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아홉 시 이십 분, 선우는 박 씨에게 세 번째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갔다. 받지 않았다. 수신함으로 넘어가는 소리가 나자 그냥 끊었다. 문자 두 통은 어제 밤부터 보낸 거였다. 읽음 표시가 뜬 건 새벽 두 시 넘어서였는데, 답장은 없었다. 읽었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무거웠다. 모른 척이 아니라 알면서 침묵한 거였다.
임시 회의실 형광등은 밤새 켜 있었다. 누군가 끄는 걸 잊었거나, 아니면 끄지 않기로 한 거였다. 선우가 들어섰을 때 테이블 위에는 어젯밤 쓰던 마커펜 두 자루와 서명 용지 묶음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캔커피 빈 것도 치우지 않았다. 편의점 냉장고에서 꺼낸 것들이었다. 뚜껑을 따다 만 채 식어버린 것도 하나 있었다. 서미라가 아직 오지 않은 거였다.
마틴이 먼저 왔다. 오토바이 점퍼 차림 그대로, 헬멧을 옆 의자에 올려놓고 앉았다. 의자가 삐걱거렸다. 마틴은 신경 쓰지 않았다.
"할머니한테 오전에 다시 가보려고요. 미라 씨 같이 가겠다고 했거든요."
선우는 테이블 끝에 기대 섰다. 서명 용지를 들어봤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박인숙 이름을 어떻게 아냐고 물어볼 거야?"
"그냥 물어봐야죠. 어떻게 아냐고. 할머니가 피하면 피하는 대로, 말하면 말하는 대로."
마틴이 헬멧 턱끈을 손가락으로 감았다 풀었다 했다. 대답처럼 들리면서 대답이 아닌 말투였다. 선우는 그 점이 이 사람의 장점이기도 하고 한계이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어떻게든 연결하려는 사람. 그러나 연결이 뭘 끊을지는 생각하지 않는.
서미라가 들어온 건 아홉 시 사십 분이었다. 손에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 김밥 세 줄이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면서 선우를 한 번 봤다. 선우의 표정을 읽은 건지 아닌지 모르게 덧붙였다.
"먹어야 움직이지. 박 씨 연락 아직이야?"
"응."
짧게 대답했다. 서미라는 김밥 하나를 집어 들더니 앉지도 않고 섰다. 씹으면서 잠깐 천장을 봤다가 내려다봤다.
"오늘 오후 두 시까지 기다려. 그 안에 연결 안 되면 박 씨 없이 접수해. 그 사람 사정은 알지만 우리가 거기서 멈출 수는 없어."
선우는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미라가 하는 말이 맞다는 걸 알았다. 그러면서도 박 씨가 어젯밤 읽음 표시를 눌렀다는 사실이 계속 걸렸다. 읽었는데 답을 안 한 거였다. 겁이 나서인지, 아니면 건물주 쪽에서 이미 뭔가 이야기가 있었는지. 계약 기간이 두 달 남은 사람한테 건물주가 어떤 말을 했을지는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됐다.
장하늘은 열 시가 되어서야 나타났다. 노트북을 겨드랑이에 끼고, 이어폰을 한쪽만 꽂은 채였다. 들어서자마자 마커펜 하나를 집어서 뚜껑을 딸깍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습관인 것 같았다. 뭔가를 쓰려다 멈추는 사람의 습관.
"나 오늘 오후 세 시 기사 마감이에요. 익명 동의서 열한 장이랑 증언 내용, 그거 충분해요. 지금 이 시점에 안 나가면 다음 주엔 박도경 측이 먼저 프레임 잡아요."
서미라가 김밥을 씹다 멈췄다.
"우리랑 합의한다고 했잖아."
"합의한다고 했지, 무조건 기다린다고는 안 했어요."
장하늘의 목소리는 빠르지 않았다. 오히려 천천히 말하는 편이었다. 그게 더 불편했다. 선우는 노트북 화면을 보지 않으려고 했다. 화면에 뭐가 열려 있는지 알면 더 복잡해질 것 같았다.
"하늘 씨."
선우가 불렀다. 장하늘이 돌아봤다.
"박 씨 서명이 없는 상태에서 기사 나가면, 박 씨가 혼자 압박받아. 기사에 이름이 안 나와도 건물주는 누가 말했는지 범위를 좁혀. 그 사람 계약 기간이 두 달 남았어."
장하늘은 잠깐 이어폰을 뽑았다.
"그래서 안 써요? 아니면 더 써요?"
선우가 대답하기 전에 서미라가 끼어들었다.
