히 버티는 중이었다. 가스는 처음부터 없었다. 정윤호가 1층 탕비실에서 가져온 소형 부탄 카트리지 네 개가 유일한 열원이었다. 용기 열두 개에 카트리지 네 개. 세온은 그걸 응급실 처치대 위에 올려놓고 여섯 명의 얼굴을 차례로 봤다. 아무도 먼저 말하지 않았다. 이 침묵이 어제와는 달랐다. 어제는 피로한 침묵이었다. 오늘은 재는 침묵이었다.

"하루 두 끼 기준으로 사흘치. 오늘부터 세면 모레 오후가 한계야."

차유리가 팔짱을 낀 채 처치대 쪽을 내려다봤다. 강태민은 벽에 기댄 자세 그대로였고, 하린은 태블릿 화면을 끄지 않은 채 시선만 올렸다. 정윤호는 손을 무릎 위에 얹고 뭔가를 세는 것처럼 손가락을 살짝 움직였다. 세온은 그 손가락을 한 번 봤다가 시선을 거뒀다. 3일 동안 이 사람이 근거 없이 먼저 입을 연 적이 없었다는 걸 기억하면서.

오도혁만 먼저 손을 뻗었다.

"그럼 일단 아침 거 먼저 하나씩 가져가면 되지 않나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용기 하나를 집었다. 세온이 그의 손목을 잡지 않은 건 의식적인 선택이었다. 잡으면 이미 진 거라는 걸 알았다. 대신 그냥 말했다.

"배급 순서 먼저 정하고요."

도혁이 용기를 들고 잠깐 멈췄다. 내려놓지는 않았다. 그 상태로 세온을 봤다. 눈빛이 나쁘지 않았다. 그게 더 나빴다. 적의가 없는 사람은 설득이 안 된다. 그냥 자기 판단대로 움직일 뿐이다.

"순서라는 게 뭔데요. 굶어 죽을 순서?"

"먹는 순서."

세온의 목소리는 평탄했다.

"중증 환자 먼저, 이동 당번 다음, 나머지 동시."

태민이 그제야 벽에서 등을 떼며 끼어들었다.

"그 기준이면 나는 이동 당번 아니면 나머지인데."

따지는 게 아니라 확인하는 말투였다. 세온은 끄덕였다. 태민은 다시 벽에 기댔다. 그는 규칙에 토를 달지 않았다. 그냥 자기 위치를 확인했을 뿐이었다. 그 태도가 오히려 도혁의 것보다 세온에게는 편했다.

도혁은 용기를 내려놓았다. 조용히, 그러나 눈을 떼지 않으면서. 세온은 그가 규칙에 수긍한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지금은 쓸 카드가 아니라고 판단한 거였다. 그 계산이 얼굴에 없는 척 숨겨져 있었지만 세온은 봤다. 사흘이면 사람의 눈빛 정도는 읽힌다.

배급이 끝난 건 아침 열한 시 무렵이었다. 지하 급수관에서 받은 물이 부탄 불에 올라가는 동안, 응급실 안에는 묘한 침묵이 있었다. 물 끓는 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젖은 콘크리트 냄새와 라면 스프 냄새가 섞였다. 차유리는 중증 환자 침상 두 개를 확인하며 산소 포화도를 기록했다. 숫자가 나쁘지 않았지만 좋지도 않았다. 유리가 세온 쪽을 보지 않은 채 말했다.

"오늘 안에 항생제 루트가 하나 더 있어야 해. 어제 거 거의 다 썼어."

"약국은 두 블록."

"알아. 그러니까 말하는 거잖아."

세온은 라면 용기 뚜껑을 눌러 잠그며 생각했다. 두 블록이라는 말이 지금 이 건물 안에서 얼마나 다른 무게인지, 유리는 모르지 않을 거였다. 봉쇄선이 어긋난 지도, 서비스 통로의 기름 자국, 누군가가 이미 이 구역을 드나들었을 가능성. 약국을 향해 움직인다는 건 그 모든 미지수 위로 발을 올리는 일이었다. 유리는 그걸 알면서도 말했다. 환자가 먼저라는 뜻이었다.

"이동 계획 오후에 잡는다. 그 전에 통로 상태 다시 봐야 해."

