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오전 열한 시, 세탁소 기계가 두 번째 사이클을 돌리고 있을 때 낯선 남자가 들어왔다. 드럼이 돌아가는 소리가 바닥까지 진동을 전하는 시간대였다. 민주는 행거 정리를 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오십 대 초반쯤 돼 보였다. 점퍼 안에 흰 셔츠를 받쳐 입었고, 손에는 서류 봉투를 들고 있었다. 얇고 반투명한 봉투라 안에 종이가 여러 장 있다는 게 보였다. 남자는 문 앞에서 잠깐 멈추더니 세탁소 안을 한 번 훑었다. 뭔가를 확인하는 눈이었다.
"강민주 씨 되세요?"
민주는 행거에서 손을 뗐다.
"네."
"저 건물 관리 대행 쪽에서 나왔습니다. 좀 얘기 드릴 게 있어서요."
남자는 서류 봉투를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손이 천천히 봉투를 누르듯 짚었다. 압력을 거는 방식이 일상적이고 매끈해서, 딱히 무례하지 않은데도 불쾌했다. 세탁기 열기가 카운터 쪽까지 밀려오고 있었다. 민주는 그 손을 잠깐 봤다가 남자의 얼굴을 봤다.
"계약 조건 재검토 건입니다. 임대 갱신이 내년 3월이긴 한데, 건물 상황이 좀 달라져서 미리 협의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해서요."
민주는 봉투를 열지 않았다.
"어떻게 달라졌는데요."
"보수 공사 비용이 예상보다 커졌어요. 임대료 조정이 불가피한 상황입니다."
남자는 말하면서 봉투를 슬쩍 앞으로 밀었다.
"안에 자세한 내용 있으니까 한번 읽어 보시고요."
민주는 봉투를 받지 않았다.
"공사가 어디 들어가는 건데요. 빈 점포 쪽이요?"
남자가 잠깐 멈췄다.
"전반적인 노후화 대응 차원입니다."
"그 빈 점포 셔터 반쯤 열려 있던 거 보셨어요? 안에 전선 상태가 좀 특이하던데. 그쪽 보수는 포함돼 있는 거죠?"
민주의 목소리는 평평했다. 높이지도 낮추지도 않은 채 그냥 물었다. 남자의 표정이 아주 잠깐, 한 박자 느려졌다. 눈이 카운터 아래로 내려갔다가 올라왔다.
"그건 담당 부서에서 확인하고 있습니다."
"알겠어요. 서류는 두고 가세요. 변호사 통해서 검토하겠습니다."
민주는 봉투를 카운터 안쪽으로 밀어 놓았다. 남자는 뭔가 더 말하려는 것 같았지만 아무것도 안 했다. 서류 봉투를 한 번 더 힐끔 보다가 돌아서서 나갔다. 문이 닫히면서 골목 쪽 눅눅한 공기가 잠깐 들어왔다가 빠져나갔다.
문이 완전히 닫히자마자 준수가 뒷방에서 나왔다. 수업이 없는 날이라 오전부터 집에 있었는데, 언제부터 들었는지 문 옆에 서 있었다. 슬리퍼를 신은 채였고, 머리는 아직 덜 빗은 상태였다.
"변호사 있어요?"
민주는 봉투를 들고 겉면을 톡톡 두드렸다.
"없어."
준수가 눈썹을 올렸다.
"그럼 그냥 부른 거예요?"
"검토는 해야 하니까. 변호사 비용은 나중에 생각하고."
민주는 봉투를 카운터 서랍에 넣었다. 서랍이 뻑뻑해서 한 번 더 밀어야 했다.
"일단 내용부터 봐야지."
준수가 잠깐 보다가 말했다.
"박명자 할머니한테 말해요. 그쪽은 계약이 더 오래됐잖아요."
민주는 아들을 봤다. 요 며칠 사이에 얼굴이 좀 돌아왔다. 눈 밑 그늘이 아직 있었지만, 목요일 새벽처럼 창백하진 않았다. 민주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점심 전에 민주는 박명자한테 먼저 갔다. 박명자는 문방구 카운터에서 자리를 잡고 새 볼펜 박스를 뜯고 있었다. 형광등 하나가 깜빡이고 있었고, 진열대 쪽에서 먼지 냄새가 났다. 민주가 들어서자마자 박명자가 눈을 들었다.
"왔어요? 나도 아까 뭔가 이상한 사람이 지나가는 거 봤는데."
박명자가 볼펜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점퍼 입은 남자, 우리 쪽은 안 왔어요?"
