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관 생존자 대표는 다음 날 낮 소림에 들어왔다. 이름은 범초, 예순이 넘은 곡물 계량꾼이었다. 왼쪽 귀가 반쯤 없고 손바닥에는 오래된 화상 자국이 있었다. 그는 산문 안 대전으로 가지 않고 봉인경 서고 앞뜰에 멍석을 깔아 달라고 했다. “우릴 내쫓은 문턱보다 낮은 데서 말하겠소.”
범초는 파문승 법경을 은인이라 부르지 않았다. 처음에는 소림 창고를 지키던 계율승이었다고 했다. 전쟁 마지막 해 오대 세력이 맡긴 구휼미가 절반밖에 들어오지 않자 법경은 부족분을 장부에 적었다. 장로들은 전황을 이유로 숫자를 줄이라고 했고, 그는 지우기를 거부했다.
당시 오창관에는 부상자와 고아, 군소 문파 피난민이 모여 있었다. 남궁의 수레는 병장기를 먼저 실었고 당문의 약상은 독환과 해독제를 같은 표에 올렸다. 무당은 길을 봉했고 개방 일부 장로는 구휼미를 정보값으로 바꿨다. 소림은 창고 문을 닫았다. 구휼미 전용은 한 문파의 चोरी가 아니라 각 세력이 자기 전쟁을 먼저 산 결과였다.
법경은 봉인을 깨고 남은 곡식을 밤에 나눴다. 오창관 생존자 이름을 천 조각과 나무패에 적어 서로 찾게 했다. 낮에는 각 문파 수색대가 탈영자와 도둑으로 잡아갔기 때문에 밤길만 썼다. 범초는 그 길을 ‘검은 밤의 누각’이 아니라 ‘등잔 없는 구호 길’이라고 불렀다고 증언했다.
법정 장로는 법경이 창고를 털고 계율승 둘을 다치게 했다고 맞섰다. 범초는 부정하지 않았다. 곤봉을 휘둘러 한 사람의 어깨를 부러뜨렸고, 쌀자루 수량을 제멋대로 정한 날도 있었다. “우릴 살렸다고 그 손이 깨끗해지는 건 아니오. 하지만 문을 왜 깼는지는 써야지.”
금족방에서 나온 무진대사는 두 제자의 부축을 받았다. 혜륜은 달려가지 않고 의원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 기다렸다. 무진은 법경과 함께 계율을 배운 사형제였다고 밝혔다. 오창관 폐쇄 명령을 읽은 사람은 자신이었고, 법경에게 봉인경 압인을 맡겼다가 그가 곡식을 내주자 회수했다고 했다.
“제가 파문 동의서에 첫 도장을 찍었습니다.” 무진대사의 목소리는 마른 종이처럼 갈라졌다. 법경이 훔친 곡식과 폭력을 적었지만, 먼저 사라진 구휼미와 닫힌 창고는 기록하지 않았다. 소림의 죄를 파문승 한 사람의 죄로 바꾼 문장이었다. 혜륜은 사부의 발밑에 엎드리지 않고 그 말을 받아 적었다.
법경은 파문 뒤에도 생존자 길을 지켰다. 청매표국의 서백하가 수레를 댔고, 개방 말단이 우물과 빈집을 알렸다. 사람들은 이름을 숨기되 서로를 번호로만 부르지 않으려고 매화잎 나무패에 본명을 새겼다. 초기 장부에는 급료도 명령 계급도 없었다.
범초는 그 시절 쓰던 곡식 되를 가져왔다. 밑바닥을 열자 배급받은 집 수와 남은 양이 칼금으로 새겨져 있었다. 법경의 칼금은 늘 사람 이름 옆에 있었고, 훗날 곽연수의 칼금은 길목과 무기 수량 옆에 있었다. 같은 되 안에서도 조직의 목적이 바뀐 흔적을 읽을 수 있었다.
곽연수는 스무 살 무렵 그 길에 들어왔다. 그의 어머니도 오창관에서 약을 못 받아 죽었고 본인은 시신을 묻는 일을 했다. 처음 몇 해는 가장 먼 길을 자원해 곡식을 날랐다. 범초는 그가 밤마다 아이들의 이름을 외워 불러 주던 때를 기억했다.
변한 것은 법경이 부상을 입고 걷지 못하게 된 뒤였다. 곽연수는 길목을 지키려면 칼과 돈이 필요하다며 운송량의 일부를 떼었다. 문파의 밀거래 정보를 팔아 무기를 사고, 배급을 받으려면 명령에 복종하게 했다. 이름 나무패는 번호패로 바뀌고 운송자는 떠날 수 없었다.
‘흑야루’라는 이름도 그때 처음 문서에 나타났다. 곽연수는 오대 세력이 만든 밤을 자신이 다스리겠다는 뜻으로 검은 누각 인장을 팠다. 법경이 세운 생존자 길을 창설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보관자와 배급자를 감시하는 지휘망은 곽연수가 만든 것이었다.
