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세문은 엘리안이 꺼낸 것이 아니었다.
아침 회의가 끝나고 엘리안이 탁자 위 장부를 정리하는 동안, 세라가 접견방 문을 열고 들어왔다. 노크 없이 들어오는 것은 세라의 오래된 버릇이었고, 엘리안은 그것을 이미 세 달 전에 포기한 지적이었다. 세라는 문을 닫고 탁자 앞에 서서 엘리안을 내려다봤다. 장갑을 끼고 있었는데 손가락 끝이 닳아 있었다. 협곡전에서 쓴 것과 같은 장갑이었다.
"서랍 열어요."
엘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세라의 표정은 언제나 그렇듯 읽기 어려웠다. 목소리에 명령조가 섞여 있었지만, 그것이 명령인지 부탁인지는 세라의 말투에서 늘 구분이 안 됐다. 엘리안은 잠시 세라를 봤다가 왼쪽 서랍을 열었다. 맹세문이 안에 있었다. 엘리안의 이름만 적혀 있고, 세라의 자리는 비어 있는 채로 두 달 넘게 그 안에 있던 종이였다.
세라가 장갑을 벗었다. 탁자 위에 던지는 것처럼 내려놨는데, 장갑 안쪽에서 손가락 마디의 굳은살이 보였다. 세라는 맹세문을 집어 읽었다. 읽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짧은 문서였다. 그런데도 세라는 두 번 읽었다.
"펜."
엘리안이 펜을 건넸다. 세라는 문서 아래 자기 이름을 썼다. 세라 헬몬. 필압이 셌다. 잉크가 종이 뒤쪽까지 번질 것 같은 세기였다. 쓰고 나서 세라는 펜을 탁자에 돌려놓고 맹세문을 다시 엘리안 쪽으로 밀었다.
"이유는 아직도 모르겠어요."
엘리안이 맹세문을 받아 들었다. 잉크가 아직 마르지 않아 끝이 번졌다. 엘리안은 그것을 보다가 천천히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세라가 잠시 말이 없었다. 창밖에서 바람 소리가 났다. 안마당 쪽에서 대원 둘이 떠드는 소리가 벽을 통해 희미하게 들어왔다. 세라는 장갑을 다시 집어 끼며 일어섰다.
"계약 기간은 따로 없는 거 맞죠?"
"그렇습니다."
세라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기 직전에 잠깐 멈췄다.
"우리 대원 중에 글 못 읽는 사람 셋 있어요. 나중에 내용 읽어줘야 할 것 같으니까 그때 시간 내요."
그러고는 나갔다. 문이 닫혔다. 엘리안은 맹세문을 다시 들어 봤다. 세라 헬몬. 이름 아래 잉크가 번진 자리가 마치 서명이 두 개인 것처럼 보였다.
하르트가 점심 전에 들어왔다. 맹세문을 보고 눈을 한 번 내려깔았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엘리안은 그것을 서랍 깊숙이 넣는 대신 탁자 위 문서함 안에 올려두었다. 하르트가 장부를 펼치며 입을 열었다.
"회색늑대 잔류 인원 서른두 명 중 스물여덟이 내일 아침까지 성 안에 머무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나머지 넷은 내일 오전에 합류 예정입니다."
"막사 여유는요?"
"동쪽 별채를 내어주면 됩니다. 나무가 조금 상했지만 기둥은 멀쩡합니다."
"지붕은?"
"물이 스밉니다. 판자 교체가 필요합니다."
엘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판자를 구하는 데 드는 비용과 인력을 머릿속으로 계산하는 데 잠깐이 걸렸다. 그 계산이 끝나기 전에 하르트가 다시 말을 이었다.
"루키안 씨가 점심을 건너뛰었습니다. 방에서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엘리안의 손이 장부 위에서 잠시 멈췄다. 루키안의 왼팔, 붕대 안 봉인 문양. 협곡전 이후 마도회 쪽에서 아무 반응이 없다는 것은 두 가지 중 하나였다. 포착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포착했는데 아직 움직이지 않는 것이거나. 어느 쪽이든 지금 당장은 알 방법이 없었다.