유리는 뭔가를 더 말하려다가 멈췄다. 말이 끊긴 자리에 남은 건 체념이 아니라 참을성 쪽에 가까운 침묵이었다. 세온은 그 침묵을 고맙게 받았다. 재촉이 아니라 신뢰에 가까운 기다림이었다.

하린이 처음으로 소리를 냈다.

"저 잠깐 봐주실 수 있어요."

세온이 다가갔다. 태블릿 화면에 봉쇄선 지도가 떠 있었다. 하린이 손가락으로 한 지점을 짚었다. 성산병원 블록 동쪽 경계선이었다.

"어제 저장한 타임스탬프랑 오늘 자 갱신본이 달라요. 봐요, 여기."

두 이미지를 나란히 놓자 차이가 보였다. 어제까지는 병원 동쪽 도로가 봉쇄 경계 바깥에 있었다. 오늘 갱신본에는 그 도로가 통째로 사라져 있었다. 경계가 줄어든 게 아니라 도로 자체가 지도에서 지워진 것처럼 보였다.

"갱신이면 좌표가 이렇게 지워지진 않아요. 이건 편집이에요."

세온은 두 이미지를 번갈아 봤다. 위장 오류인지 의도적 삭제인지는 지금 당장 구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결론은 같았다. 공식 봉쇄선 정보를 신뢰할 수 없다는 것. 세온은 화면에서 눈을 들지 않은 채 말했다.

"캡처해둬. 둘 다."

하린이 화면을 저장하는 동안 세온은 고개를 들었다. 정윤호가 창문 쪽 벽에 기대어 무언가를 손바닥에 쓰고 있었다. 볼펜이 아니라 손톱 끝으로 피부를 긁는 것 같은 동작이었다. 반복적이고 작은 움직임이었다. 숫자를 세는 것 같기도 했고 뭔가를 기억하려는 것 같기도 했다. 세온이 그쪽으로 몇 걸음 다가가자 윤호가 손을 펼쳤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 동작 자체가 없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뭐 생각하고 있어요."

세온이 물은 건 질문이 아니었다. 윤호는 잠깐 창밖을 봤다. 병원 1층 출입구 방향이었다.

"아무것도요."

그러고는 덧붙였다.

"약국 루트, 동쪽으로 가면 안 됩니다."

세온이 멈췄다.

"이유요."

"그냥."

윤호는 시선을 다시 창밖으로 돌렸다.

"느낌상."

느낌상이라는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이 사람이 느낌으로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세온은 이미 알고 있었다. 3일 동안 단 한 번도 근거 없이 먼저 입을 열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느낌이라고 했다. 세온은 더 묻지 않았다. 더 물으면 윤호가 입을 닫을 거라는 것도 알았다.

오후가 됐다. 태민과 세온이 서비스 통로를 다시 확인하러 갔다. 형광등이 없는 통로는 어두웠다. 태민이 핸드폰 손전등을 켰다. 기름 자국은 어제보다 범위가 넓었다. 어제는 셔터에서 3미터 정도였는데 오늘은 통로 꺾임 직전까지 이어져 있었다. 자국의 결이 일정했다. 무거운 걸 끌었거나 바퀴 달린 걸 밀었거나. 어느 쪽이든 혼자 하기엔 무거운 양이었다.

태민이 쪼그려 앉아 자국 끝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새거야. 어제 밤이나 오늘 새벽."

세온은 셔터 쪽을 봤다. 잠금장치는 어제 끊었던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누가 다시 잠근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자국은 셔터 밖에서 안으로 들어온 방향이었다. 세온은 셔터 끝 쪽 바닥을 한 번 더 봤다. 흙먼지 위에 희미하게 눌린 자국이 있었다. 신발 밑창 패턴이 아니라 바닥이 넓은 무언가였다.

"우리 말고 누가 들어왔다는 거네."

태민이 일어서며 말했다. 확인이었다. 세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필요가 없는 말이었다.

두 사람이 말없이 통로를 나왔다. 응급실로 돌아왔을 때 오도혁이 벽 쪽 바닥에 등을 붙이고 눈을 감고 있었다. 자는 것처럼 보였다. 숨 소리는 규칙적이었다. 세온은 그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뒀다. 규칙이 흔들리는 건 외부의 위협 때문이 아니라고 아침에 생각했다. 이 통로의 자국을 보고 나니 그 생각이 절반쯤 틀렸다는 걸 알았다. 안이 흔들리는 동안 밖도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두 가지는 아마 따로 움직이는 게 아닐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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