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부서의 두 번째 제안서는 첫 번째보다 친절했다. `현장 품질 개선 책임자`, 직급 한 단계 상승, 별도 성과급. 윤서하는 마지막 장을 펼쳤다. 평가 항목에는 평균 처리일과 표준안 적용률이 크게 적혀 있었고, 고객 설명 완료와 독립 검토는 작은 참고 지표로 내려가 있었다.
“침수 건처럼 출고를 멈추면 처리일이 늘어납니다.” 서하가 말했다.
기획부서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외 사유를 인정할 수 있습니다. 다만 조직 전체는 속도가 필요해요. 윤 대리가 현장을 아니까 균형을 잡을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균형이라는 말은 매력적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바꿀 수 있다는 말도 들렸다. 서하는 과거 박성준이 수치 압박을 전달하며 했던 말을 떠올렸지만, 지금 사람을 과거 인물과 겹치지는 않았다. 같은 단어가 같은 의도를 뜻하지는 않았다.
그는 제안서를 거절하지 않고 빈 종이를 한 장 꺼냈다. “제가 이 자리를 맡으면 어떤 결정을 혼자 할 수 있고, 어떤 결정은 영업·보상 지휘선과 분리됩니까?”
부서장은 직급표를 가리켰다. 최종 권한은 본부장에게 있었다. 품질 책임자가 문제를 발견해도 출고를 멈추려면 원부서장 동의가 필요했다. 서하는 그 구조라면 독립 재검토가 아니라 조언 기능에 가깝다고 말했다.
“승진을 조건으로 권한을 요구하는 겁니까?”
“제 승진과 상관없이 필요한 조건을 묻는 겁니다. 제가 안 가도 이 직무는 누군가 맡을 테니까요.” 서하는 침수 사건 결재 중단 기록을 내밀었다. 원부서 동의를 기다렸다면 약속한 출고 시각 뒤에야 멈췄을 가능성이 있었다.
같은 날 재검토 파트 책임자 논의도 열렸다. 도윤의 지역 총괄 이동은 확정됐다. 인사팀은 자연스럽게 서하의 이름을 후임 후보 첫 줄에 올렸다. 팀 안에서는 축하 분위기가 먼저 생겼다.
서하는 회의에서 자기 이름을 지우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 공개된 지원·추천 기준과 임기, 원결정 지휘선과의 분리, 이용자·직원 의견을 포함한 평가를 요청했다. 막내였던 사람이 바로 종신 팀장이 되는 이야기는 보기 좋을지 몰라도, 다음 사람에게 같은 문을 닫을 수 있었다.
수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배가 맡는 게 제일 빠르긴 하잖아요.”
“빠른 것과 맞는 건 다를 수 있어요. 나도 후보가 될 수는 있어요. 다만 도윤 팀장님이 나를 키웠다는 이유로 자동 후임이 되면, 우리가 없애려는 방식하고 비슷해져요.”
도윤은 추천서를 써 주겠다고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서하가 실제로 맡은 사건, 중단 결정, 설명 기록, 실패한 일정까지 인사 자료로 제공했다. 칭찬 문구보다 확인할 수 있는 행동이 많았다.
기획부서장은 사흘 뒤 수정안을 보냈다. 품질 책임자에게 자료 보존과 제한적 출고 중단 요청권을 주고, 원부서와 이견이 있으면 독립 위원에게 자동 회부하는 구조였다. 판매·처리 속도와 고객 설명·정정 지표도 서로 상쇄하지 않게 나뉘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그대로였다. 직무의 성공을 `민원 감소`로 평가했다. 서하는 민원이 줄어드는 것이 좋은지, 말할 창구가 닫혀 줄어든 것인지 구분할 지표가 필요하다고 다시 적었다. 이의 접수 접근성과 해결 뒤 재발률을 함께 보자고 제안했다.
협상은 길어졌다. 주변에서는 좋은 자리를 왜 어렵게 만드느냐는 말이 나왔다. 윤태훈도 딸의 승진 소식을 먼저 듣고 무조건 가라고 했다. 서하는 아버지에게 조건표를 설명하지 않았다. 자신의 직업 선택을 가족의 자랑이나 불안으로 대신 정하지 않기로 했다.
주말 동안 서하는 승진 제안서와 공개 공모문을 같은 크기로 출력해 식탁 양쪽에 놓았다. 한쪽에는 높은 직급과 넓은 제도 범위가 있었고, 다른 쪽에는 임기와 질문받을 의무가 있었다. 어느 문서도 완벽하지 않았다. 그는 얻는 것만이 아니라 책임지지 못하게 될 일을 각각 적었다.