"저녁에 내가 직접 가겠습니다."
하르트가 고개를 숙이고 나갔다.
저녁 무렵, 엘리안이 루키안의 방 앞에 섰을 때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문을 두드리자 잠시 후 발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루키안은 실내에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왼팔 붕대는 어제보다 두껍게 다시 감겨 있었다. 얼굴빛이 좋지 않았다.
"들어와요. 별 볼 거 없지만."
방 안은 좁았다. 책 몇 권과 양피지 조각들이 바닥에 펼쳐져 있었고, 탁자 위에는 잉크병이 쓰러진 채로 굳어 있었다. 루키안이 그걸 보고 손으로 치우며 중얼거렸다.
"아까 뒤집었는데 치울 생각을 못 했네요."
"팔은요."
루키안이 잠깐 웃었다. 웃음 안에 뭔가가 숨어 있었다.
"재미있는 질문이에요. 문양이 협곡전 이후로 조금씩 퍼지고 있거든요. 마도회가 포착했는지는 아직 몰라요. 다만."
루키안이 왼팔을 가볍게 들어 보였다.
"내가 먼저 알아채는 것보다 그쪽이 먼저 반응할 수도 있어요. 그 경우엔 조용히 처리하기 어려울 것 같고."
엘리안이 루키안을 봤다. 루키안의 눈은 냉소와 무언가 다른 것이 동시에 있었다. 피로가 아니었다. 더 깊은 것이었다.
"혼자 처리하려 하지 마세요."
루키안이 대답하는 대신 바닥의 양피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
"세라 씨가 이름 올렸다고요?"
"오전에요."
루키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양피지를 내려놓으며 탁자 쪽을 봤다.
"그거 잘됐네요. 나는 명단에 없지만."
"당신은 다른 형태로 묶여 있습니다."
루키안이 또 웃었다. 이번엔 조금 더 진짜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엘리안이 방을 나온 것은 저녁 종이 울린 뒤였다. 복도 끝에서 성벽 쪽으로 나가는 문이 보였다. 엘리안은 잠깐 그 문을 바라봤다가 방향을 돌렸다. 오늘은 성벽에 오르지 않아도 됐다. 두 깃발은 어제도 그 자리에 있었고, 오늘도 있을 것이었다.
안마당으로 나오니 저녁 공기가 차가웠다. 회색늑대 대원 넷이 동쪽 별채 앞에서 판자 상태를 보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엘리안을 보고 거수경례를 했다. 군인 식 경례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있었다.
엘리안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지나쳤다.
그날 밤, 하르트가 서재에 들어오면서 손에 봉투 하나를 들고 있었다. 봉투 겉면에 인장이 찍혀 있었다. 수도에서 온 것이었다. 인장 문양을 확인하는 순간 엘리안의 손가락이 멈췄다. 베도르 공작가의 인장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오래된, 더 중앙에 있는 문양이었다.
"언제 도착했습니까?"
"오늘 저녁 사경에 파발이 왔습니다. 수도에서 이틀 거리입니다."
엘리안은 봉투를 받아 들었다. 무게가 있었다. 종이 한 장이 아니었다. 뜯지 않은 채로 잠시 손안에 두었다가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내일 아침에 열겠습니다."
하르트가 무언가 말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그의 눈이 봉투에서 엘리안으로, 다시 봉투로 갔다. 하르트는 십이 년을 이 성에서 보냈다. 수도 인장의 무게를 모를 리 없었다.
"알겠습니다."
하르트가 나갔다. 엘리안은 봉투 위에 손을 올려두었다가 거뒀다. 촛불이 흔들렸다. 창밖 바람이 성벽을 타고 넘어오는 소리가 났다. 안마당 어딘가에서 회색늑대 대원의 웃음소리가 짧게 들렸다가 사라졌다.
맹세문이 문서함 안에 있었다. 세라 헬몬의 이름이 적혀 있는 그 종이가. 루키안의 봉인 문양이 붕대 아래서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수도 인장이 찍힌 봉투가 탁자 위에 있었다.
이것이 첫 번째 기반이었다. 그리고 기반이 완성되는 순간, 그 위에 올려야 할 것들의 무게가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