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공기가 살을 에듯 차가웠다. 마구간 구석의 짚더미는 어제 훈련의 흔적으로 눌리고 흩어져 있었다. 카일은 몸을 일으키며 왼쪽 어깨를 천천히 돌렸다. 목검에 맞은 자리는 아직 뜨겁게 쑤셨고, 손가락은 쥐는 것보다 펴는 쪽이 더 어려웠다. 그런데도 입가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어제 이안이 던진 짧은 말이 밤새 귓가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내일도 와라.’
그 한마디는 짚더미보다 따뜻했고, 동시에 더 잔인했다. 오라는 말은 곧 버티라는 뜻이었으니까. 카일은 손목에 감은 천을 다시 조여 맨 뒤, 말없이 마구간 문을 밀고 나섰다.
훈련장으로 가는 길은 성 안쪽 뜰을 가로질렀다. 하인들이 물통을 나르고, 부엌에서는 갓 구운 빵 냄새가 흘러나왔다. 평소라면 익숙했을 풍경이 오늘은 이상하게 멀게 느껴졌다. 후보생 훈련에 참가한다는 소문이 퍼진 뒤로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져 있었다. 대놓고 비웃는 눈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응원도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그릇을 보는 눈, 혹은 감히 제 자리를 벗어나려는 것을 보는 눈이었다. 등 뒤에서 마구간지기 노파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쇠사슬 자국도 채 안 지워졌는데 검을 쥐겠다고.”
카일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멈추는 순간, 그 말이 발목에 감겨 다시 끌어내릴 것 같았다.
훈련장에 도착했을 때 열두 명의 후보생이 이미 원형으로 서 있었다. 이안은 아직 오지 않았다. 카일이 마지막 자리를 찾아 들어서자, 옆의 붉은 머리 후보생이 반 발짝 비켰다. 그 옆의 후보생도 따라 물러섰다. 원형 끝에 카일만을 위한 빈틈이 생겼다. 누구도 입으로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 간격은 어떤 조롱보다 분명했다. 어디선가 낮은 속삭임이 흘렀고, 웃음이 잔물결처럼 번졌다.
“마구간 냄새 난다.”
카일은 무심코 소매를 맡아 보려다 손을 멈췄다. 그 순간 더 큰 웃음이 터질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천천히 손을 내리자 어느새 주먹이 굳게 쥐어져 있었다.
그때 이안이 나타났다. 걸음은 조용했지만 훈련장의 공기를 단숨에 가라앉혔다. 넓은 어깨 위로 걸친 외투 사이로 오래된 상흔이 잠깐 드러났다 사라졌다. 그는 후보생들의 배치를 한 번 훑었다. 카일 주위의 어색한 빈 공간도 분명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늘은 조를 나눈다. 세 명씩 네 조. 조별 목검 대련이다.”
카일은 잠깐 숨을 멈췄다. 혹시라도 한마디쯤은 해 줄 거라 기대했던 자신이 우스워졌다. 그는 삼조에 배정되었다. 같은 조원은 붉은 머리의 가렛과 덩치 큰 토르였다. 배정이 끝나자마자 가렛이 손을 들었다.
“교관님, 조 변경을 요청합니다.”
“이유는?”
“조별 대련인데 저쪽이 다치면 책임이 애매합니다. 정식 등록이 된 놈인지도 모르겠고요.”
가렛의 턱짓은 노골적이었다. 훈련장에 낮은 웃음이 번졌다. 이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신분 불문 선발이라고 했다. 조 변경은 없다.”
짧고 단호했다. 그 말에 카일은 아주 잠깐 숨을 돌렸다. 하지만 가렛이 등을 돌리며 입술만 움직이는 것을 보는 순간, 그 안도는 곧 식었다. 소리 없는 말이었지만 카일은 또렷하게 읽었다.
네가 알아서 나가라.
