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진무백의 질문에 바로 답하지 않았다. 손에 든 낱장을 다시 펼쳐 거절함이라는 두 글자를 한 번 내려다본 뒤, 열린 쪽문 너머로 몸을 돌렸다. “그날 자리를 비운 까닭도 안에 남아 있습니다. 내 기억만으로 말하면 또 하나의 빈칸이 되겠지요.”
진무백은 검집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세 사람은 기록고 외벽과 담장 사이의 좁은 공간에 서 있었다. 여자는 이미 그곳에서 선대 장문인의 유묵과 이름 없는 방문자의 첫 반환 요청을 보여 주었다. 서로의 신분은 확인됐고, 다음으로 열어야 할 것은 바깥 쪽문이 아니라 기록고 본채의 빗장이었다.
여자는 녹이 덜 슨 작은 열쇠를 꺼내 쪽문 안쪽 두 번째 빗장에 넣었다. 빗장이 밀리자 기록고 본채로 이어지는 짧은 회랑이 나타났다. 그녀가 먼저 한 걸음 들어간 뒤 멈췄다. “이 문 안에서는 보이는 것과 꺼내는 것을 나눠야 합니다. 기록은 보되 위탁물에는 손대지 마십시오.”
청연도인은 열쇠 모양을 알아본 듯 시선을 낮췄다. 진무백이 물었다. “도사님은 저 열쇠도 알고 있었소?” 청연도인은 부정하지 않았다. “선대 장문인 장례 뒤 봉인 목록을 인계할 때 한 번 봤습니다. 그때 목록을 건넨 사람이 이분이었습니다.”
여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은 말하지 않았다. 당시 청연도인은 장서각 검수로서 닫힌 궤짝 수와 봉인 상태만 확인했고 내용은 보지 않았다고 했다. 두 사람이 오늘 처음 마주한 사이가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해졌지만, 그 인연은 한 차례의 공식 인계였다. 진무백은 추측을 더 붙이지 않았다.
“그런데 왜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굴었습니까.” 진무백이 물었다. 청연도인은 봉인 뒤 기록고 출입자 이름을 밖에서 먼저 말하면 보관인의 위치를 드러낼 수 있었다고 답했다. 여자는 보호를 이유로 타인의 질문을 막은 것은 맞다며, 그것도 기록에 남기겠다고 했다. 둘의 침묵을 의리라는 말로 덮지 않았다.
회랑 끝에는 낮은 탁자와 벽장 하나가 있었다. 여자는 벽장 아래 칸에서 종이 봉투 세 개를 더 꺼냈다. 바깥에서 보여 준 낱장과 크기, 종이 빛, 가장자리의 붉은 실이 같았다. 네 장을 날짜순으로 놓자 하나의 방문 기록 묶음이 됐다.
첫 낱장은 기록고 봉인이 결정된 밤의 것이었다. 이름 없는 방문자가 맡겨 둔 물건을 돌려 달라고 했고 선대 장문인은 거절했다. 방문자 이름 칸은 비어 있었지만 도착 시각과 젖은 외투, 왼쪽 소매의 상처가 보관인의 작은 글씨로 남아 있었다.
둘째 기록은 한 달 뒤였다. 같은 방문자는 위탁물을 전부 돌려줄 수 없다면 안에 든 명부가 훼손되지 않았는지만 확인해 달라고 청했다. 답은 다시 거절이었다. 방문 금지라는 문구가 덧붙었지만, 문을 두드린 사람의 이름은 여전히 적히지 않았다.
셋째 기록에는 청매표국 수레 한 대가 하늘문 아래 역참에 머물렀다는 내용이 있었다. 방문자는 다친 사람을 싣고 있었고, 위탁물 안의 표식이 그 사람들의 본명을 입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선대 장문인은 강호의 균열을 이유로 열람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넷째 기록을 펼칠 때 여자의 손이 잠깐 굳었다. 날짜는 청매표국이 문을 닫기 사흘 전이었다. 방문자는 해가 뜨기 전에 왔고 이전보다 오래 머물지 않았다. 반환 요청 옆에는 ‘다시 오지 못할 수 있음’이라는 말이 작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진무백은 네 날짜를 차례로 읽었다. 모두 같은 사람이 왔다고 단정할 근거를 물었다. 여자는 낱장 아래의 작은 세 점과 찢어진 매화 꽃받침 자국을 가리켰다. 네 번 모두 같은 위치에 있었고, 방문자는 청매표국식으로 점 셋을 남겼다. 기억이 아니라 반복된 표식이 같은 사람을 가리켰다.
“이름을 정말 모르오?” 진무백이 물었다. 여자는 선대 장문인이 이름을 적지 말라고 했으므로 기록상 알 수 없다고 답했다. 얼굴과 목소리를 기억하더라도 지금 그 이름을 자기 짐작으로 채울 수는 없었다. “이 기록이 말하는 범위는 네 번 왔다는 것과 네 번 거절당했다는 것까지입니다.”
