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어스름이 부엌 바닥의 물기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서진해는 전날 씻다 만 솥을 다시 들어 올리며 손등에 묻은 검댕을 문질렀다. 잠을 설친 탓에 손끝이 둔했다. 솥 안쪽에 눌어붙은 밥알을 쇠수세미로 긁어내는 소리가 고요한 부엌을 날카롭게 갈랐다. 어제 우물가에서 본 두 글자가 눈꺼풀 안쪽에 아직도 선명했다.
잔화(殘火).
꺼지지 않은 불.
"그거 좀 살살 못 긁어? 아침부터 귀가 따갑거든."
담소령이 부엌 문턱에 기대 서 있었다. 풀어헤친 머리카락 사이로 충혈된 눈을 깜빡이는 걸 보니, 그녀 역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모양이었다. 서진해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일찍 일어나셨구먼요."
"잠이 안 왔어. 우물 쪽이 신경 쓰여서."
담소령이 팔짱을 낀 채 안으로 들어와 찬물에 담긴 무를 집어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러고는 서진해 옆에 걸터앉아 말을 이었다.
"그 글자 말이야. '잔화'. 돌틈에 새긴 게 아니라 먹으로 쓴 거더라. 비에 씻기면 며칠이면 사라질 정도로 엷었어. 최근에 쓴 거란 뜻이지."
서진해의 손이 멈추었다. 쇠수세미를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가, 이내 의식적으로 풀렸다. 그는 솥을 뒤집어 물을 빼는 척하며 시선을 피했다. 물이 흙바닥에 쏟아지며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고, 그 위로 새벽빛이 흔들렸다.
"……그런갑소."
"'그런갑소'가 아니라."
담소령이 무를 씹으며 서진해의 옆얼굴을 빤히 보았다.
"너, 그 글자 보고 표정이 달라졌잖아. 어제 우물가에서. 내가 눈이 없는 줄 알아?"
그녀는 무를 내려놓고 일어섰다.
"내가 직접 알아볼 거야. 우물 아래쪽 돌벽을 더 살펴보면 뭔가 나올 수도 있잖아."
"하지 마이소."
서진해가 처음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급하게 튀어나온 목소리에는 평소보다 사투리가 옅었다. 담소령의 눈이 가늘어졌다. 서진해는 제 실수를 알아채고 턱을 굳혔다.
"……우물이 깊어서요. 위험한 짓이라요."
"위험한 건 네가 판단할 일이 아닌데?"
담소령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장난기라고는 한 점도 남지 않은 음성이었다.
"난 의녀야. 약첩에 나오는 처방의 출처가 궁금할 뿐이고, 그 '잔화'라는 글자가 내 약첩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건 나도 알아."
그 말은 서진해의 가슴을 정면으로 찔렀다. 담소령의 약첩 첫 장에서 보았던, 사부의 필체와 닮은 글씨가 다시 떠올랐다. 그녀가 그것을 어디서 얻었는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묻는 순간 자신도 같은 질문을 받게 될 터였다. 침묵이 부엌 안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담소령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서진해. 너 지금 나를 막는 거야, 아니면 그 글자를 숨기는 거야?"
짧은 한마디였지만, 서진해는 그 순간 분명히 선택을 강요받고 있음을 알았다. 여기서 한 발만 잘못 디디면 담소령은 우물로 향할 것이고, 막금산은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객잔 안에 억지로 눌러 두었던 비밀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올지 모른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오늘은 안 됩니다."
평소의 눌린 말투가 아니었다. 담소령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왜?"
"제가 막겠습니다."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서진해는 자신도 놀랐다. 막을 자격도, 설명할 말도 없으면서 몸부터 앞세운 셈이었다. 하지만 물러설 수는 없었다. 담소령이 우물 아래를 건드리는 일만은, 적어도 오늘만은.
담소령은 한동안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알겠어. 오늘은 안 할게."
그녀는 그대로 등을 돌리다가, 문턱에서 멈춰 섰다.
"대신 너도 생각해 봐. 언제까지 숨길 수 있는지."
발소리가 멀어지고 나서야 서진해는 숨을 내쉬었다. 손바닥에는 쇠수세미 자국이 붉게 찍혀 있었다. 막아 냈다는 안도보다, 결국 더 큰 의심만 남겼다는 자각이 먼저 밀려왔다. 숨기는 일이 사람을 지키는 일인지, 더 깊은 구렁으로 미는 일인지, 이제는 그조차 분간하기 어려웠다.
