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리려는데 두레박 줄이 뚝 끊어졌다.
담소하는 우물가에 선 채 한동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검은 수면 위로 나무통이 한 번 흔들리더니 이내 가라앉았다. 사흘 전에 새로 꼰 줄이었다. 오래 닳은 결도 아니고, 매듭이 풀린 것도 아니었다. 끊어진 단면은 지나치게 말끔했다. 칼끝으로 한 번에 잘라 낸 듯한 자국이었다.
손끝으로 그 자리를 문지르던 그는 뒤편에서 들려오는 도끼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노경천이 장작을 패고 있었다. 도끼날이 나뭇결을 따라 떨어질 때마다 장작은 반듯하게 갈라졌다. 힘으로 부수는 게 아니라 결을 읽고 빈틈을 찌르는 손놀림이었다. 검을 쥔 사람의 손이었다.
"줄이 끊어졌습니다."
노경천이 도끼를 내려놓고 다가왔다. 끊어진 자리를 한 번 훑어본 뒤,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쥐가 갉아먹었나 보구나. 내가 새로 꼬마."
쥐가 남길 자국이 아니라는 걸 둘 다 알고 있었다. 담소하는 입을 다물었고, 노경천도 더 설명하지 않았다. 짧은 침묵이 새벽 공기보다 차갑게 내려앉았다. 품 안에 숨긴 종이의 모서리가 가슴팍을 찌르는 감촉만 유난히 또렷했다.
수련은 객잔 뒤편 대숲에서 했다. 노경천이 온 뒤로 새벽 검은 더 이상 혼자의 일이 아니었다. 나뭇가지 대신 진검을 쥐고, 흐트러진 보법은 곁에서 바로잡혔다. 형의 가르침은 분명 도움이 됐다. 그래서 더 불편했다. 검끝이 살아나는 만큼 의심도 함께 날을 세웠으니까.
"허리를 더 틀어. 발은 반 보 짧게. 상대가 네 왼쪽을 파고들면 물러서지 말고 비켜라."
담소하는 지시대로 움직였다. 발끝이 낙엽을 스치고, 허리가 돌아가며 검이 짧게 울었다. 그 순간 등이 화끈하게 당겼다. 왼쪽 견갑 아래, 화상이 가장 깊게 남은 자리가 뜨겁게 맥동했다. 마치 피부 아래 숨은 실선 하나가 검의 궤적을 따라 깨어나는 듯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초식을 끝냈다. 숨을 고르며 돌아보자 노경천의 시선이 정확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사형."
"왜 그러느냐?"
"방금 보법은 사부님이 가르치신 적 없습니다."
노경천이 엷게 웃었다. 다정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눈빛은 미동도 없었다.
"사부님이 미처 정리하지 못한 결이다. 내가 남은 흐름을 이어 붙였지. 살아 계셨다면 네게도 전하셨을 거다."
말은 매끄러웠다. 그래서 더 걸렸다. 사부는 검을 가르칠 때 늘 이유를 먼저 말했다. 사람을 살릴 검인지, 죽일 검인지. 그런데 노경천의 검은 결과만 남기고 이유를 감췄다.
담소하가 검을 거두려는 순간, 노경천의 손이 그의 어깨를 스치듯 지나갔다.
아니, 어깨가 아니었다.
손끝은 정확히 등으로 내려와 화상 위쪽의 경혈 하나를 짚었다. 걱정하는 형의 손길처럼 가벼웠지만, 확인하는 사람의 손끝처럼 정확했다.
담소하는 반사적으로 반 보 비켜섰다.
노경천의 눈썹이 아주 잠깐 움직였다.
"아프냐?"
"괜찮습니다."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안에는 물러서겠다는 뜻이 섞여 있었다. 노경천은 더 다가오지 않았다. 다만 검집을 쥔 손에 힘이 잠시 들어갔다가 풀렸다. 형도 방금의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객잔으로 돌아오니 묘련이 부엌에서 죽을 끓이고 있었다. 늘 하던 아침과 다를 것 없는 풍경인데도, 오늘은 불길이 유난히 높았다. 가마솥 앞에 쪼그려 앉은 어깨가 잔뜩 굳어 있었다.
"밥 먹어. 식기 전에."
담소하가 자리에 앉자 그릇이 탁 놓였다. 죽 위에 잘게 썬 파가 올라가 있었다. 평소와 같은 상차림이었지만, 그릇을 놓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없어."
묘련은 숟가락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한참 망설이던 끝에 담소하를 똑바로 봤다.
