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 사회는 기후변화, 초고령화, 플랫폼 경제 확산 등 이질적인 거시 위험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얽혀 파괴력을 증폭시키는 ‘초위험사회(Super-Risk Society)’이자 다중위기(Polycrisis)의 시대로 진입했다. 높은 보험침투율에도 실손의료비 미보장률이 높은 ‘보장격차의 역설’, 공적연금과 돌봄 인프라에 비해 세계 최단기로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속도의 역설’ 속에서 취약계층의 보장 공백은 심화되고 있다.
이러한 사각지대를 메우기 위해서는 ‘포용금융’과 ‘포용보험’의 본질적 역할 차이를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무하마드 유누스의 그라민 은행으로 대변되는 마이크로크레딧 중심의 포용금융은 제도권에서 소외된 극빈층에게 대출을 통해 자본형성의 기회를 열어줬다.
그러나 기후재난이나 중증질병 같은 충격이 발생했을 때, 위험전가 장치인 보험이 결여된 대출은 가계를 부채의 늪으로 빠뜨리는 뼈아픈 한계를 노출했다. 즉 포용금융이 성장의 마중물이라면, 포용보험은 축적된 자산을 보호하고 빈곤의 함정으로 추락하는 것을 막는 가계의 회복탄력성(Resilience)을 보장하는 최후의 방어막인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포용보험의 현주소는 어떠한가. 그동안 우리나라는 서민금융진흥원을 통한 저소득층 보험료 지원, 우체국의 ‘만원의 행복보험’, 지자체의 시민안전보험 및 플랫폼 노동자 산재 보장 등 여러 형태의 안전망을 차례로 도입해 왔다.
그러나 현행 제도들은 특정 정책 어젠다에 따른 단기적 대응 위주로 파편화돼 운영된다는 구조적 문제점을 안고 있다. 복합 취약성을 유기적으로 관리할 전담 구심점이 부재하며, 정부의 복지 데이터와 민간 보험사의 역량이 결합된 종합적 데이터 활용 체계도 미흡한 실정이다.
무엇보다 사고 발생 후 현금을 일회성으로 지급하는 단편적 사후보상 체계에 머물러 있어, 사전예방과 현장 돌봄서비스 중심의 능동적 리스크 관리 체계로 패러다임을 전환하지 못하고 있다.
글로벌 포용보험의 혁신 궤적은 우리에게 명확한 이정표를 제시한다. 필리핀과 인도는 전당포나 마을 특파원 등 지역 내 인적 신뢰자산(High-Touch)과 디지털 지갑 등의 핀테크(High-Tech)를 융합해 기후위기와 빈곤을 타개하는 ‘생존형 혁신’ 생태계를 성공적으로 구축했다. 반면 영국과 일본 등 선진국은 치매, 고독사, 디지털 소외 등에 대응해 촘촘한 돌봄망과 보험을 결합하는 ‘적응형 혁신’을 가속화하고 있다.
결국 각국의 공통적인 지향점은 오프라인 인적 접점과 디지털 기술이 융합된 ‘피지털(Phygital)’ 모델로의 수렴이다.
특히 우리가 가장 예의주시해야 할 해외 사례는 영국 포용보험의 전담 컨트롤타워 역할을 수행하는 ‘Fair4All Finance’의 선도적 행보다. 영국 재무부의 국가 금융포용 전략 아래 설립된 이 기구는 가난한 취약계층일수록 필수 서비스에 더 높은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구조적 병폐, 이른바 ‘빈곤 프리미엄(Poverty Premium)’ 타파를 최우선 목표로 삼고 있다.
영국의 저소득 사회적 임차인들은 거주지의 환경적 위험도가 높아 상업보험 시장에서 소외돼왔다. 이에 Fair4All Finance는 민간 상업보험사, 주택지주, 공공기관을 하나의 거대한 컨소시엄으로 묶어냈다. 그리고 세입자가 임대차 계약을 맺을 때 최소한의 가재도구 보험에 자동으로 가입되도록 하는 옵트아웃(Opt-out) 방식의 시장 설계를 주도하고 있다.
이는 국가의 정책 의지가 민간 자본과 유기적으로 결합해 시장실패를 치유하고 거시경제적 회복력을 끌어올리는 민관 연계형 통합 모델이다.
결론적으로 한국의 포용보험이 일회성 또는 단기적인 시혜적 복지가 아닌 지속 가능한 거시경제적 완충 인프라로 안착하기 위해서는 부처별로 분산된 제도들을 하나로 묶어 지휘할 전담 컨트롤타워의 구축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공공의 광범위한 데이터 및 재정 인프라, 민간 보험사의 정교한 위험 인수 역량, 첨단 디지털 플랫폼, 그리고 지역사회의 따뜻한 돌봄망이 하나의 생태계 안에서 융합되어야 한다.
이제 한국의 포용보험은 단순한 방어적 안전망(Safety Net)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우리 사회의 취약계층이 거대한 외부 충격 앞에서도 신속히 튀어 올라 일상과 경제활동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지탱해 주는 강력하고 탄력적인 트램펄린(Trampoline)으로 진화해야 할 시점이다.
손성동
RMI보험경영연구소 부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