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오후 한 시 이십 분이었다.
점심을 먹고 돌아온 사무실은 평소보다 조용했다. 형광등 하나가 미세하게 깜빡이고 있었는데,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한재원은 자기 자리에서 뭔가를 열심히 타이핑하고 있었고, 도윤의 자리는 여전히 비어 있었다. 서하는 가방을 내려놓으며 그 빈자리를 한 번 봤다가 시선을 거뒀다. 오전 면담이 끝난 뒤 도윤은 전화를 받고 복도로 나갔고, 그게 벌써 세 시간 전 일이었다.
"밥은 먹었어요?"
한재원이 모니터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서하는 "네" 하고 짧게 답했다. 한재원은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그 모습이 평소보다 조심스러워 보였다. 서하는 일부러 묻지 않았다. 물어봤자 나올 말이 없다는 걸 둘 다 알고 있었다.
서랍을 열었다. 파일이 그대로 있었다. 접수 처리 이력 변경 날짜가 적힌 출력물, 그리고 그 옆에 끼워둔 메모지. 서하는 출력물을 꺼내 다시 펼쳤다. 종이 가장자리가 살짝 눅눅했다. 오전에 손에 땀이 났던 모양이었다. 날짜는 작년 하반기였다. 박 상무가 오전에 뒤집어 두었던 그 출력물에서 서하가 잠깐 스쳐 본 숫자와 같은 날짜. 사흘의 공백이 시작되는 바로 그 시점이었다.
처음으로 선이 하나 그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선이라기보다는, 흩어져 있던 점들이 일렬로 놓이기 시작하는 것에 가까운 감각이었다. 완전히 연결된 건 아니었다. 그러나 방향은 생겼다. 서하는 출력물을 다시 접어 서랍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꺼내 두면 한재원 눈에 띌 수 있었다.
"도윤 씨 언제 온대요?"
서하가 묻자 한재원이 잠깐 멈칫했다.
"모르는데요. 오전에 나갈 때 저한테 말 안 했어요."
대답 자체는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멈칫하는 그 짧은 순간이 거슬렸다. 서하는 더 캐묻지 않고 화면을 켰다. 시스템에 들어가 임시 계정 이력을 다시 열었다. 접근 기록, 날짜, 처리자 코드. 이미 여러 번 본 화면이었지만 이번에는 처리자 코드 옆의 부서 코드를 오래 들여다봤다. 보상팀 코드가 아니었다. 그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코드가 어느 부서인지를 서하는 아직 확인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지금 이 순간에야 뒤늦게 떠올랐다.
코드 조회 화면을 열었다. 손가락이 멈칫했다. 화면에 뜬 부서명은 예상보다 훨씬 짧은 두 글자였다.
기조.
기획조정실이었다.
서하는 화면을 닫지 않은 채 잠깐 그대로 있었다. 에어컨 바람이 서류 한쪽을 살짝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프린터가 예열 소리를 냈다. 사무실 안에서는 한재원의 타이핑 소리만 이어지고 있었다. 서하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화면 속 두 글자를 한 번 더 읽었다. 소리 내지 않고, 입술만 움직였다.
기조.
속으로 삼킨 말은 그것뿐이었다. 더 이상 뭔가를 중얼거릴 수가 없었다.
오후 세 시 사십 분, 도윤이 돌아왔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기척이 있었고, 서하는 고개를 들었다. 도윤은 평소와 다를 게 없는 얼굴이었다. 가방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아 화면을 켰다. 한재원이 "어, 왔어요?" 했고 도윤은 "응" 하고 짧게 받았다. 거기서 끝이었다. 도윤이 자리에 앉으면서 포스트잇 하나가 책상 모서리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도윤은 그걸 줍지 않았다. 서하는 그 포스트잇을 봤다가 시선을 거뒀다.
서하는 잠깐 기다렸다가 일어났다.
"도윤 씨, 잠깐요."
도윤이 고개를 들었다. 서하는 복도 쪽으로 눈짓했다. 도윤은 잠시 뭔가를 재는 것처럼 서하를 봤다가, 조용히 따라 일어섰다. 한재원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떼지 않으려고 일부러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다.
