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국까지 실측 250미터. 세온은 그 숫자를 다시 한번 머릿속에서 굴렸다. 이동 시간은 걸음 속도로 사 분, 장애물 우회를 합산하면 칠 분. 그러나 지금 이 응급실에서 칠 분짜리 이동보다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정윤호의 주머니였다.
세온은 윤호가 앉은 쪽을 보았다. 윤호는 벽에 등을 기대고 무릎 위에 두 손을 올려놓은 채 눈을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어젯밤 회의 내내 겉옷 주머니에 손을 드나들게 했던 그 습관이 지금은 없었다. 손이 무릎 위에 있다는 것이 오히려 더 어색했다. 의식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자세였다.
"윤호 씨, 잠깐요."
세온이 말했다. 윤호가 눈을 들었다. 반응은 빨랐다. 너무 빨랐다.
"이동 전에 확인할 게 있어요. 주머니 안에 있는 거."
윤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손이 먼저 움직였다. 무릎에서 들어 올려지는 방향이 아니라 옆으로 미끄러지는 방향. 주머니 쪽으로 가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위치를 바꾸는 것처럼 보였지만, 세온은 그 타이밍을 기억했다. 대답이 나오기 전에 손이 먼저 무언가를 결정하는 사람.
바로 그때 서비스 통로 쪽에서 발소리가 났다. 길지 않았다. 한두 걸음이었는데 방향이 명확했다. 세온이 고개를 돌리자 오도혁이 통로 입구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벽에 등을 기댄 척 하고 있었지만 발끝이 통로 안쪽을 향하고 있었다.
강태민이 일어서지도 않고 말했다.
"또?"
도혁이 어깨를 한 번 들었다 내렸다.
"화장실."
"화장실은 반대편이야."
도혁이 잠깐 멈췄다. 그러더니 태민을 보지 않고 말했다.
"어제 막혀 있었거든. 이쪽 통로로 돌아가야 하나 봤지."
태민은 더 말하지 않았다. 세온도 말하지 않았다. 말보다 지금 이 자리에서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났다는 게 더 중요했다. 윤호를 다그치는 순간 도혁이 움직였다. 우연인지 아닌지를 따질 여유는 없었다. 세온은 일단 이동 준비를 서두르기로 했다.
"출발 준비 시작합니다. 이동조 셋. 나, 태민 씨, 하린. 유리 씨는 환자 곁에. 윤호 씨와 도혁 씨는 잔류."
윤호가 눈을 들었다. 이번엔 반응이 달랐다. 느렸다.
"저는 안 가도 됩니까."
"지금은 그게 낫겠어요."
세온이 짧게 잘랐다. 윤호는 더 묻지 않았다. 그 침묵이 세온의 등 쪽에 달라붙었다. 거절을 당한 사람의 침묵이 아니었다. 뭔가를 계산하는 침묵이었다.
하린이 태블릿을 집어 들며 세온 옆에 섰다.
"서쪽 골목 진입 코드, 아직 군 우선 통제 코드 그대로예요. 바뀐 게 없어요."
"확인됐어."
"근데 이상한 게 있어요."
하린이 화면을 내밀었다. 세온이 들여다봤다. 약국이 위치한 블록의 진입 기록 로그였다. 하린이 우회 경로로 뽑아낸 비공식 접속 데이터였는데, 로그 마지막에 짧은 항목이 하나 찍혀 있었다. 타임스탬프는 새벽 두 시 사십 분. 공식 봉쇄 방송이 끊긴 뒤 다섯 시간이 지난 시각이었다.
"이게 뭐야."
세온이 중얼거렸다.
"접속 로그예요. 누군가 약국 블록 자동문 코드를 조회했어요. 이쪽 병원 IP가 아니에요."
세온은 태민을 봤다. 태민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지만 턱이 조금 당겨졌다.
"가면서 확인하자."