"새벽에 행상 하나가 들렀어. 비단 파는 척하면서 객잔마다 소문이나 흘리고 다니는 놈. 그놈이 그러더라. 흑풍채가 현상을 걸었대. 청문검파 잔당을 산 채로 잡아오면 은자 삼백 냥. 죽여서 가져가도 절반은 준다더라."
삼백 냥.
운교객잔의 일 년 벌이보다 많았다. 이 마을 사람들 눈에 그 돈은 의리보다 무겁고, 침묵보다 달았다. 누군가 한 번만 의심해도 객잔 문턱은 곧바로 칼과 횃불을 부를 수 있었다.
묘련이 낮게 말했다.
"이제는 진짜 떠나야 하는 거 아니야?"
퉁명스러운 말투였지만, 그 안에 든 것은 짜증이 아니라 겁이었다. 담소하는 대답 대신 죽을 한 술 떴다. 뜨거운 것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 떠나야 한다는 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객잔의 아침 냄새와, 묘련이 아무 말 없이 올려 두는 파 몇 조각을 알게 된 뒤로는 그 당연한 일이 칼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조금만 더 있겠습니다."
묘련의 얼굴이 굳었다.
"조금? 그 조금 사이에 누가 널 팔아넘기면? 아니, 너 말고 우리를 팔아넘기면?"
처음으로 말끝이 날카롭게 섰다. 담소하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반박할 말이 없었다. 자신이 머무르는 일은 더 이상 혼자 감당할 위험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는 고개를 들고 말했다.
"지금 떠나면 더 빨리 잡힙니다. 흑풍채가 길목을 보고 있을 겁니다."
"그럼 여기서 기다리자고?"
묘련의 눈이 붉게 달아올랐다. 화를 내는 사람의 눈이 아니라, 붙잡고 싶은데 붙잡을 자격이 없다고 여기는 사람의 눈이었다.
담소하는 잠시 침묵했다가 낮게 덧붙였다.
"며칠만. 그 안에 길을 찾겠습니다."
무엇의 길인지 그는 끝내 말하지 않았다. 묘련도 묻지 않았다. 다만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돌렸다. 그 침묵이 꾸중보다 더 무거웠다.
점심 무렵, 노경천이 장터에 다녀오겠다며 나섰다. 약재와 소금을 사 오겠다고 했지만, 담소하는 그가 정보를 모으러 가는 것임을 알았다. 현상 수배서가 어디까지 붙었는지, 흑풍채의 수하가 어느 길목을 지키는지. 형은 그런 일에 능했다. 웃는 얼굴로 남의 경계를 풀고, 필요한 말만 골라 가져오는 사람이었다.
사형이 떠난 뒤, 담소하는 부엌 뒤편 광으로 들어갔다. 문을 반쯤 닫고 품에서 종이를 꺼냈다. 어젯밤 백천리가 술값 대신 남기고 간 것이었다. 구겨진 종이 한 면에는 거친 글씨가 적혀 있었다.
'우물은 깊을수록 독을 타기 쉽다.'
처음 봤을 때는 술 취한 도객의 헛소리쯤으로 여겼다. 하지만 오늘 새벽 잘린 우물줄을 본 뒤로는 그 문장이 달리 보였다. 누군가 이미 이 객잔의 물을 흐리려 들고 있다는 경고처럼.
담소하는 종이를 빛에 비스듬히 기울였다. 어젯밤 촛불 아래서는 보이지 않던 작은 글씨가 떠올랐다.
'위무강의 잔서를 찾아라.'
손끝이 굳었다.
위무강. 사부의 이름이었다.
멸문의 밤, 담소하가 본 것은 불타는 서가와 피 냄새, 그리고 쓰러지는 사형제들의 등뿐이었다. 청문검파에 남은 글은 모두 재가 되었다고 믿었다. 그런데 잔서라니. 불 속에서도 남은 글이 있다는 뜻인가. 아니면 누군가 일부러 감춘 것인가.
노경천에게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스쳤다. 사형은 사부의 일을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다. 잔서가 있다면 함께 찾는 것이 맞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대숲에서 느꼈던 손끝이 떠올랐다. 화상 위 경혈을 짚던 정확한 감각. 사부가 남기지 않았을 보법. 그리고 우물줄처럼 말끔히 잘린 침묵들.
형에게 말하면, 이 단서는 내 손을 떠난다.
그 생각이 들자 망설임이 끊어졌다. 담소하는 종이를 다시 접어 품 안 깊숙이 넣었다.
처음이었다.
사형에게서 무언가를 숨기기로, 스스로 결정한 것은.
해가 기울 무렵 노경천이 돌아왔다. 한 손에는 소금 자루, 다른 손에는 약재 꾸러미가 들려 있었다. 표정은 평온했다. 너무 평온해서 오히려 부자연스러웠다.
