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점호가 끝나자마자 이안이 카일을 불렀다. 천막이 아니었다. 성벽 안쪽 좁은 회랑, 돌바닥에 이끼가 낀 그 구석이었다. 이른 시간인데도 이안의 군복은 이미 단정했다. 주름 하나 없이 여며진 깃이 오히려 카일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안은 양피지 한 묶음을 내밀었고 카일은 그것을 받아 들었다. 잉크와 먼지가 섞인 냄새가 손끝까지 올라왔다.
"오늘부터 네 임무다. 낙인 아이들 막사 점검, 식량 수령 확인, 인원 파악. 매일 저녁 보고서 한 장."
이안의 목소리에는 어떤 색도 없었다. 칭찬도, 격려도, 경계도 아니었다.
"기사가 됐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달라지는 건 네가 책임지는 이름의 숫자뿐이야."
카일은 양피지를 말아 쥐었다.
"알겠습니다."
이안이 돌아서려다 멈췄다. 한 박자 짧은 침묵이었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걸어갔다. 카일은 그 등을 보면서 달라지는 건 없다는 말이 격려인지 경고인지를 혼자 따져봤다. 끝내 판단이 서지 않았다. 양피지를 쥔 손에 땀이 조금 배었다.
막사로 가는 길에 무기고 앞을 지나쳤다. 갑옷 수선을 맡은 병사 둘이 쇠고리를 연결하며 작업 중이었는데, 쇠사슬이 돌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좁은 통로를 채웠다. 카일은 그 소리를 들으면서 어제 서약식을 떠올렸다. 서약할 때 손에 얹었던 검의 무게. 칼날 위에 손바닥을 올리는 순간 느꼈던 차가운 쇳기. 그 무게가 지금 이 양피지 묶음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이안은 말하지 않아도 이미 보여주고 있었다. 카일은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막사는 성벽 동쪽 귀퉁이였다. 원래 마구간 창고로 쓰던 자리였는지 벽 아래쪽에 짚 냄새가 배어 있었다. 젖은 짚과 오래된 목재가 섞인 냄새였다. 문을 열자 아이들이 제각각의 자세로 앉아 있었다. 무릎을 껴안은 아이, 벽에 등을 붙이고 눈을 감은 아이, 바닥의 돌 틈을 손가락으로 긁적이는 아이. 열다섯 명이었다. 관문에서 이름을 받아 적을 때와 거의 같은 얼굴들이었다. 카일이 들어서자 몇몇이 고개를 들었지만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다.
카일은 문가에 서서 인원을 셌다. 열넷. 한 명이 모자랐다. 그는 막사 안으로 들어가 구석을 확인했다. 가장 어두운 쪽 벽, 담요를 머리까지 뒤집어쓴 형체가 있었다. 카일이 가까이 다가가자 담요 끝이 살짝 들렸다. 눈이 보였다. 까만 눈이었다. 겁먹은 것도 아니었고, 반가운 것도 아니었다. 그냥 보고 있었다.
"이름이 뭐야."
카일이 물었다. 대답이 없었다.
"오늘 점심은 언제 받았어?"
역시 대답이 없었다. 카일은 쪼그려 앉았다. 담요 안쪽에서 숨소리만 들렸다. 가늘고 고른 숨이었다. 겁에 질린 숨이 아니었다. 익숙한 숨이었다. "밥은 먹었냐고." 세 번째 물었다. 이번엔 담요가 아주 조금 내려갔다. 아이의 턱이 보였다. 그리고 고개가 천천히 좌우로 흔들렸다.
카일은 일어나서 막사 입구 쪽에 있던 연장 아이에게 물었다.
"저 아이 오늘 점심 수령 때 없었어?"
연장 아이가 어깨를 으쓱했다.
"원래 안 나와요. 사흘째예요."
카일은 잠시 멈췄다. "사흘." 되뇌었다. 아이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은 알아?" "몰라요. 말을 안 하니까." 카일은 양피지에 뭔가를 적었다. 식량 수령 누락 인원, 한 명. 이름 미확인. 그 자리에서 처리할 방법이 없었다. 오늘은 일단 기록만 했다.