첫 상대는 토르였다. 덩치 차이가 확연했다. 토르의 목검이 내려올 때마다 팔뚝이 저릿했고, 받아낼 때마다 손바닥이 얼얼했다. 그러나 카일은 물러서기만 하지 않았다. 어제 반복한 기본 자세가 몸에 남아 있었다. 발끝의 방향, 중심을 낮추는 법, 힘을 정면으로 받지 않고 흘리는 타이밍. 토르가 힘으로 세 번째 밀어붙였을 때, 카일은 반 보 옆으로 비키며 목검 끝을 토르의 손목 안쪽에 걸쳤다. 토르의 손이 순간 풀렸고, 목검 끝이 아래로 처졌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제법이네. 마구간 놈치고.”
칭찬도 아니고 모욕도 아닌 말이었다. 그래서 더 거슬렸다. 카일은 대꾸하지 않았다. 지금 입을 열면 검보다 먼저 분노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문제는 쉬는 시간에 터졌다. 훈련장 한쪽의 공용 식수통으로 카일이 다가갔을 때, 가렛이 먼저 국자를 들고 있었다. 카일은 말없이 기다렸다. 가렛은 물을 다 마신 뒤 국자를 통에 돌려놓지 않고 흙바닥에 툭 내려놓았다. 일부러 먼지가 묻게, 일부러 누구나 보게.
옆에 있던 후보생 둘이 피식 웃으며 차례로 물을 마셨다. 세 번째 후보생은 카일이 손을 뻗자 식수통을 반 발짝 뒤로 밀었다. 작은 동작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너무 선명했다. 너는 여기서도 마지막이라는 뜻. 아니, 어쩌면 아예 자격이 없다는 뜻이었다.
“노예가 입 댄 국자로 마시고 싶진 않으니까.”
카일의 목이 바싹 말랐다. 갈증보다 먼저 치밀어 오른 것은 분노였다. 손끝이 떨렸다. 눈앞이 잠깐 흐려지며 오래전 기억이 겹쳐졌다. 쇠사슬, 진흙, 물 한 모금 얻으려다 발로 차이던 날들. 그때도 그는 참았다. 살아남기 위해서.
오늘도 그래야 하는가.
그는 식수통을 붙잡지 않았다. 대신 흙바닥의 국자를 집어 들었다. 먼지를 털어내지도 않은 채 가렛 앞에 또박또박 내려놓았다.
“국자는 제자리에 둬야지. 기사 흉내를 내려면 도구부터 다루는 법을 배워.”
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 가렛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뭐라고?”
주먹은 예상보다 빨랐다. 카일의 턱을 정통으로 후려친 충격에 시야가 비틀렸다. 그는 그대로 흙바닥에 넘어졌다. 입안으로 먼지가 밀려들고, 혀끝에 피 맛이 번졌다. 아주 오래전, 땅바닥에 처박힌 채 발길질을 견디던 감각이 되살아났다.
이번에도 일어나면 된다.
일어나서 되돌려주면 된다.
카일의 손이 흙을 움켜쥐었다. 몸은 이미 반쯤 튀어 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여기서 주먹을 휘두르면 끝이다. 노예가 후보생을 때렸다는 말 한마디면 훈련장 문은 다시는 열리지 않을 것이다. 분노는 쉽다. 그러나 오늘 필요한 것은 분노를 쏟아내는 일이 아니라, 분노를 붙들고 서 있는 일이었다. 그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끝내 주먹을 풀지 않은 채, 성급히 달려들지 않았다.
이안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카일은 고개를 들었다. 스승이 가렛을 꾸짖을까, 최소한 식수통 앞에서 벌어진 일을 바로잡을까. 그 짧은 기대가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안은 카일만 내려다보았다.
“일어나.”