아침 해가 마당을 비출 무렵, 막금산은 장작더미 옆에 앉아 도끼를 갈고 있었다. 그러나 서진해의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도끼가 아니라 막금산의 허리에 걸린 도(刀)였다. 칼집은 헐고 손잡이 가죽은 닳아 속살이 드러나 있었지만, 그 안에 잠든 기운은 달랐다. 오래 묵은 술처럼, 열지 않아도 향이 새어 나오는 물건의 기색이었다.
"주인어른."
장작을 나르던 서진해가 걸음을 멈췄다. 평소 같으면 삼켰을 말이었다. 그러나 어제 막금산이 떠날 준비를 하라고 한 뒤로, 삼킬 수 있는 것의 한계가 달라져 있었다.
"그 도 말입니다. 어제부터 차고 계시네요."
막금산의 손이 멈추었다. 도끼 위로 물방울이 또르르 굴러떨어졌다. 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주름진 얼굴에 아침 햇살이 반쯤 걸려 있었고, 그 눈이 서진해를 보았다. 이 객잔에서 오 년을 함께 살며 수백 번 마주친 눈이었지만, 오늘은 처음 보는 무게가 실려 있었다.
"진해야."
막금산이 입을 열었다. 어제에 이어 다시 이름을 불렀다.
"이 도는 삼십 년 전에 내려놓은 물건이다. 다시 집어 든 건……"
그가 말을 끊고 객잔 대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래야 할 이유가 생겼으니까."
무슨 이유인지 묻기도 전에 막금산이 먼저 일어섰다.
"오늘 행상 손님 짐 정리해라. 어젯밤에 떠났다. 방에 짐을 두고 갔더구나."
그 말만 남기고 노인은 부엌 쪽으로 걸어갔다. 서진해는 장작 위에 올려놓았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막금산의 도에서 느낀 기운이 손바닥에 아직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떠날 준비를 하라는 말, 다시 집어 든 도, 그리고 이유가 생겼다는 짧은 한마디가 서로 맞물리며 불길한 형상을 만들고 있었다.
행상 손님이 묵던 방은 객잔 서쪽 끝의 작은 방이었다. 문을 열자 보따리 하나와 빈 술병 두 개, 짚으로 엮은 방석이 남아 있었다. 싸구려 향 냄새와 땀 냄새가 뒤섞인 방이었다. 보따리를 집어 드니 지나치게 가벼웠다. 행상치고는 물건이 너무 적었다. 대신 헝겊 조각 하나가 곱게 접혀 있었다.
서진해의 손가락이 그 헝겊을 펼치는 순간 멈추었다.
천 위에 먹으로 그려진 표식.
학의 날개가 아니었다. 학영회의 세 줄 칼자국도 아니었다. 원 안을 불꽃이 감싸고 있는 형상이었는데, 서진해의 눈이 넓어진 것은 문양 자체 때문이 아니었다. 그 불꽃의 흐름이 잔화심결 첫째 초식을 펼칠 때 내공이 도는 경로의 도해와 거의 같았기 때문이다.
순간 품속에 넣어 둔 잔화심결의 무게가 갑자기 묵직해졌다. 사부만이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 청문파 안에서도 함부로 밖으로 새어 나갈 수 없는 흐름이 눈앞의 헝겊 위에 버젓이 그려져 있었다. 학영회가 아니라면 다른 누군가가 잔화심결을 쫓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니면 이미 손을 댄 자가 있다는 뜻일지도 몰랐다.
서진해는 문을 닫고 방 안에 선 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막금산에게 바로 가져가면 적어도 판단은 빨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러는 순간, 자신이 왜 이 문양을 알아보는지부터 설명해야 한다. 담소령의 의심이 막금산에게까지 번지면, 객잔은 더는 숨을 곳이 아니게 된다.
그는 입술 안쪽을 세게 깨물었다.
지금 여기서 정해야 했다.
숨길 것인가, 맡길 것인가.
짧은 망설임 끝에 서진해는 헝겊을 접어 품에 밀어 넣었다.
"……아직은 안 됩니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자신도 몰랐다. 막금산에게인지, 담소령에게인지, 아니면 사부의 그림자에 붙들린 제 자신에게인지. 다만 분명한 것은 하나였다. 그는 또 하나의 비밀을 제 손으로 떠안았다. 선택은 끝났고, 대가는 뒤따를 것이다.
문을 닫고 돌아서는 순간, 복도에서 담소령과 마주쳤다.
"얼굴이 왜 그래?"
그녀가 서진해를 올려다보았다.
"귀신이라도 봤어?"
"……아이요. 방 정리하는디 먼지가 많아서."
담소령이 눈을 가늘게 떴다. 서진해의 사투리가 두꺼워질수록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더 캐묻지 않았다. 대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 가지만 물을게."
"……뭔데요."
"너, 청문파라는 이름 들어본 적 있어?"
