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어스름이 채 걷히기 전, 소령은 부엌 뒤편 우물가에서 물을 길었다. 두레박이 올라올 때마다 밧줄이 손바닥을 스쳤고, 찬물이 손등에 튀었다. 삼 년째 같은 동작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두레박을 내리는 팔에 묘한 떨림이 남아 있었다. 어젯밤 막리연이 억지로 열어준 세 곳의 혈도가 아직 미세하게 욱신거렸다.
부엌으로 들어서자 팽노가 이미 칼을 쥐고 있었다. 무를 써는 손놀림은 여느 때와 다를 것이 없었지만, 소령은 그 손을 볼 때마다 생각했다. 저 손이 칼을 쥐는 방식은 요리사의 것이 아니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팽노도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그것이 삼 년간의 규칙이었다.
"밥 다 되면 불러라."
팽노가 칼을 내려놓고 뒷마당으로 나갔다. 소령이 고개를 돌렸을 때, 뒷마당 평상에 막리연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아침부터 술병을 옆에 두고 있었지만 마시지는 않았다. 팽노가 그 맞은편에 걸터앉았다. 두 사람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흘렀고, 소령은 부엌 창틀 너머로 그 뒷모습을 보면서 밥물이 끓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척했다.
"도현진의 부탁이라 했지."
팽노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막리연이 고개를 돌렸다. 소령의 손이 주걱을 쥔 채 멈추었다.
"그건 그쪽 이야기고." 막리연이 대답했다. 느긋한 말투였으나, 평소의 능청은 빠져 있었다. "나는 부탁 같은 거 받은 적 없어. 다만—"
"다만?"
"빚이 있을 뿐이지."
팽노가 한참을 말없이 막리연을 바라보았다. 소령은 밥솥 뚜껑이 덜걱거리는 소리에 시선을 돌려야 했다. 다시 귀를 세웠을 때 들린 것은 팽노의 한마디뿐이었다.
"아이한테 빚을 갚겠다고? 빚쟁이 치고는 느긋하더군."
막리연이 웃었지만 대답은 없었다. 팽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덧붙였다. "가르치겠다면 가르쳐. 대신 기맥 한 줄이라도 잘못 건드리면, 내가 직접 네 손목을 분질러 놓겠다." 말투는 국밥 주문을 받을 때와 다를 바 없이 평평했다. 그래서 더 무거웠다.
아침 식사는 조용했다. 팽노가 끓인 된장국, 소령이 안친 밥, 막리연이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를 마른 멸치 한 접시. 세 사람이 식탁에 마주 앉은 것은 막리연이 객잔에 묵기 시작한 이래 처음이었다. 팽노는 국을 두 숟갈 뜨고 자리를 떴고, 막리연은 멸치를 하나 집어 오래 씹더니 소령을 보았다.
"밥 먹고 뒷산으로 올라가자."
"손님들 점심 준비가—"
"팽 노인이 허락했어. 오전은 비워도 된다고."
소령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허락이라는 말이 낯설었다. 삼 년 동안 객잔을 벗어나 무언가를 한다는 것 자체가 없었다. 아니, 벗어나지 않으려 했다. 객잔 안에 있는 한 자신은 한소령이 아니라 그냥 종업원이었으니까.
뒷산 중턱, 소나무 아래. 막리연은 가지 하나를 꺾어 땅바닥에 원 하나를 그렸다. "여기 안에 서. 발이 원 밖으로 나가면 다시 처음부터야." 소령은 원 안에 섰다. 좁았다. 팔을 뻗으면 금세 밖으로 나갈 정도였다.
"기맥을 안정시키는 게 먼저라고 했잖습니까."
"맞아. 그래서 이 안에서 숨만 쉬는 거야. 코로 들이쉬고, 아랫배에 담고, 입으로 내뱉고. 이것만 서른 번."
소령은 시키는 대로 했다. 열다섯 번째 호흡에서 몸이 흔들렸다. 어젯밤 막리연이 열어준 혈도 근처에서 기류가 뒤틀리는 감각이 올라왔다. 이를 악물고 버텼지만 스물두 번째에서 무릎이 꺾이며 한쪽 발이 원 밖으로 나갔다.
