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만간 기금형 퇴직연금의 구체적인 실행방안이 발표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 2월 노사정이 퇴직연금 제도개선을 선언하면서 연합형, 공공기관 개방형, 금융기관 개방형 등 다양한 모델이 논의되고 있다. 2005년 퇴직연금제도 도입 이후 20여 년 만의 구조적 개편이라는 점에서 기대가 크다.
기금형 도입은 분명 퇴직연금 발전의 중요한 계기이다. 그러나 한 가지 짚어볼 대목이 있다. 그동안 제도개선 논의에서 너무 많은 시간과 관심이 ‘기금형’에 집중된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기금형 못지않게, 더욱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과제도 많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연금화다. 우리 퇴직연금은 과연 ‘연금제도’로 부를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연금화가 미흡하다. 적립금을 연금으로 받아야 노후소득보장이라는 본래 목적이 달성된다. 최근 55세 이상 퇴직급여의 지급액 기준으로 연금 수령이 늘고 있는 것은 다행이지만, 계좌 수 기준으로는 16.5%에 그쳐 여전히 미흡하다.
연금화 부진의 가장 큰 이유는 적립금 자체가 충분히 쌓이지 않기 때문이다. 고용노동부 지표에 따르면 2025년 상용근로자의 평균 근속연수는 7.1년이다. 즉 평균 7년마다 직장을 퇴직하면서 퇴직급여가 발생하는 셈이다. 문제는 이 퇴직급여가 다음 직장으로 이어져 축적되지 못한다는 데 있다.
물론 퇴직 시 퇴직급여를 개인형 퇴직연금(IRP)으로 이전하도록 제도화돼 있다. 하지만, 이전된 돈의 상당 부분이 빠져나간다. 2022~2024년 3년간 IRP 이전금액은 63.8조원인 반면 해지금액은 43.4조원으로, 해지율은 68.1%에 달한다. 퇴직급여가 노후까지 축적되기보다 이직 과정에서 소진되고 있다는 의미다.
따라서 IRP 전액해지 문제를 직시할 필요가 있다. 개인재산이라는 이유로 해지를 허용하기보다, 세제혜택이라는 준공적 성격을 바탕으로 일정 부분만 인출하고 나머지는 노후자금으로 보존토록 조치해야 한다. 예컨대 적립금의 25% 이내에서는 부분인출을 허용하되, 잔여 자산에는 퇴직연금의 세제혜택을 유지하는 방식도 대안이 될 수 있다.
중도인출 역시 보다 엄격해져야 한다. 현재 주택구입·전세자금·장기요양·회생절차 등 다양한 사유가 인정되고 있는데, 2024년 중도인출 인원의 56.5%가 주택구입, 25.5%가 주거임차를 이유로 인출했다. 퇴직연금은 생활자금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노후자금이라는 원칙을 다시 세울 필요가 있다.
연금화 방식도 바꿔야 한다. 종신연금 또는 이에 준하는 인출형 상품을 기본값으로 하고, 본인 의지로 다양한 지급방식을 선택하는 구조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고연령 거치연금과 연계한 인출형 상품 등 다양한 연금화 상품이 개발될 수 있도록 제도적 기반도 아울러 마련해야 한다.
또 하나의 시급한 과제는 퇴직연금 사각지대 해소다. 2024년 사업장 규모별 도입률을 보면 대기업과 중견기업은 높은 수준이지만 소규모 사업장으로 갈수록 낮아진다. 특히 5인 미만 사업장의 도입률은 10%대에 머물고 있다. 퇴직금과 퇴직연금이 병존하는 이원적 구조로는 중소·영세기업 근로자의 노후소득을 충분히 보장하기 어렵다. 조속히 퇴직연금제도로 퇴직급여제도를 일원화해야 한다.
퇴직연금 도입 20여 년. 이제는 제도의 ‘형태’보다 ‘목적’을 다시 세울 때다. 기금형은 중요한 수단이지만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다. 퇴직급여가 중간에 소진되지 않고 축적되어 연금으로 지급되고, 모든 근로자가 제도의 보호를 받을 때 비로소 퇴직연금은 명실상부한 노후소득보장체계로 자리 잡을 수 있다.
기금형 도입을 새로운 출발점으로 삼아, 이제는 ‘기금’이 아니라 ‘연금’에 개혁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
박준범
성균관대학교 겸임교수
한국은퇴연금아카데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