무진대사는 법경이 죽기 전 보낸 마지막 편지를 내놓았다. ‘사람을 번호로 부르기 시작하면 내 이름부터 지워라’라는 문장이 있었다. 편지 봉투는 소림에서 반송됐고 뜯긴 흔적이 없었다. 곽연수는 법경의 뜻을 몰라서 어긴 것이 아니라 반대말을 조직 규율로 세운 셈이었다.
법정은 범초의 기억만으로 소림 기록을 뒤집을 수 없다고 했다. 진무백은 궤짝에서 나온 서백하의 메모를 펼쳤다. ‘법경은 검은 밤을 세웠으나 밤을 다스리려 하지 않았다.’ 무진의 파문 동의서 사본에도 법경이 재산을 모았다는 항목은 없었다. 서로 다른 출처가 같은 차이를 가리켰다.
범초는 품에서 반쯤 탄 나무패를 꺼냈다. 앞면에는 본명 ‘심여’, 뒷면에는 뒤늦게 새긴 흑야루 번호가 있었다. 심여는 범초의 누이였고 곽연수가 배급을 끊겠다며 연락책으로 쓴 사람이었다. 구호를 받은 사람이 강압 조직의 일원이기도 했다는 물증이었다.
그때 서고 지붕에서 기왓장이 떨어졌다. 검은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밧줄을 타고 압인 상자로 내려왔다. 진무백은 칼등으로 밧줄을 끊지 않고 옆 기둥에 감아 속도를 늦췄다. 혜륜은 떨어진 한 사람을 받아 바닥에 굴렸고 청연도인은 다른 사람의 단도를 소매로 감아 빼앗았다.
두 사람의 팔에도 번호가 있었다. 범초가 나무패 번호와 대조하자 심여와 같은 배급조 출신이었다. 그들은 가족에게 쌀을 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압인을 가져오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했다. 곽연수의 이름을 직접 들었으나 얼굴은 보지 못했다. 죽여 없앨 적보다 풀어 내야 할 강압의 고리였다.
법정은 침입자를 소림 감옥에 넣으려 했다. 범초는 가족 배급부터 확인해 달라고 요구했다. 진무백은 두 사람을 무장 해제하되 공개 진술소와 의원이 함께 있는 처소로 보내자고 했다. 명령을 내린 자와 생존 때문에 따른 자의 책임을 같은 형벌로 덮지 않기 위해서였다.
무진대사는 법경의 마지막을 말했다. 파문 뒤 일곱 해째 겨울, 법경은 폐질환으로 오창관 남쪽 굴에서 죽었다. 곽연수는 장례를 치른 뒤 그의 인장을 녹여 검은 누각패를 만들었다. 법경이 살아서 흑야루를 지휘한다는 소문은 곽연수가 복종을 얻으려고 퍼뜨린 것이었다.
범초는 법경의 무덤 위치를 알고 있었다. 비석에는 법명도 영웅담도 없이 구조한 사람 이름 스물셋만 새겨져 있다고 했다. 그 스물셋 가운데 아홉은 뒤에 흑야루 강압망에서 다시 피해자가 됐다. 자구 조직의 시작과 강압 조직의 끝을 분리해 기록해야 할 이유였다.
혜륜은 사부에게 왜 법경의 사망을 알면서 침묵했는지 물었다. 무진은 파문 판단이 틀렸다는 것이 드러날까 두려웠다고 했다. 법경의 폭력만 붙들고 자신이 닫은 문을 보지 않았다. 혜륜은 사부의 참회를 받아 주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폐쇄 원본을 직접 열어 같은 사실이 적혀 있는지 확인하자고 했다.
해 질 무렵 진술문 제목이 정해졌다. ‘오창관 구호 길과 흑야루 지휘망의 분리 기록.’ 첫 줄에는 오대 세력의 구휼미 전용과 창고 폐쇄, 둘째에는 파문승 법경의 구호와 폭력, 셋째에는 곽연수의 강압 전환이 들어갔다. 어느 한 사람의 선악으로 시작을 덮지 않았다.
범초와 무진대사, 번호를 지닌 두 운반자가 각자 읽고 손도장을 찍었다. 진무백은 흑야루 창설 원인이 가난한 사람의 악의가 아니라 전쟁 빚을 숨긴 오대 세력의 방치였음을 확인했다. 동시에 방치에서 태어났다는 이유가 곽연수의 협박과 살인을 면하게 하지도 않았다. 시작과 책임이 처음으로 같은 장부 안에서 갈라져 보였다.
진술문 사본은 법경의 무덤에도 한 부 놓기로 했다. 추모를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그가 사람을 살린 기록과 계율승을 다치게 한 기록, 곽연수가 이름을 도용한 기록을 한곳에서 읽게 하려는 뜻이었다. 범초는 비석에 새 이름을 더하지 말고 살아 있는 사람에게 사본을 먼저 보내 달라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