"처음부터." 막리연의 목소리에는 동정도, 질책도 없었다.
세 번째 시도에서 겨우 서른 번을 채웠다.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고, 혈도 주변이 뜨거웠다. 소령이 헐떡이며 원 안에 쪼그려 앉자, 막리연이 물통을 던져주었다. "네 사부가 검결을 등에 새긴 건 너를 살리려는 거였겠지. 그런데 후반부 없이 전반부만 쓰면 기맥이 뒤집히는 건, 알고 새긴 건지 모르고 새긴 건지."
소령의 손이 물통을 쥔 채 굳었다. "사부님은 아셨을 겁니다."
"그러면 네가 후반부를 구할 수 있다고 믿었거나, 아니면—" 막리연이 말을 끊었다. 시선이 잠깐 먼 산을 향했다가 돌아왔다. "아니면 누군가에게 부탁했거나."
팽노에게, 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둘 다 그 이름을 떠올렸다. 소령은 물을 한 모금 삼킨 뒤 물었다. "당신은 왜 청명문 검결을 알아봤습니까."
막리연이 웃었다. 이번에는 진짜로 웃는 얼굴이었다. "오래 살다 보면 별걸 다 보게 돼." 대답이 아니었다. 소령도 알았고, 막리연도 알았다. 그 질문은 아직 열어둘 시간이었다.
오전 수련을 마치고 산을 내려오는 길, 객잔 앞에 낯익은 얼굴이 서 있었다. 담여화였다. 약초 바구니를 한쪽 팔에 걸치고, 눈을 가늘게 뜨고 막리연을 훑어보고 있었다.
"야, 한소령. 이 아저씨가 너 데리고 산에 다녀온 거야?"
"약재 가져온 거면 부엌에 놓고 가."
"대답 안 했잖아." 여화가 한 발 다가섰다. 막리연을 향해 턱을 까딱했다. "저번에 장터에서 물어봤거든요. 파서진에 장기 투숙하는 떠돌이 검객? 아무도 모르던데. 어디서 오셨어요?"
막리연이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아가씨, 나는 그냥 술 좋아하고 조용한 데 좋아하는 한량이야." 여화의 눈이 더 가늘어졌다. "한량이 허리에 검을 차나요."
소령이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만해. 우리 객잔 손님이야." 여화가 소령을 보았다. 한 박자 늦게 시선이 소령의 손등에 머물렀다. 물집이 잡혀 있었다. 허드렛일 물집이 아니라 무언가를 세게 쥐었을 때 생기는 종류의 물집이었다. 여화는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그리고 바구니를 부엌 문 앞에 내려놓으며 나직이 말했다.
"엄마 약 지으러 내일 현성에 가야 해. 같이 가줄 수 있어?"
"내일은—" 소령이 막리연을 돌아보았다. 막리연이 어깨를 으쓱했다. "가. 하루 쉰다고 기맥이 다시 꼬이진 않아."
여화가 돌아간 뒤, 소령은 부엌에서 점심 준비를 하며 칼로 파를 썰었다. 칼날이 도마에 닿는 소리가 일정하게 울렸다. 막리연이 문틀에 기대어 서서 말했다.
"저 아가씨, 똑똑하네. 계속 객잔에 숨어 있으면 모를까, 네가 밖으로 나가기 시작하면 눈치 채는 사람이 늘어날 거야."
소령의 칼질이 한 번 멈추었다가 다시 이어졌다.
"그래도 가야 합니다."
"현성이라. 혈사문 무인들이 활개 치는 곳이지." 막리연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조심해. 네 얼굴을 아는 놈이 있을 수도 있어."
소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칼을 내려놓고 물에 손을 씻으며 창밖을 보았다. 여화가 걸어가는 뒷모습이 저잣거리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고 있었다. 그 뒤를, 소령이 미처 보지 못한 시선 하나가 따라가고 있었다. 객잔 건너편 찻집 처마 아래, 낯선 사내가 차를 마시다 말고 약초 바구니를 든 여인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내의 왼쪽 손목에는 뱀 비늘 문양의 가죽 호완이 감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