태민이 말했다. 세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이 응급실을 나섰다. 복도는 어두웠다. 비상등이 복도 끝에만 하나 켜져 있었고, 그 아래로 바닥에 희미한 붉은 선이 길게 이어졌다. 세온은 걸으면서 킷백 무게를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으로 옮겼다. 응급 키트 포함해 사 킬로그램 조금 넘는 무게였는데, 어젯밤 수면이 세 시간도 안 된 탓에 어깨 관절이 이전보다 빨리 당겼다. 몸이 먼저 셈을 했다.
서쪽 골목 입구까지는 이 분. 약국 정문까지는 다시 일 분 반. 세온이 골목 입구를 돌아섰을 때 발이 먼저 멈췄다. 약국 입구 유리문이 닫혀 있었다. 그런데 손잡이 아래쪽 자동잠금 패널에 초록 불이 켜져 있었다. 잠긴 문이 아니었다.
"열려 있어."
하린이 낮게 말했다.
태민이 두 사람을 손짓으로 세우고 혼자 먼저 문 옆에 붙었다. 잠깐 귀를 기울이더니 문을 밀었다. 소리 없이 열렸다. 세 사람이 안으로 들어갔다.
약국 안은 선반 반쪽이 텅 비어 있었다.
소독약, 붕대, 진통제 계열이 올라가 있던 두 번째 선반 전체가 말끔했다. 물건이 쓸려 나간 것이 아니었다. 떨어진 것도 아니었다. 선반 위 먼지 자국을 보면 물건들이 정돈된 채로 들려 나간 형태였다. 서두르지 않고 챙긴 사람의 흔적이었다.
세온은 안쪽으로 더 걸어갔다. 카운터 뒤쪽, 처방약 냉장 보관함 옆에 연료통이 두 개 놓여 있었다. 어젯밤 이동 회의에서 윤호가 언급한 연료통이었다. 병원 지하 보일러실에 있다고 했는데 그게 여기 있었다.
세온은 연료통 하나를 들었다. 가벼웠다. 비어 있었다. 다른 하나도 마찬가지였다. 두 통 모두 비어 있었고, 마개가 열린 채였다. 냄새는 남아 있었다. 최근까지 내용물이 있었다는 뜻이었다.
하린이 세온의 얼굴을 봤다.
"누가 미리 왔다 간 거예요?"
세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태블릿을 달라고 손짓했다. 하린이 건네줬다. 새벽 두 시 사십 분 접속 로그. 약국 블록 자동문 코드 조회. 병원 IP가 아닌 외부 단말기.
세온의 머릿속에서 두 개가 겹쳤다. 도혁이 어젯밤 서비스 통로 쪽으로 이탈을 시도했던 시각. 그리고 이 로그의 타임스탬프.
태민이 연료통 하나를 들었다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동 계획이 틀렸어."
"알아요."
세온이 짧게 받았다. 연료가 없으면 발전기를 버텨낼 수가 없었다. 발전기가 멈추면 응급실 환자 두 명의 의료 장비가 같이 멈췄다. 유리가 버텨내고 있는 그 선이 거기서 끊겼다.
"다른 루트 찾아야 해요. 연료 출처가 달라야 해."
"군 검문소 인근에 비축 연료가 있을 수 있어."
태민이 말했다. 세온은 그 말을 들으면서 동시에 다른 것을 생각했다. 태민이 군 검문소 내부 구조를 안다고 한 적이 있었다. 지금 그 정보가 필요해지는 순간이 여기서 왔다. 그리고 그 루트를 아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오도혁이었다.
세 사람은 빈 약국 안에서 잠시 말이 없었다. 하린이 선반 위 먼지 자국을 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렸다가 뗐다. 손끝에 뭔가가 묻어나지는 않았다. 그냥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세온은 빈 연료통 두 개를 내려다봤다. 약국은 이미 털려 있었다. 연료도 없었다. 그리고 이 자리는 누군가 먼저 알고 있었다. 이동 루트를 결정하기 전에 이미 이 안에서 정보가 새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응급실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올 때보다 무거웠다. 세온은 걸으면서 생각했다. 윤호와 도혁이 지금 같은 공간에 남아 있다. 두 사람이 서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말 없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복도 끝 비상등 붉은빛이 앞에서 깜빡였다. 전력이 흔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