"우리 왔었어요. 계약 조건 재검토 얘기 들고."
민주는 카운터 앞에 서서 말했다.
"임대료 올리겠다는 거예요. 보수 공사 이유로."
박명자가 코웃음을 쳤다.
"보수 공사. 어떤 보수 공사요. 빈 점포에 사람 들어오는 거 막으려고 빌미 잡는 거지."
그러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우리도 비슷한 내용으로 작년에 한 번 얘기 들었어요. 그땐 그냥 넘어갔는데."
"이번엔 어떻게 할 거예요?"
박명자가 민주를 봤다. 잠깐 생각하는 눈치였다가 말했다.
"같이 가야죠. 각자 따로 받으면 각자 따로 당하는 거니까."
그러면서 볼펜 박스를 옆으로 밀어 놓았다. 이제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듯이.
"강 씨, 그 봉투 내용 다 읽고 나서 나한테 가져와요. 같이 봐요."
민주는 돌아오는 길에 잠깐 빈 점포 앞에 섰다. 셔터가 아까랑 똑같이 반쯤 열려 있었다. 안쪽에서 눅눅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벽 쪽 전선이 눈에 들어왔다. 피복이 벗겨진 부분이 어둠 속에서 희끗하게 보였다. 민주는 그걸 사진으로 찍어 두었다. 손이 조금 떨렸지만 세 장을 찍었다.
오후 두 시에 황 사장한테 전화를 했다. 황 사장은 두 번 만에 받았다.
"나 오늘 갔다 와도 돼요? 잠깐만요."
황 사장이 잠깐 뜸을 들였다.
"뭔 일이에요."
"관리인이 왔었어요. 임대료 얘기 들고. 황 사장님 쪽도 뭔가 오지 않았어요?"
전화 너머에서 잠깐 숨소리가 들렸다.
"오긴 왔지. 나는 그냥 내용 확인한다고 했어요."
"저 오후에 갈게요. 한 가지 더 물어볼 게 있어서."
민주는 말하다가 잠깐 멈췄다. 여기서 말하면 황 사장이 준비를 할 수 있었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그 준비하는 얼굴을 보고 싶었다.
"박재원 씨 얘기요."
전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기계 소리도 없고, 숨소리도 없고, 딱히 끊긴 것도 아닌데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그 순간. 민주는 카운터 위에 팔꿈치를 짚고 그 침묵을 기다렸다. 세탁기 드럼이 세 번 돌아가는 동안 황 사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와요."
황 사장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아까보다 낮아져 있었다.
민주는 전화를 끊고 카운터 서랍을 다시 열었다. 봉투 옆에 방금 찍은 사진을 인쇄해 접어 두었다. 탄 전선 단면, 빈 점포 벽, 그리고 3년 전 합선 사고 날짜가 적힌 종이. 그걸 꺼내서 봉투 안에 같이 넣었다. 오늘 황 사장 앞에 펼쳐놓을 것들이었다. 봉투 입구를 한 번 접어 닫으면서 손이 잠깐 멈췄다. 이걸 꺼내는 순간부터는 되돌릴 수 없었다. 민주는 알고 있었다.
준수가 뒷방에서 머리를 내밀었다.
"밥은요?"
민주가 시계를 봤다. 한 시 십 분이었다.
"라면 끓여."
"제가요?"
"네가 지금 노는 사람 아니야?"
민주는 봉투를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
"면은 두 개. 나 것도."
준수가 뭔가 말하려다가 그냥 들어갔다. 냄비 꺼내는 소리가 들렸다. 물 틀어놓는 소리, 가스 켜는 소리. 잠시 후 냄비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났다. 아직 많이 서툴렀다. 민주는 가방 끈을 고쳐 잡으면서 그 소리를 들었다. 서툰 소리였지만 나쁘지 않았다.
라면 국물이 끓어오르는 냄새가 뒷방에서 흘러나왔다. 민주는 카운터 의자에 앉아서 봉투가 든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라면을 먹고 나서 황 사장한테 가면 된다. 오늘 그 사람의 표정을 보고 나서야 다음을 알 수 있을 것이었다. 두렵기도 했고, 더 이상 미룰 수가 없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제보다는 덜 무거웠다. 봉투 안에 사진이 들어 있어서인지, 박명자가 같이 가야죠, 라고 말해서인지. 민주는 그 이유를 굳이 따지지 않기로 했다. 버텨낼 이유가 생겼을 때는 그냥 잡고 있으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