복도는 이 시간대에 사람이 없었다. 창가 쪽 햇빛이 바닥에 길게 누워 있었고, 어딘가 멀리서 엘리베이터 도착음이 울렸다가 사라졌다. 복도 특유의 냄새가 있었다. 오래된 카펫과 복사기 토너가 섞인 냄새. 서하는 그 냄새를 맡으면서 먼저 말을 꺼냈다.
"오전에 박 상무님한테 먼저 꺼낸 말이요."
도윤은 아무것도 부정하지 않았다. 그냥 서하를 봤다.
"임시 계정 건 아니에요. 그건 저도 알아요."
서하가 말을 이었다.
"기조 부서 코드가 처리자 쪽에 찍혀 있는 거, 도윤 씨도 봤죠?"
도윤이 잠깐 숨을 고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짧게 말했다.
"봤어요."
"그게 오전에 꺼낸 말이에요?"
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하는 기다렸다. 복도 에어컨 바람이 없어서 공기가 한 박자 더 무거웠다. 도윤이 팔짱을 끼는 것도 아니고, 뒷짐을 지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로 벽 쪽에 기댔다. 그 자세가 오히려 솔직해 보였다.
"아니요."
도윤이 말했다.
"기조 코드 얘기는 안 했어요. 제가 꺼낸 건, 처리 이력 변경이 보상팀 내부에서 시작된 게 아닐 수 있다는 거였어요. 그것만요."
서하는 그 말을 천천히 소화했다. 보상팀 내부가 아니다. 기조. 임시 계정. 사흘의 공백. 그리고 박 상무가 출력물을 뒤집었던 동작. 하나씩 놓아보면 각각은 별것 아닌 것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복도에서 나란히 세워놓으니 줄이 맞았다.
"박 상무님은 뭐라고 했어요?"
"들었다고만 했어요."
도윤이 담담하게 말했다.
"표정이 없었어요. 그게 더 이상했어요."
서하는 잠깐 말을 잃었다. 들었다고만 했다는 것. 표정이 없었다는 것. 그 두 가지가 지금 서하의 머릿속에서 기조 부서 코드 두 글자와 나란히 놓였다. 연결이 됐다. 그런데 그 연결이 가리키는 방향이 서하가 지금까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위쪽이었다.
보상팀 안의 문제가 아니라면, 이건 처음부터 다른 층의 이야기였다.
"오늘 오후에 전화 받은 거요."
서하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기조 쪽이에요?"
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긍정이었다. 서하는 더 묻지 않았다. 묻는다고 달라질 게 없다는 걸 알았고, 도윤도 그걸 알고 있다는 걸 알았다. 두 사람 사이에 그런 종류의 이해가 생긴 게 언제부터였는지, 서하는 잠깐 생각했다가 그냥 넘겼다.
복도 끝에서 누군가 지나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한 발씩 벽 쪽으로 붙었다가, 소리가 사라지고 나서야 서로를 다시 봤다. 도윤이 먼저 작게 웃었다. 피식, 하는 소리였다.
"우리 지금 되게 드라마 같다."
서하는 웃지 않았다. 웃고 싶었지만 웃으면 긴장이 풀릴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그러게요" 하고 짧게 받았다.
"다음 주에 또 면담 잡힐 것 같아요."
도윤이 먼저 말했다.
"박 상무님이 들었다고 했을 때, 메모를 했거든요. 작게."
서하는 그 말의 무게를 조용히 받았다. 박 상무가 메모를 했다는 것. 그 메모가 어디로 이어질지. 오늘 이 복도에서 서하가 알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였다. 그 이상을 알려고 하면 지금 당장 뭔가를 더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데, 서하는 그 기분을 억눌렀다. 금요일 오후였다. 주말이 있었다. 그리고 다음 주가 있었다.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 서하는 복도 바닥에 누워 있는 햇빛을 밟으며 걸었다. 이번 주 내내 붙들고 있던 질문들이 하나씩 윤곽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윤곽이 생길수록 그 너머가 더 넓어지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문이 열린 게 아니었다. 더 큰 문의 위치가 처음으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문 앞에 서하 혼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도, 오늘 이 복도에서 처음으로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