"오늘 오후 두 시까지는 기다려봐. 박 씨 연락이 오면 같이 정하고, 안 오면 그때 다시 얘기해."
장하늘은 이어폰을 다시 꽂지 않았다. 테이블 모서리를 손가락 끝으로 두드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한 동의가 아니라 일단 수용이었다. 선우는 그 차이를 알았다. 두 시 이후에 어떻게 할지는 아직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거였다.
마틴과 서미라가 나간 건 열 시 이십 분이었다. 임시 세입자 할머니가 사는 곳은 골목 안쪽 골목, 재개발 구역 경계에 걸쳐 있는 쪽방 건물이었다. 선우는 따라가지 않았다. 박 씨 전화를 기다려야 했고, 구청 접수 서류를 마지막으로 검토해야 했다. 장하늘도 노트북을 열고 자기 자리에 앉았다. 둘 다 말이 없었다. 형광등이 약간 깜빡이는 소리만 났다.
혼자 남은 것 같은 시간이었다. 선우는 서명 용지를 다시 펼쳤다. 공동행동 참여 동의서 여덟 장, 익명 동의서 열한 장. 박 씨 서명 없이 이 종이들을 구청에 들고 가면 담당자는 뭐라고 할까. 아마 받기는 받을 거였다. 접수 거부할 근거가 없었다. 그러나 체계 안에 빈자리가 있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았다. 서류는 완성처럼 보이겠지만 선우는 그 빈자리가 어디 있는지 알 거였다. 오래.
열한 시 오 분, 마틴에게서 문자가 왔다.
'할머니 집에 있어요. 미라 씨 지금 들어가 있고요. 저 밖에 있을게요.'
선우는 그 문자를 두 번 읽었다. 마틴이 밖에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서미라와 할머니 사이에 자기가 낄 자리가 아니라고 판단한 거였다. 그게 옳은 판단이었다. 마틴이 그걸 알았다는 사실이 선우는 조금 놀라웠다. 연결하려는 사람이 물러서는 법도 알고 있었다.
열한 시 삼십 분이 막 넘어갈 때 서미라에게서 전화가 왔다. 선우는 받자마자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서미라 쪽에서 먼저 말했다.
"나왔어."
숨이 약간 차 있었다. 골목 안쪽 골목이라 계단이 있었을 거였다.
"할머니가 박인숙 씨 이름을 알고 있었어. 그 현장에서 같이 일했던 사람 아내래. 사고 나기 사흘 전에 마지막으로 봤다고 했어."
선우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장하늘이 노트북에서 눈을 들었다. 전화 소리가 들렸는지 선우 쪽을 봤다가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서미라가 잠깐 멈췄다. 밖에서 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재개발 구역 경계 쪽은 낮에도 공사 차량이 지나다녔다.
"우리 민재 씨가 그 현장에서 하청 받았다고. 그거 알고 있었대. 말 못 한 거지, 몰랐던 게 아니라."
회의실 형광등이 다시 한 번 깜빡였다. 선우는 서명 용지 위에 손을 얹은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미라가 그 말을 꺼냈을 때 목소리가 어떠했는지, 떨렸는지 단단했는지, 전화기 너머로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냥 짧았다. 짧고 완결된 문장이었다. 더 이상 물어볼 것도 없는 것처럼.
"미라 씨, 지금 어디 있어?"
"골목 입구. 마틴이랑 같이 있어. 잠깐 있다 들어갈게."
전화가 끊겼다. 선우는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장하늘이 이번엔 노트북 뚜껑을 반쯤 내렸다.
"들었어요."
"응."
"기사에 이건 안 넣어요. 오늘은."
선우는 장하늘을 봤다. 장하늘이 먼저 말한 거였다. 선우가 부탁하기 전에. 선우는 고맙다고 하지 않았다. 장하늘도 기다리지 않았다. 노트북 뚜껑을 다시 올리고 타이핑을 시작했다.
선우는 오후 두 시를 기다리기로 했다. 박 씨 전화가 올 수도 있었다. 안 올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서미라가 방금 한 말과 공동행동 체계 접수는 별개의 문제였다. 두 개를 같은 시간 안에 처리하려고 하면 둘 다 엉킨다는 걸 알았다. 지금 이 골목이 필요한 건 기준이었다. 누구를 먼저 지킬 것인가, 어디까지 함께할 것인가. 그 기준이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 선우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그리고 받아들이고 나서도 가볍지 않았다. 뿌듯한 것과는 달랐다. 그냥 묵직했다. 그 묵직함을 들고 오후 두 시까지 앉아 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