그것뿐이었다. 가렛에게도, 옆에서 웃던 후보생들에게도 아무 말이 없었다. 카일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턱에서 피가 한 줄 흘러내렸지만 닦지 않았다. 이안의 시선이 잠깐 카일의 굳은 주먹에 머물렀다가 스쳐 지나갔다. 그 눈빛이 무엇을 뜻하는지 카일은 읽을 수 없었다. 참은 것을 본 것인지, 더 참으라고 하는 것인지. 가렛의 주먹보다 더 깊게 박힌 것은 그 침묵이었다.
오후 훈련은 더 거칠어졌다. 가렛은 대련 내내 노골적으로 힘을 실었고, 카일은 이를 악물고 받아냈다. 정면으로 맞서면 밀렸다. 그래서 그는 발을 살짝 비틀어 상대의 중심을 흘리고, 한 박자 늦게 검끝을 들이밀었다. 이안은 여전히 칭찬도 꾸중도 하지 않았다. 다만 한 번, 카일이 무너질 듯한 자세에서 겨우 중심을 세웠을 때만 짧게 말했다.
“발을 죽이지 마라.”
그 한마디에 카일은 이상하게 더 화가 났다. 지금 자신이 죽이지 않으려 애쓰는 것이 발뿐만이 아니라는 걸, 이안은 정말 모르는 걸까.
훈련이 잠시 멈춘 틈, 카일은 뒤편 돌담에 기대어 거친 숨을 골랐다. 그 앞을 레오가 지나갔다. 어제까지의 레오라면 분명 비웃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카일의 턱에 남은 핏자국과 아직도 굳은 주먹을 번갈아 보더니 걸음을 멈췄다.
“안 때렸네.”
짧은 말이었다. 조롱이 아니라 확인에 가까운 어조였다. 카일은 대꾸하지 않았다. 레오도 더 말하지 않았다. 다만 돌아서기 직전, 아주 작게 혀를 찼다.
“그 가렛, 생각보다 겁이 많군.”
누구를 향한 말인지 카일은 잠시 알 수 없었다. 자신을 향한 비웃음인지, 가렛을 향한 냉소인지. 하지만 레오의 등이 멀어질 때, 적어도 오늘만큼은 자신을 완전히 아래로 보지는 않았다는 사실만은 느낄 수 있었다. 조롱보다 짧은 인정이 더 오래 마음에 남는다는 것이 이상했다.
해가 기울 무렵 훈련이 끝났다. 카일이 마구간으로 돌아가는 길, 성 외곽 우물가에서 미라가 기다리고 있었다. 손에는 천으로 감싼 작은 보따리가 들려 있었다. 카일의 턱을 본 미라의 표정이 단번에 굳었다.
“들었어. 식수통에서 일이 있었다며.”
“누가 말했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지. 하인들 사이엔 벌써 다 퍼졌어. 노예가 맞고도 가만히 있었다고.”
미라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배어 있었다. 카일을 향한 것이 아니라, 그런 말을 구경거리처럼 옮기는 사람들을 향한 분노였다. 그녀는 보따리를 풀었다. 안에는 작은 가죽 물주머니와 약초 연고, 그리고 반으로 나눈 빵이 들어 있었다. 카일이 고개를 돌리자 미라는 한숨을 쉬며 연고를 손가락에 묻혔다. 차가운 약초 향이 코끝을 스쳤고, 상처 위에 닿자 따끔한 통증 뒤로 서늘한 기운이 번졌다.
“안 때린 건 잘한 거야.”
미라가 낮게 말했다.
“하지만 계속 맞기만 하면, 언젠가는 네가 네 자신을 미워하게 돼. 그건 더 나빠.”
카일은 빵을 받아 들고 한참 말이 없었다. 미라 앞에서는 이상하게 거짓말도, 허세도 잘 나오지 않았다.
“나도 때리고 싶었어.”
“알아.”
“정말로, 그 자리에서 목검이 아니라 주먹으로라도…….”
말끝이 흐려졌다. 미라는 잠시 손을 멈추더니 물주머니를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런데도 안 했잖아. 그건 겁먹은 게 아니라 고른 거야. 네가 어떤 사람이 될지.”