담소하는 그의 신발 끝을 보았다. 붉은 흙이 묻어 있었다. 장터 길은 누런 황토다. 붉은 흙은 북쪽 고갯길에서만 밟힌다. 흑풍채의 검문이 서 있다는 바로 그 길이었다.
"장터에 별일 없었습니까?"
"별일 없었다. 소금값이 좀 올랐더라."
노경천은 웃으며 약재를 묘련에게 건넸다. 묘련은 꾸러미를 받다가 그의 신발을 한 번 내려다봤다. 그리고 담소하와 눈이 마주쳤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뜻은 분명했다.
나도 봤어.
저녁상은 조용했다. 노경천은 장터의 시시한 소문을 몇 마디 꺼냈고, 묘련은 건성으로 맞장구를 쳤다. 담소하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세 사람 사이에 놓인 것은 밥상이라기보다, 누가 먼저 칼집을 열지 재는 얇은 장막 같았다.
식사가 끝난 뒤 노경천이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 담소하는 부엌에서 그릇을 닦았다. 물에 손을 담그면 생각이 조금 가라앉곤 했다. 사부도 늘 그랬다. 검을 쓴 뒤에는 검이 아니라 손을 씻었다. 피를 털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음에 남은 살기를 가라앉히기 위해서라고 했었다.
오늘은 손을 씻어도 소용이 없었다.
묘련이 문간에 기대어 섰다.
"그 사람, 북쪽 고개에 다녀왔어."
담소하는 그릇을 닦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알고 있습니다."
"알고도 가만있겠다고?"
이번에는 묘련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화가 아니라 답답함이었다. 담소하는 물에서 그릇을 건져 천으로 닦았다. 한 번, 두 번. 괜히 같은 자리를 오래 문질렀다.
"지금 묻고 들이받으면, 형은 더 숨길 겁니다."
"그럼 넌? 계속 속을 거야?"
속는 것과 지켜보는 것은 다르다. 하지만 그 차이를 설명할 말이 지금은 없었다.
"단서가 하나 있습니다. 아직은 저만 아는 게 낫습니다."
묘련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한테도 말 못 해?"
미안하다는 말이 목까지 올라왔지만 끝내 삼켰다. 지금 입을 열면, 형에게 숨긴 비밀이 곧 객잔 전체의 짐이 된다. 그건 더 위험했다.
"조금만 더 지켜보겠습니다."
묘련은 한참 그를 보다가 돌아섰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담소하는 그제야 길게 숨을 내쉬었다. 처음 형에게 비밀을 만들었고, 같은 날 처음 묘련에게도 침묵을 남겼다. 숨기는 것이 늘어날수록 사람은 혼자가 된다. 그 사실이 서늘하게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밤이 깊어 모두 잠든 뒤, 담소하는 다시 광으로 들어갔다. 달빛이 문틈으로 가늘게 스며들었다. 그는 종이를 펼쳐 사부의 이름 석 자를 오래 바라보았다. 위무강. 그 이름 아래 붙은 잔서라는 두 글자는 희망처럼 보이면서도 덫처럼 느껴졌다. 사부가 남긴 것이 정말 있다면, 왜 지금 나타났는가. 누가 그것을 알고 있으며, 누가 먼저 찾으려 하는가.
종이를 접어 넣으려는 순간, 바깥에서 인기척이 났다.
담소하는 숨을 죽이고 몸을 낮췄다. 광문 틈으로 밖을 내다보자 달빛 아래 노경천이 서 있었다. 형은 담소하의 방이 아니라 처음부터 광 쪽을 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시선은 지나치게 정확했다. 마치 그가 이 안에 들어와 있을 것을 알고 기다린 사람처럼.
노경천의 손에는 서찰 하나가 들려 있었다. 담소하가 본 적 없는 종이였지만, 봉한 먹빛 인장은 낯설지 않았다. 불타던 청문의 서고 문짝에 새겨져 있던, 그 반쯤 탄 문양과 닮아 있었다.
"소하야."
부르는 소리는 다정했으나, 그 한마디에 물러설 틈은 없었다.
"네가 먼저 문을 열겠느냐. 아니면 내가 이 서찰의 이름부터 읽어 줄까?"
담소하의 손이 품 안의 종이를 움켜쥐었다. 형이 들고 온 것이 사부의 잔서에 관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시험하는 미끼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분명한 것은 하나였다. 오늘 밤 문 하나가 열리면, 내일은 더 이상 지금의 객잔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
그리고 광문 밖, 노경천의 그림자가 달빛을 밟고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