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아홉 시 이십 분, 이겸은 탕비실 전자레인지 앞에 서 있었다. 어젯밤 누군가 돌려놓은 타이머가 그대로였는지 '18:00'이 화면에 고정된 채 꺼져 있었다. 이겸은 종이컵에 인스턴트 커피를 털어 넣고 정수기 온수를 채웠다. 찬물 쪽 버튼을 눌렀다가 다시 온수로 고쳤다. 손이 먼저 움직인 것이었다. 복도 쪽에서 프린터 예열음이 두 번 들렸다.
해진이 탕비실 문을 열고 들어온 건 그 직후였다. 빈 물병을 들고 있었다. 이겸을 보더니 잠깐 멈췄다가 냉장고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왔어요?"
"어."
짧은 대화였다. 해진은 냉장고에서 새 물병을 꺼내면서 이겸의 종이컵 쪽을 한 번 봤다. 커피가 반쯤 녹아 표면에 기름막이 떠 있었다. 이겸은 저을 생각이 없는 듯 그냥 들고 나갔다. 해진은 냉장고 문을 닫으면서 그 뒷모습을 잠깐 바라봤다. 뭔가를 말하려다 멈춘 것 같기도 했고, 그냥 닫은 것 같기도 했다. 냉장고 압축기가 낮게 윙거렸다.
회의실에는 가온이 먼저 와 있었다. 노트북 두 대가 나란히 열려 있었고, 화면 하나에는 전날 밤 이어 놓은 TCS-B 법인 구조도가, 다른 화면에는 태성캐피탈 결재 로그 발췌본이 펼쳐져 있었다. 가온은 이겸이 들어오자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세 번째 건, 좀 이상해요."
"어느 쪽으로?"
"앞의 두 건은 수취 형식이 법인 코드로 시작하는데요."
가온이 화면 하나를 돌려서 이겸 쪽으로 밀었다.
"이건 아니에요. 계좌 앞 네 자리가 달라요. 형식이 개인 수취 구조예요."
이겸은 화면을 내려다봤다. 숫자는 알고 있었다. 형식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아는 방식이 문제였다. 지금 이 방에서 이겸이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하면 안 되는 것 사이의 경계는 아주 얇았다. 이겸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은행 코드 확인 됐어?"
"그게—"
가온이 머리를 긁었다.
"공개 조회로는 안 나와요. 다온 씨 쪽에서 등기 외 경로로 확인해야 할 것 같은데."
이겸이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휴대폰이 진동했다. 화면을 뒤집으면 발신자가 보였다. 서다온이었다. 이겸은 종이컵을 내려놓고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복도는 조용했다. 엘리베이터 쪽에서 서류를 안고 지나가는 사람이 하나 있었고, 이겸은 그 반대 방향 비상구 쪽으로 몇 걸음 옮겼다. 철문 손잡이 근처에 서자 복도 환기구에서 찬 공기가 내려왔다. 금속 냄새가 섞여 있었다.
"결과 나왔어요?"
서다온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TCS-B 실제 운용사 나왔습니다. 등기에는 없어요. 법인 뒤에 개인 명의 차명 구조 하나가 끼어 있는데."
잠깐 멈췄다.
"이름 들으면 알 것 같은 이름이에요."
이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최덕선."
그 이름이 공기 속으로 풀렸다. 이겸의 어깨 쪽 근육이 아주 잠깐 단단해졌다가 풀렸다. 전생에서 이 이름은 장승민 전무 직계 아래 세 번째 자리였다. 태성지주 전략실 수석 자문역. 공식 직함은 없었지만 결재 도장이 어디에 찍히는지를 결정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이름이 처음 수면 위로 올라왔을 때, 이겸은 석 달 뒤에 죽었다.
"확인 경로는요?"
"비공식입니다. 문서로 남기려면 한 단계 더 필요해요. 오늘 오후 안에 금감원 공시 비교 자료 하나 더 뽑을 수 있어요. 그게 나오면 연결 고리가 됩니다."
"기다릴게요."