청연도인은 마지막 날짜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청매표국 폐문 사흘 전이라는 것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무당 역참 장부에도 그날 표국 말 한 필이 들어왔습니다.” 그는 진무백을 보지 않고 말했다. 알고 있던 사실을 늦게 내놓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진무백은 소매 안의 매화 문양 조각을 만졌다. 낱장마다 남은 꽃받침 자국과 자신이 지닌 천 조각이 이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지금 꺼내면 여자의 표정에서 무엇인가 확인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조각 하나로 방문자의 이름과 위탁물 소유권까지 단정하게 만들 위험도 있었다.
그는 손을 소매 밖으로 빼지 않았다. “위탁물이 아직 있습니까.” 이번에는 여자가 머뭇거리지 않았다. “있습니다. 봉인 뒤 한 번도 기록고 밖으로 나가지 않았고, 내가 확인한 마지막 날에도 궤짝은 같은 자리에 있었습니다.”
“열어 본 적은.” 청연도인이 물었다. 여자는 없다고 했다. 선대 장문인이 죽은 뒤 열 권한이 자신에게 넘어왔지만, 반환을 허락할 사람과 받을 사람이 모두 사라졌다고 판단했다. 그 판단이 옳았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보관과 은폐의 경계에서 나는 오래 멈춰 있었습니다.”
진무백은 네 장의 순서를 바꾸지 않은 채 종이 가장자리를 살폈다. 넷째 낱장 오른쪽 아래에는 매우 옅은 기름 자국이 있었다. 그 위에서 매화 향이 났다. 진한 향료 냄새가 아니라 오래 말린 꽃잎이 종이에 닿았다가 남은 향이었다.
여자는 향이 위탁물에서 옮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넷째 방문 때 궤짝을 열지는 않았지만 바깥 봉인끈을 대조하려 낱장을 가까이 댄 적이 있었다. 궤짝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고, 매화 향이 곧 특정 물건을 뜻한다고도 말하지 않았다. 사실과 짐작을 갈라 놓았다.
청연도인은 네 기록을 한 장씩 다시 봉투에 넣지 말고 펼친 상태로 탁자에 두자고 했다. 바깥에서 본 첫 낱장만 떼어 말하면 한 번의 거절로 축소될 수 있었다. 여자는 동의해 방문 횟수와 날짜를 적은 표지를 새로 붙였다. 네 번의 요청과 네 번의 거절이 한눈에 보였다.
진무백은 왜 이제야 묶음을 내놓느냐고 물었다. 여자는 담장에 새겨진 매화 흔적을 확인한 뒤 더 미루면 기록이 사람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침묵을 지키게 된다고 판단했다고 했다. 청연도인에게는 선대 봉인 인계자를 다시 만나야 한다는 짧은 전갈만 보냈다.
청연도인은 그 전갈을 받았음을 인정했다. 진무백에게 곧바로 말하지 않은 까닭은 보관인이 실제로 기록을 가진 사람인지 먼저 확인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진무백은 그 판단이 자신을 위험 밖에 둔 것이 아니라 정보 밖에 둔 선택이었다고 지적했다. 청연도인은 변명하지 않고 그 말도 받아 적겠다고 했다.
세 사람은 네 낱장의 장수와 순서를 함께 확인했다. 여자는 첫 기록의 보관인 표식, 청연도인은 무당 역참 날짜, 진무백은 청매표국 폐문일을 각각 읽었다. 누구 한 사람의 기억만으로 묶음이 완성되지 않게 했다. 이름 없는 방문자의 목적은 위탁 반환이었고, 마지막 요청은 폐문 사흘 전이었다.
여자는 본채 문을 더 열었다. 먼지와 굳은 먹 냄새가 회랑으로 흘러나왔고 그 아래 가는 매화 향이 섞였다. 벽을 따라 선반과 나무 궤짝이 이어졌다. 가장 안쪽 궤짝 하나는 손잡이 주변 먼지만 옅었지만, 최근 열렸다는 뜻은 아니었다. 여자가 봉인 상태를 살피며 닦은 흔적이었다.
진무백은 문턱을 넘다가 반 보 물러섰다. 기록고 안을 눈으로 보는 일과 궤짝에 손대는 일을 구분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소매 안 매화 조각은 아직 차가웠다. 조각을 꺼내지 않아도 네 차례 방문과 위탁물 현존은 기록으로 확인됐다.
청연도인이 뒤따라 들어왔고 여자는 네 장 묶음을 낮은 탁자에 남겨 두었다. 이어 기록고 안쪽 선반 앞으로 걸어가 등을 보였다. 한 손이 선반 가장자리에 얹혔다. 그 손은 다음에 보여 줄 기록의 무게를 가늠하듯 잠시 움직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