막사를 나오면서 카일은 문틀을 한 번 짚었다. 나무가 썩어 있었다. 손가락으로 누르자 조금 들어갔다. 보수 필요 구역 하나. 양피지에 적었다. 습기가 들어오는 벽 틈, 바닥 한쪽이 내려앉은 자리도 확인했다. 세 곳이었다. 기사 임무가 이런 것이라고는 서약 전날까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썩은 문틀과 식량 미수령 아이. 그러나 이것이 오늘의 임무였다.
훈련장을 지나는 길에 레오가 보였다. 혼자였다. 성벽 그늘 아래에서 목검을 손에 들고 서 있었는데, 자세가 이상했다. 공격을 준비하는 것도 아니고, 쉬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자세였다. 목검 끝이 땅을 향해 조금 기울어져 있었다. 훈련장 흙먼지가 바람에 낮게 일었다. 카일이 가까워지자 레오가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일 초쯤 됐을까. 레오가 먼저 시선을 끊고 목검을 어깨에 메고는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발소리가 빠르지 않았다. 도망치는 걸음이 아니었다. 그냥 가는 걸음이었다. 그게 더 무거웠다.
카일은 그 뒷모습을 보면서 발길을 잠깐 멈췄다. 말을 걸려다 말았다. 레오가 돌아볼 것 같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부를 말을 찾지 못해서였다. 그라스라는 이름이 아직 둘 사이에 놓여 있었다. 그 이름을 건드리지 않고 나눌 수 있는 말이 카일에게는 아직 없었다. 훈련장 흙이 신발 밑창에 묻었다. 카일은 그것을 털지 않고 그냥 걸었다.
저녁이 되기 전에 막사를 한 번 더 돌았다. 구석 아이가 담요를 내리고 앉아 있었다. 식판이 앞에 있었다. 누군가 가져다준 것이었다. 연장 아이가 시선을 피했다. 카일은 누가 가져다줬는지 묻지 않았다. 먹고 있으면 됐다. 그걸로 충분했다. 아이의 손이 숟가락을 쥐고 있었다. 작은 손이었다. 손등에 오래된 흉터가 있었다. 낙인이 아니었다. 낙인은 손목 안쪽에 찍혔다. 이건 손등이었다. 선을 따라 그은 것 같은, 의도 있는 자국이었다. 카일은 그것을 보고 눈을 돌렸다.
막사 벽 쪽을 따라 걸으면서 카일은 틈새를 확인했다. 습기가 들어오는 곳, 짚이 썩어가는 곳, 보수가 필요한 자리를 양피지에 적었다. 그러다 벽 모서리 한 곳에서 손이 멈췄다. 돌 틈에 끼어 있는 헝겊 조각이었다. 작았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 크기였다. 카일은 그것을 뽑아 들었다. 실밥이 끊어진 자리가 오래됐다. 억지로 뜯긴 것이 아니라 닳아서 끊어진 것이었다.
색이 바랬지만 알아볼 수 있었다. 붉은 바탕에 검은 실로 수놓은 문장이었다. 붉은 기수단의 것이었다. 카일은 그것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잠깐 들여다봤다. 이 막사가 마구간 창고였다면, 이 헝겊은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걸까. 관문이 잠기기 전인지, 잠긴 후인지. 아이들이 오기 전인지, 온 후인지. 보고서에 적어야 하나 잠시 망설였다. 결국 적지 않았다. 헝겊 조각을 접어서 자기 주머니에 넣었다. 이안에게 직접 보여주기 전에 먼저 확인해야 할 것들이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아직 몰랐다. 그러나 이 조각 하나가 가벼운 물건이 아니라는 것은, 손가락 끝이 먼저 알았다.
밤이 깊어지자 성벽 위로 바람이 돌았다. 카일은 막사 문 앞에 잠깐 서서 아이들이 잠드는 소리를 들었다. 조용한 것도 아니었고, 시끄러운 것도 아니었다. 뒤척이는 소리,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 기침 소리. 살아 있는 소리들이었다. 어제 서약한 이름들이 내는 소리였다. 카일은 그 자리에서 하루를 셌다. 임무 첫날이었다. 막사 점검 완료, 식량 수령 누락 한 명, 보수 필요 구역 세 곳. 그리고 주머니 안의 헝겊 조각 하나. 보고서에 올라간 것과 올라가지 않은 것이 이미 나뉘었다. 기사가 됐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고 이안은 말했다. 그 말의 무게가 지금 이 순간에야 조금씩 실체를 갖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