카일은 천천히 물을 마셨다. 차가운 물이 목을 타고 내려가자, 하루 종일 타들어 가던 속이 조금 가라앉았다. 누군가 자신의 참음을 비겁함이 아니라 선택이라고 말해 준 것은 처음이었다. 그 말 하나가 이상할 만큼 깊게 박혔다. 분노로 들끓던 속이 조금씩 가라앉자,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억울함만이 아니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희미한 감각, 그리고 내일도 버틸 수 있으리라는 아주 작은 확신이었다.
마구간으로 돌아온 뒤, 카일은 짚더미 위에 앉아 손바닥을 펼쳤다. 주먹을 너무 세게 쥔 탓에 손톱 자국이 초승달처럼 패여 있었다. 오늘 배운 것은 검술만이 아니었다. 훈련장에서 노예의 자리가 어디인지, 사람들은 어떤 선에서 침묵하는지, 그리고 자신이 어디까지 참을 수 있는지였다. 무엇보다 이안의 침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왜 가렛을 막지 않았을까. 정말 공정해서였을까. 아니면 카일이 얼마나 버티는지 보려는 시험이었을까. 혹은 노예가 당하는 모욕쯤은 개입할 가치가 없다고 여긴 걸까. 생각이 그 지점에 닿자 가슴 한복판이 서늘해졌다.
밤이 깊어졌을 무렵, 마구간 밖에서 아주 희미한 발소리가 들렸다. 카일은 숨을 죽인 채 몸을 일으켰다. 문틈 사이로 보이는 것은 이안의 등이었다. 그는 마구간 앞을 지나가다 잠시 멈추더니, 문 앞 돌 위에 무언가를 올려놓고 말없이 돌아섰다.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마치 들켜도 상관없다는 듯, 혹은 애초에 들키기를 바랐다는 듯한 걸음이었다.
카일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을 때, 돌 위에는 가죽 끈으로 감싼 작은 물건이 놓여 있었다. 풀어 보니 손바닥만 한 숫돌이었다. 목검이 아니라 진짜 검날을 갈 때 쓰는 것. 후보생에게도 쉽게 쥐여 주지 않는 물건이었다. 카일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안이 왜 이런 것을 자신에게 남겼는지 묻기도 전에, 숫돌 아래 끼워진 종이쪽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천천히 종이를 펼쳤다.
글씨는 이안의 것이 아니었다. 가늘고 비스듬한 필체, 낯선데도 이상하게 서늘한 느낌을 주는 글씨였다. 단 한 줄만 적혀 있었다.
‘네 아버지도 같은 자리에서 시작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종이에서는 희미한 냉기가 배어 나왔다. 밤공기와는 다른, 오래된 비밀의 잔향 같은 서늘함이었다. 카일은 본능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명 조금 전 문 앞에 선 것은 이안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숫돌 아래에 이 쪽지를 끼워 넣은 자는 누구인가. 이안이 일부러 남긴 것이라면 왜 필체를 감췄고, 다른 자의 짓이라면 어째서 이안의 눈을 피해 여기까지 다가왔는가.
그리고 더 끔찍한 의문이 뒤따랐다. 아버지를 아는 자가 성 안에 있다면, 그자는 카일을 언제부터 지켜보고 있었던 걸까. 훈련장인가, 마구간인가, 아니면 그보다 훨씬 전부터인가.
사각.
카일이 쪽지를 움켜쥐는 순간, 마구간 지붕 위에서 아주 미세한 기와 스치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가 아직 떠나지 않았다는 듯한, 혹은 그의 반응을 끝까지 지켜보고 있다는 듯한 소리였다. 카일은 숫돌을 움켜쥔 채 문밖의 어둠을 노려보았다. 내일 훈련장에 나가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하지만 그 내일이 정말 훈련만으로 끝날지는, 이제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