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7호에 다시 손님을 받기 시작한 지 넉 달째 되던 날, 법원 보관계에서 아르덴으로 공문이 왔다. 윤종필의 부재 재산 목록 가운데 출처를 확인하지 못한 봉인 상자 하나가 남아 있으며, 종료 심문 전에 당사자 입회로 내용을 확인해야 한다는 통지였다.
상자 표찰에는 `1107`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913번 보관함에서 이미 꺼낸 장부와 녹음기가 담긴 물건은 아니었다. 2023년 실종 직전 윤종필이 외부 문서 보관업체에 맡겼고, 이후 재산관리인이 법원 목록으로 옮긴 별도의 원본 상자였다.
윤서린은 상자를 호텔로 가져오지 않았다. 법원 기록실에서 독립 수탁자, 채권자 대리인, 직원 대표, 윤종필의 변호사가 함께 보는 방식을 택했다. 방 번호가 붙었다는 이유로 다시 객실에서 비밀을 연출하고 싶지 않았다.
윤종필은 기록실 가장 끝자리에 앉았다. 상자 봉인에는 그의 서명과 보관업체 직원 서명, 옮겨진 날짜가 차례로 남아 있었다. 담당자는 각각을 촬영하고 봉인선이 끊기지 않았는지 확인한 뒤 칼을 댔다.
첫 번째 묶음은 부채 목록이었다. 장부에 드러난 투자금 외에도 시설업체 두 곳의 연대보증, 친족 차용금, 오래된 토지세 분납 약정이 있었다. 윤종필 개인 이름과 아르덴 법인 직인이 같은 장에 찍힌 문서도 있었다.
직원 대표는 얼굴이 굳었지만 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공개된 현금 흐름표에 이 금액이 빠져 있었다면 공동운영 계획 자체가 달라질 수 있었다. 재무 전문가는 확정 채무와 다툴 채무를 나누고 최악의 경우부터 다시 계산했다.
두 번째 묶음에는 `공익 목적 약정 초안`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아르덴 부지를 일정 기간 숙박·지역 고용·소규모 문화 행사에 쓰고, 매각하더라도 그 기능을 승계하는 주체에게만 넘긴다는 내용이었다. 서명란은 비어 있었다.
좋은 문장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약정이 발효되면 시설 투자와 객실 용도 변경이 어려워질 수 있었고, 적자가 계속돼도 부지를 다른 용도로 팔기 힘들었다. 아르덴을 지키는 장치가 직원의 임금과 안전 공사를 묶는 족쇄가 될 수도 있었다.
한소희는 약정의 문화 행사 조항을 오래 읽었다. 지역 프로그램을 지킨다는 말은 마음에 들었지만, 어떤 행사를 누가 정하고 비용은 누가 내는지 없었다. 공익이라는 말 아래 소상공인과 예술가에게 무료 참여를 요구할 위험도 있었다.
세 번째 묶음은 윤종필이 직접 쓴 설명서였다. 그는 차우진에게 자료 보관 경로를 부탁하기 전, 아르덴이 가족 재산으로만 남지 않게 하려 했다고 적었다. 그러나 채권자와 직원에게 설명할 용기가 없어 서명 받지 못했고 상자에 넣었다고 썼다.
서린은 그 문장을 아버지의 유언처럼 읽지 않았다. 윤종필은 살아 있었고, 미완성 약정은 명령이 아니라 검토 자료였다. “아버지가 숨긴 마지막 뜻”이라는 장지민의 임시 문구도 지워 달라고 했다.
지민은 고개를 끄덕이고 제목을 바꿨다. `미서명 공익 목적 약정과 부채 원본 확인`. 관심을 끌 만한 단어는 줄었지만, 누가 무엇을 확인했는지 분명해졌다.
강도윤은 기록실에 참석하지 않았다. 주방 운영에 직접 필요한 요약본을 나중에 받기로 했다. 서린은 그 선택을 서운함으로 읽지 않았다. 모든 중요한 순간에 연인이 곁에 있어야 한다는 기대 대신, 서로 맡은 일을 지키는 방식을 익히고 있었다.
오후에 서린이 호텔로 돌아오자 도윤은 오늘 납품된 생선의 검수표를 먼저 끝내고 있었다. 그는 상자에서 무엇이 나왔냐고 바로 묻지 않았다. 서린이 말을 시작하자 칼을 내려놓고 환풍기 소리를 줄였다.
“부채가 더 있었어요. 그리고 아르덴을 공익 목적에 묶겠다는 미서명 문서도요.”