전화를 끊고 이겸은 그 자리에 잠깐 서 있었다. 비상구 철문 손잡이에 손이 닿아 있었다. 금속이 차가웠다. 최덕선. 이번에는 석 달이 없었다. 이겸은 손잡이에서 손을 떼고 복도를 걸어 돌아갔다.
회의실로 돌아왔을 때 해진이 가온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가온의 화면을 같이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숫자를 짚는 모습이 이겸 눈에 들어왔다. 가온이 뭔가를 설명하고 해진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겸이 들어오자 해진이 고개를 들었다.
"다온 씨요?"
"응."
"결과 나왔어요?"
이겸은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면서 종이컵을 집었다. 커피는 완전히 식어 있었다.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놨다. 쓴맛이 혀 뒤쪽에 남았다.
"오후에 추가 자료 온다고 했어. 그때 같이 보자."
해진은 잠깐 이겸을 봤다. 정확히 몇 초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시선이 평소보다 조금 길었다. 이겸은 모니터를 켰다.
"그 전에 수취 계좌 은행 코드 확인 방법 알아봐. 공개 조회 안 되면 금감원 민원 채널로 접수 가능한지 확인해 주고."
"네."
해진이 노트북을 열었다. 가온은 자기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회의실은 다시 키보드 소리와 환기팬 소음만 남았다. 이겸은 결재 로그 발췌본을 펼쳤다. 세 번째 결재 건 옆에 손으로 쓴 메모가 있었다. 어제 이겸이 직접 적어 놓은 것이었다—'수취 확인 미완'. 이겸은 그 글씨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가 뗐다.
점심 이후였다. 가온이 자리를 비운 사이 해진이 프린터에서 뽑아 온 종이를 테이블 위에 놓으면서 이겸에게 말했다.
"은행 코드 확인했어요. 민원 채널로는 계좌 명의 확인이 안 된대요. 검찰 또는 금감원 공식 조회 권한 있어야 한다고."
"알아."
해진이 종이를 내려놓으면서 손을 떼지 않았다. 이겸이 그걸 눈치챘을 때 해진이 말했다.
"부장님, 이미 알고 계신 거 있죠?"
회의실 환기팬이 윙 하고 돌아갔다.
이겸은 해진을 봤다. 해진의 눈이 똑바로 이겸을 향해 있었다. 빠르거나 흥분한 눈빛이 아니었다. 천천히, 정확하게, 대답을 기다리는 눈빛이었다. 이겸은 그 눈빛을 정면으로 받았다. 피하지 않았다. 그러나 먼저 입을 열지도 않았다.
"공식 확인 전에는 말 못 해."
"공식 확인이 없어서 모르시는 건 아니잖아요."
이겸은 대답하지 않았다. 해진도 더 밀지 않았다. 그 침묵이 회의실 안에서 한동안 머물렀다. 해진은 종이에서 손을 떼고 자리로 돌아갔다. 이겸은 결재 로그 발췌본을 한 장 넘겼다. 종이가 바스락거렸다. 소리가 너무 컸다. 해진은 노트북 화면을 열었지만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잠깐 멈춰 있었다. 이겸은 그걸 보지 않은 척했다.
오후 네 시 삼십 분, 서다온의 문자가 왔다.
'자료 전송했어요. 확인하세요.'
이겸은 메일을 열었다. 금감원 공시 비교 자료와 TCS-B 법인 등기 외 운용 내역 발췌본이 첨부되어 있었다. 이겸은 파일을 열어서 두 번째 페이지로 넘겼다. 수취 계좌 관련 대목에 서다온이 형광펜으로 표시한 부분이 있었다. 차명 구조의 실제 명의인 란에 이름이 들어 있었다. 최덕선.
이겸은 그 이름 위에 커서를 올려놓은 채 잠깐 있었다. 창밖은 아직 밝았다. 해가 지려면 두 시간은 더 있었다. 회의실 저쪽에서 해진이 마우스를 클릭하는 소리가 들렸다. 가온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이겸은 파일을 닫지 않고 인쇄 명령을 내렸다. 복도 프린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겸은 일어섰다. 해진이 그 움직임을 눈으로 따라갔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겸은 그걸 등으로 느끼면서 회의실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