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정 판결문이 기록실 서가에 꽂힌 지 스무 날째 되는 아침, 한이겸의 책상에 두꺼운 공문 한 묶음이 도착했다. 발신인은 국회 산하 공개검증위원회였다. 봉투 앞면에는 비밀도 긴급도 아닌 ‘자료 요청’이라는 네 글자가 검은 활자로 찍혀 있었다.
윤해진은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페이지 수를 세었다. 태성의 범죄가 어떻게 설계됐는지를 다시 묻는 문서는 아니었다. 최초 이상 거래 신고 뒤 감독기관이 현장 검사를 미룬 사유, 수사기관이 계좌 보전을 늦춘 근거, 두 기관 사이에서 책임 주체가 바뀐 날짜를 요구하고 있었다.
“사건은 끝났는데 왜 다시 내놓으라는 거죠?” 기록관리 직원이 물었다. 목소리에는 피로와 경계가 함께 묻어 있었다. 지난 열한 달 동안 같은 원본을 법원과 검찰, 특별감사에 세 번씩 제출한 사람들이었다.
이겸은 공문의 근거 조항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범죄를 다시 판단하겠다는 게 아닙니다. 확인된 범죄를 공공기관이 왜 제때 막지 못했는지 보는 겁니다. 제출 범위도 그 질문 안에 있어야 합니다.”
민가온은 보존 서버에서 사건 기록표를 불러왔다. 원본은 세 갈래로 나뉘어 있었지만, 기관별 송수신 시각은 한 화면에 합쳐져 있지 않았다. 그는 법원 제출본과 감사위원회 접수본의 해시값부터 대조하고, 어느 사본도 새로 편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록했다.
첫 난관은 감독기관의 요청 회신이었다. 그들은 당시 현장 검사 계획표를 회사가 보유하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제출 목록에서 빼 달라고 했다. 다온은 고개를 저었다. “없는 자료를 만들어 낼 수는 없지만, 우리가 보낸 질의와 받은 답은 있습니다. 부재 자체와 회신 시각을 내면 됩니다.”
팀은 큰 벽에 날짜표를 붙였다. 회사의 첫 보고, 감독기관의 보완 요구, 검찰 문의, 추가 자료 접수, 계좌 보전까지 빈칸을 남긴 채 배열했다. 누군가의 이름을 빨간색으로 둘러싸는 대신, 각 칸 아래에 문서 번호와 보존 위치를 적었다.
오후가 되자 공개검증위원회 실무자 두 명이 회사로 왔다. 그중 한 명은 확정 판결문을 펼치며 “여기 적힌 책임자 외에 더 윗선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질문이 끝나자 방 안 공기가 잠시 무거워졌다.
이겸은 판결문을 닫지 않았다. “그 질문에 답할 현재 증거는 없습니다. 확정된 책임을 새 가설로 흐리지 않겠습니다. 저희가 드릴 수 있는 건 기관들에 같은 경고가 언제 전달됐고, 어떤 절차에서 멈췄는지입니다.”
실무자는 다시 물었다. “당신은 당시보다 훨씬 일찍 위험을 알고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해진이 먼저 답했다. “한 팀장의 예측은 입증 자료가 아니었습니다. 저희 조사 기준에도 단서 전용이라고 남아 있습니다. 이 검증에서 쓸 수 있는 것은 그 뒤 확보된 현재 원본뿐입니다.”
그 문장은 이겸에게 뜻밖의 안도감을 주었다. 첫 생의 죽음을 설명하면 무엇이든 빨리 믿게 만들 수 있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빠른 믿음은 다시 한 사람의 기억에 모든 문을 매다는 일이었다. 그는 자기 수첩을 제출 목록에서 뺐고, 배제 사유를 직접 적었다.
위원회는 감독기관과 수사기관이 각각 ‘상대 기관의 선행 조치 대기’를 사유로 든 공문을 발견했다. 두 문서는 같은 주에 작성됐지만 서로를 정확히 지목하지 않았다. 다온은 그것을 공모라고 부르려는 실무자를 막았다. “지금 보이는 건 책임 회피가 가능한 문장 구조입니다. 의도는 면담과 결재 기록을 더 봐야 합니다.”
가온은 자료 묶음마다 열람자 목록을 붙였다. 판결로 공개된 사실, 회사 기밀이지만 검증에 필요한 사실, 직원 개인정보가 포함된 사실을 세 등급으로 나눴다. 위원회가 전부 가져가는 대신 독립 열람실에서 필요한 부분만 복제하도록 했다.
저녁 무렵 직원 대표가 찾아왔다. 그는 또 회사 전체가 범죄 집단처럼 보도될까 두렵다고 말했다. 이겸은 반박문을 미리 꺼내지 않았다. 누가 불안을 말했는지 회의록에 이름과 함께 남겨도 되는지부터 물었다.