기획부서로 가면 여러 현장의 양식을 고칠 수 있지만 개별 출고를 직접 멈출 권한은 제한됐다. 재검토 파트에 남으면 사건 가까이에서 결정할 수 있으나 예산과 인원이 매년 흔들릴 수 있었다. 서하는 `더 선한 자리`를 찾지 않고, 지금 자신이 증명할 수 있는 책임과 감당할 한계를 비교했다.
공개 공모 심사 기준 초안에는 근속연수 점수가 지나치게 컸다. 서하는 자신에게 유리할 수 있는 항목이었지만 낮춰 달라고 의견을 냈다. 대신 실제 설명 기록, 결정을 수정한 경험, 문제제기자 보호 조치, 실패를 공개하고 고친 사례를 같은 방식으로 확인하자고 했다.
지우는 내부 후보가 심사 자료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권한을 분리했다. 서하는 후보가 된 순간 운영안 최종 편집에서 빠졌다. 수진이 회의록을 맡고 외부 위원에게 모든 후보에게 같은 질문을 보내도록 했다. 좋은 절차를 제안한 사람이 결과까지 관리하면 의심을 남길 수 있었다.
도윤은 사적인 면담을 피하려고 서하와의 인수인계 질문을 팀 공개 회의에서 받았다. 그는 서하가 가장 적합하다고 말하지 않고, 맡았던 사건과 남은 약점을 함께 설명했다. 특히 사람의 말을 오래 듣느라 일정 예측을 놓친 두 사례를 숨기지 않았다. 지지는 결함 없는 인물로 꾸미는 일이 아니었다.
윤태훈은 딸이 높은 직급을 거절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화를 냈다. 서하는 무엇이 옳은지 설득하려 하지 않고, 두 선택의 근무시간과 임기만 설명했다. 아버지는 끝내 이해하지 못했지만 “네가 고르고 나서 밥은 먹으러 와라”고 했다. 동의하지 않아도 관계가 끊어지지 않는 답이었다.
마지막 면담 전날 서하는 기획부서에 수정안이 자신이 가지 않더라도 유지되는지 물었다. 부서장은 일부는 전사 기준 검토로 넘기겠지만 전부를 약속할 수는 없다고 했다. 서하는 감사하다고 답했다. 자리를 거절하는 순간 개선안까지 함께 사라지는 구조라면 애초에 개인을 위한 협상에 가까웠을 것이다.
공모 지원서의 마지막 문항은 `임기 종료 뒤 무엇을 남길 것인가`였다. 서하는 자기 후임 이름을 쓰지 않았다. 원자료 보존권, 출고 중단 근거, 고객의 설명 선택, 직원의 이의 기록, 다음 책임자가 공개 심사를 받는 일정이라고 적었다. 자리를 잘 지키는 것보다 비울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지원서 제출 버튼을 누르기 전 그는 탈락할 때의 업무 계획도 붙였다. 선임된 책임자에게 침수 사건과 중단 기준을 같은 형식으로 넘기고, 자신은 후보 결과에 이의가 있으면 공개된 절차로 제기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선택한 원칙이 자기 당선 때만 작동해서는 안 됐다.
마지막 면담에서 서하는 말했다. “기획부서 승진은 받지 않겠습니다. 지금 안으로는 독립 기능을 책임질 수 없고, 속도 목표를 맞추는 사람이 될 가능성이 더 큽니다.” 목소리는 떨렸지만 후회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재검토 파트 공개 책임자 공모에 지원했다. 임기 2년, 연 1회 독립 평가, 직원과 고객 이의 창구, 문제제기 보호, 후임 인수인계가 붙은 자리였다. 급여는 기획부서 제안보다 낮았고 권한도 영구적이지 않았다.
도윤은 지원서 마지막 칸을 보고 물었다. “결정 이유에 내 이동은 왜 안 썼지?”
“팀장님이 떠나서 맡는 자리가 아니니까요.” 서하는 빈칸을 가리켰다. 추천인 칸이었다. “여기는 공개 심사 자료로 채우겠습니다. 팀장님 이름 하나로 통과하고 싶지 않아요.”
도윤은 서운한 얼굴을 숨기지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서하는 제안서를 접어 보관함에 넣었다. 거절한 승진도 자기 선택의 기록이었다. 더 높은 자리를 포기했다는 미담이 아니라, 어떤 조건에서 책임질지를 고른 문서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