도윤은 좋은 일이라고도, 나쁜 일이라고도 하지 않았다. 주방 직원 고용을 유지한다는 문장이 실제 임금 재원이 없으면 어떤 의미인지 물었다. 서린은 그 질문을 다음 날 검토 목록 첫 줄에 넣었다.
윤종필은 부채 목록에서 자신의 서명이 있는 문서마다 설명서를 제출했다. 기억나지 않는다고 넘기지 않았고, 실종 전 원본이므로 필적과 법인 직인 감정도 받기로 했다. 연대보증이 무효라고 단정하지 않고 책임 범위를 확인했다.
채권자 한 명은 상자에서 자기 계약이 나온 것을 반겼다. 다른 채권자는 공익 약정이 먼저 발효되면 담보 회수가 늦어진다며 반대했다. 서린은 공익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생긴 채권을 없애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운영위원회는 약정 초안을 세 부분으로 나눴다. 지역 고용과 숙박 기능은 유지 목표로, 무료 제공이나 매각 금지 같은 항목은 재무 검토 대상으로, 윤종필에게 예외 승인권을 주는 조항은 폐기 대상으로 분류했다.
상자 바닥에는 오래된 아르덴 객실 열쇠표 하나가 있었다. 1107이라는 숫자 옆에 작은 흠집이 났다. 서린은 그것을 기념품처럼 가져가지 않고 다른 원본과 함께 보존 봉투에 넣었다.
1107호의 현재 투숙객에게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방을 옮기라고 하지도, 과거 이야기를 들려주지도 않았다. 그 객실은 이미 평범한 손님이 쉬는 공간으로 돌아왔고, 상자의 번호가 현재 손님의 밤을 다시 사건으로 만들 이유는 없었다.
일주일 뒤 재무 검토표에는 숨은 부채를 모두 반영한 보수적 현금 계획이 올라왔다. 공사 한 단계는 미뤄야 했지만 급여와 긴급 안전비는 유지할 수 있었다. 감추지 않았기 때문에 줄여야 할 것을 공개적으로 고를 수 있었다.
작업반은 공익 목적을 추상적인 보존 대신 측정 가능한 항목으로 바꿨다. 지역 고용 최소 인원, 무장애 객실 유지, 소규모 회의 대관 상한, 거래처 지급 기한이 문장 안에 들어갔다.
직원들은 최소 고용 인원이 적자 때 해고를 불가능하게 만드는지 물었다. 자동 유지가 아니라 감원 전 공개 검토와 대안 제시 의무로 고쳤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을 써서 다음 사람을 속이지 않았다.
지역 대표는 문화 행사 횟수보다 참가자 지급 기준을 요구했다. 무료 공연을 많이 여는 것보다 적게 열어도 출연료와 취소비를 보장하는 편이 공익에 가깝다는 의견이 채택됐다.
채권자들은 공익 기능이 담보 회수보다 무조건 앞서지 않는다는 확인을 받았다. 대신 토지 처분이 필요할 때 기능 승계 가능성을 먼저 공개 입찰하고, 실패했을 때 다음 선택으로 넘어가도록 순서를 정했다.
윤종필은 새 약정에 자기 이름을 넣지 말아 달라고 했다. 작업반은 부탁 때문이 아니라 초안 작성자의 권위를 줄이기 위해 동의했다. 문서는 현재 참여 집단의 이름과 검토 날짜로 남았다.
도윤은 새 조항을 읽고 주방 교육 시간을 지역 고용 숫자에 억지로 더하지 말자고 했다. 교육받는 사람을 값싼 임시 노동으로 세지 않도록 유급 기준과 채용 여부를 분리했다.
공익 목적 약정은 그대로 서명되지 않았다. 직원·거래처·지역 대표가 새 문장을 쓰는 작업반을 꾸렸고, 윤종필은 자료 제공자일 뿐 표결권자가 아니었다. 미완성 문서가 사람들의 현재 선택을 대신하지 않게 했다.
서린은 기록실 확인서 마지막 칸에 서명했다. `봉인 상자 내용 확인, 자동 승계하지 않음`. 아버지가 남긴 상자에는 구원도 모든 책임을 떠넘길 악인도 없었다. 갚아야 할 돈과 지키고 싶었지만 끝내 설명하지 못한 약속이 같은 무게로 들어 있었다.
호텔로 돌아온 밤, 서린과 도윤은 1107호 앞을 지나지 않았다. 로비 직원 식탁에서 늦은 국수를 먹으며 다음 달 수선 순서를 봤다. 숨겨진 뜻을 아름답게 포장하는 대신, 내일 지급할 돈과 고칠 문을 정하는 일이 그들이 선택한 공익의 첫 문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