“이름은 빼 주세요. 하지만 걱정은 빼지 마세요.” 직원 대표가 말했다. “판결 받은 사람들 때문에 남은 사람들이 또 면접에서 설명해야 했습니다.”
해진은 제출 설명서 첫 문장을 고쳤다. ‘태성 사건 추가 조사 자료’라는 표현을 지우고 ‘감독·수사 지연에 관한 공공 절차 검증 자료’라고 썼다. 회사의 책임을 줄이기 위한 말장난이 아니라, 이미 끝난 판단과 새 질문을 구분하는 경계였다.
위원회 실무자는 원본 반출을 서둘렀다. 제출 기한이 짧다며 한꺼번에 복사해 가겠다고 했다. 가온은 봉인 장치를 닫은 채 말했다. “속도를 이유로 접수 기록을 생략하면 이 자료도 나중에 누가 만졌는지 다투게 됩니다. 한 묶음씩 합시다.”
복사는 밤까지 이어졌다. 각 장의 주민 정보와 무관한 가족 연락처는 가려졌고, 이미 공개된 결재선은 그대로 남았다. 해진과 외부 기록관리인이 동시에 확인한 뒤에야 수신 도장이 찍혔다.
마지막 묶음에는 당시 회사가 감독기관에 보낸 첫 경고 메일이 들어 있었다. 회신은 사흘 뒤였고, 내용은 ‘검토 중’ 한 줄뿐이었다. 이겸은 그 한 줄을 보며 분노보다 오래된 무력감을 느꼈다. 첫 생에서는 그 공백을 누군가의 음모라고만 생각했다.
이번에는 공백 양쪽에 있는 사람과 규정을 따로 물을 수 있었다. 누가 회신 권한을 가졌는지, 무엇을 기다리도록 규정돼 있었는지, 기다리는 동안 원본 보존 명령을 내릴 수 있었는지를 질문표에 넣었다. 분노는 질문을 시작하게 했지만 답의 모양을 미리 정하지는 못했다.
자정 가까이 되어 공개검증위원회 접수증이 도착했다. 감독기관 자료 스물한 건, 수사기관 전달 자료 열세 건, 회사 보존 기록 열여덟 건. 누락 항목 두 건에는 ‘회사 미보유, 기관 원본 요청 예정’이라는 표시가 붙었다.
다온은 접수증 아래쪽을 읽었다. 검증 목적은 지연 원인의 공적 확인과 재발 방지였고, 확정 판결의 사실 판단은 범위 밖이라고 명시돼 있었다. “적어도 문은 제대로 적혀 있네요.”
위원회는 회사가 작성한 날짜표를 그대로 채택하지 않았다. 회사와 기관 양쪽이 각자 같은 칸에 근거를 붙이고, 불일치가 생기면 제삼의 기록관리인이 원본 시각을 확인하기로 했다. 이겸은 자기 팀이 만든 표조차 검증 대상이 된다는 문구에 서명했다.
첫 불일치는 작은 전송 시각에서 나왔다. 회사 발신 서버에는 오후 네 시 십이 분, 기관 접수대장에는 네 시 스물일곱 분으로 남아 있었다. 가온은 십오 분을 은폐라고 부르지 않고 중계 서버 대기 로그를 요청했다.
중계 기록은 첨부 파일의 악성 코드 검사가 끝난 시각을 보여 주었다. 지연은 설명됐지만, 그 사이 긴급 표시가 접수 화면에 보이지 않는 설계 문제가 드러났다. 실무자는 범죄 혐의가 아니라 시스템 개선 항목으로 따로 적었다.
해진은 그 작은 확인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모든 빈칸이 나쁜 사람 이름으로 채워지지는 않네요.” 이겸도 동의했다. 원인을 정확히 나누는 일이야말로 책임 있는 사람을 흐리지 않는 방법이었다.
그들은 제출 자료가 언론에 공개될 때 쓸 설명문도 함께 작성했다. 검증 중인 사실과 판결로 확정된 사실을 색으로 구분하지 않고 문장 앞 표기로 나눴다. 흑백 인쇄에서도 구분이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겸은 완료 도장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제출은 끝났지만 질문은 이제 시작이었다. 그는 자료철 표지에 ‘완료’ 대신 ‘외부 검증 중’이라고 적었다. 살아남는 기록은 모든 것을 영원히 열어 두는 장부가 아니라, 열린 이유와 닫힐 조건을 함께 가진 장부여야 했다.
사무실을 나서기 전 해진이 물었다. “판결 뒤에도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어요?”
“아니요.” 이겸은 솔직히 말했다. “내가 알던 미래에는 판결까지 가지 못했으니까요.”
복도 끝 기록실에 불이 하나 남아 있었다. 장승민의 이름도 차준석의 지시도 새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대신 감독기관과 수사 지연을 묻는 질문들이 투명한 접수함 안에 차곡차곡 쌓였다. 이겸은 처음으로 모르는 문 앞에서 수첩 없이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