서진해의 심장이 한 박자 멈추었다. 복도의 먼지가 아침빛 속에서 천천히 떠다녔다. 담소령의 눈은 그의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서진해는 숨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들어봤을 수도 있지요. 강호 얘기가 많이 도는 객잔이니까."
"그래?"
담소령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한 발 물러섰다.
"그럼 됐어. 일단은."
그녀가 돌아선 뒤, 서진해는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일단은.
그 말이 복도에 남아 오래 맴돌았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알아 가고 있는 중인가. 우물의 잔화, 약첩의 필체, 방금 품에 숨긴 헝겊 문양까지. 흩어져 있던 조각들이 담소령 쪽으로도, 자신 쪽으로도 동시에 모여드는 느낌이었다. 객잔의 좁은 복도가 마치 강호의 한복판처럼 숨 막히게 느껴졌다.
그날 저녁, 서진해는 좀처럼 잠을 청하지 못했다. 품속의 헝겊을 꺼내 촛불 아래서 다시 펼쳤다. 원 안의 불꽃 문양은 낮보다 더 선명해 보였다. 학영회가 아닌 다른 누군가. 잔화심결의 경로를 아는 자. 행상 손님의 얼굴을 떠올리려 했지만 기억 속에서 그 얼굴은 이미 흐릿했다. 그가 이 표식을 두고 간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먼저 그 방에 들렀던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생각이 꼬리를 물 무렵, 마당에서 소리가 들렸다.
스윽.
쇳소리가 아니라 바람을 가르는 소리였다. 서진해는 촛불을 끄고 창틈으로 내다보았다.
막금산이 마당 한가운데 서서 도를 뽑고 있었다. 달빛 아래 드러난 칼날은 삼십 년 묵은 녹이 아니라 서릿발처럼 하얀 광택을 품고 있었다. 노인의 첫 번째 일도(一刀)가 허공을 갈랐다.
느렸다.
그러나 그 느림 안에서 서진해의 온몸이 먼저 반응했다.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소름이 돋았다. 상대의 기세를 짓누르는 억센 패도도 아니고, 눈을 속이는 현란한 수법도 아니었다. 한 걸음, 한 호흡, 한 번의 손목 꺾임이 모두 제자리를 알고 움직이는 도였다. 허리를 세우는 각도, 발을 디디는 보법, 칼끝이 멈추는 자리가 조금의 군더더기도 없이 이어졌다. 오 년 동안 야밤에 홀로 검을 잡으며 갈고닦은 감각이, 그 노인의 도 한 수에 눌리고 있었다.
만리독행(萬里獨行).
장터에서, 술상에서, 강호인들이 옛 전설처럼 읊조리던 이름이 떠올랐다. 그것이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장작 냄새 나는 객잔 마당에서 달빛을 베고 있었다. 서진해의 가슴속에서 놀람은 곧 다른 감정으로 바뀌었다.
안도였다.
막금산이 약한 노인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오는 안도.
그러나 그 안도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런 사람이 오 년 동안 숨어 지냈다면, 피한 것은 세상인가, 아니면 세상이 이 사람을 찾고 있었던 것인가. 더구나 자신 같은 청문의 잔불을 곁에 두고도 아무 말 없이 지켜봤다면, 막금산은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었던 것인가.
막금산의 도가 멈추었다. 노인은 도를 거두며 고개를 서진해의 창 쪽으로 돌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어둠 속에서 마주쳤다. 막금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진해 역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침묵은 비어 있지 않았다. 묻지 말라는 뜻 같기도 했고, 이제는 준비하라는 뜻 같기도 했다.
노인이 도를 칼집에 넣고 방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서진해는 생각했다. 이 사람이 오 년 동안 자신을 지켜 왔다면, 대체 무엇으로부터 지켜 왔던 것인가. 그리고 그 답이 객잔 문턱까지 와 있다면, 이번에는 자신이 나서야 하는 것 아닌가.
그때였다.
관도 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울렸다.
다그닥, 다그닥.
하나가 아니었다. 셋, 아니 넷이었다. 삭풍진을 향해 곧장 오고 있었다. 서진해는 창틈 너머로 관도의 어둠을 응시했다. 품속의 헝겊과 잔화심결이 동시에 뜨거워지는 것만 같았다.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바람 끝에 실린 기척 하나가 객잔을 향해 곧장 뻗어 왔다. 순찰대의 거친 살기와는 달랐으나, 더 정교하고 더 노골적인 압박이었다.
막금산이 다시 도를 쥔 이유가 정말 오늘 밤의 일이었다면, 저 말발굽은 누구를 향해 달려오는가.
객잔의 문을 두드릴 자는 누가며, 어째서 하필 지금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