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화루에서 내려오는 계단은 삐걱거렸다. 한 칸, 두 칸, 서진해는 발을 내딛을 때마다 그 소리를 들었다. 삼 층은 조용했다. 이 층도 조용했다. 일 층에 내려서자 비로소 사람 냄새가 났다. 술과 기름 볶음과 누군가의 담배 연기가 뒤섞인, 낮 시간 주루의 냄새였다.
담소령은 이미 문 앞에 서 있었다. 서진해보다 먼저 내려온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종이는 품 안으로 들어간 뒤였다. 서진해는 그 손을 한 번 보았다. 손가락 끝이 옷자락 쪽으로 살짝 오므라들어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서 있는 사람의 손이 그렇게 생겼다.
"기다렸어요?"
담소령이 먼저 물었다. 목소리는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서진해는 잠깐 그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눈가에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고, 입술도 굳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오히려 이상했다. 방금 삼 층에서 낯선 남자와 단둘이 앉아 종이를 펼쳤다 접었을 사람의 얼굴치고는 너무 고요했다.
"오래 기다리지는 않았습니다."
서진해도 담담하게 대답했다. 사실이기도 했다. 전갈을 받고 계단을 올라 삼 층에 도착하기까지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다. 그러나 삼 층 문 앞에서 갓 쓴 남자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그 순간은, 짧은 시간 안에 담기기에는 너무 많은 것이 들어 있었다. 그 남자는 서진해를 처음 보는 얼굴이 아니었다. 처음 보는데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의 눈이었다. 그 차이를 서진해는 계단을 내려오는 내내 곱씹었다.
바깥으로 나오자 오후의 햇살이 생각보다 따가웠다. 담소령은 눈을 살짝 찡그렸다가 이내 고쳤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서진해는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담소령이 먼저 말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지금 이 상황에서는 더 많은 것을 얻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골목 안쪽에서 두부 장수가 딱따기를 두드리며 지나갔다. 소리가 골목 벽에 부딪혀 짧게 울렸다가 사라졌다.
골목 하나를 꺾어 들었을 때였다. 담소령이 불쑥 말했다.
"그분이 먼저 자리를 제안했어요. 저는 거절하지 않은 거예요."
"그분이라고 하시면."
"오늘 삼 층에서 만난 분."
서진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은 없었다. 담소령이 일부러 이름을 빼고 말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이름을 모르는 것인지. 그 차이가 지금은 중요했다. 담소령은 걸으면서 앞을 보고 있었다. 서진해 쪽을 보지 않았다. 그것도 하나의 대답이었다.
"그분이 소저를 알더군요."
이번에는 서진해가 먼저 말했다. 담소령의 걸음이 반 박자 늦어졌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서진해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알고 있었어요."
담소령의 목소리는 낮았다. 인정이었다. 그러나 설명은 없었다. 서진해는 한 박자 기다렸다가 다시 물었다.
"저도 알더군요. 제 이름을."
이번에는 담소령의 걸음이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손이 옷자락 쪽으로 다시 한 번 오므라드는 것이 보였다. 담소령은 잠시 후 말했다.
"그건 저도 몰랐어요."
짧은 문장이었다. 거짓말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더 무거웠다.
삭풍객잔에 돌아왔을 때 막금산은 마당 평상에 앉아 있었다. 이번에는 솔잎이 아니었다. 편지 봉투였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두 사람이 들어서는 소리를 듣고도 처음에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서진해가 평상 맞은편에 걸터앉고 나서야 막금산이 천천히 눈을 들었다.
"어디 갔다 왔어?"
막금산의 시선이 서진해에게서 담소령으로 옮겨갔다. 담소령은 마당 안쪽으로 들어가더니 부뚜막 쪽에서 물을 한 바가지 떠왔다. 서진해에게 내밀었다. 받으면서 보니 바가지 안에 담긴 물이 살짝 출렁거렸다. 손이 조금 떨렸던 것이다. 담소령은 그것을 알아챘는지 모르는지, 바가지를 건네고 나서 바로 부뚜막 쪽으로 돌아섰다.
"연화루에 다녀왔습니다."
담소령이 짧게 대답했다.
막금산은 더 묻지 않았다. 그 대신 손 안의 봉투를 가볍게 튕겼다. 탁, 하는 소리가 조용한 마당에 작게 울렸다.
"이거."
막금산이 봉투를 서진해 쪽으로 밀었다.
"문양 말이야. 나 알아."
서진해가 봉투를 집어 들었다. 봉투 아래쪽 귀퉁이에 찍힌 문양은 어제와 달라 보이지 않았다. 오래된 먹으로 찍은 듯 선이 번져 있고, 형태는 꽃인지 잎인지 정확히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막금산이 안다고 했다. 서진해는 봉투를 뒤집어 보았다. 앞면에도 뒷면에도 그 문양 말고는 아무것도 찍혀 있지 않았다.
"어디서 본 거요?"
"고성."
막금산이 처마 끝을 보았다. 그의 목소리에서 어떤 온도가 빠져 있었다. 말하기 싫다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것이 생각보다 힘든 것 같았다. 평상 위로 오후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와 막금산의 손등에 걸쳤다. 그 손은 아무것도 비비고 있지 않았다.
"내가 거기 있었을 때. 약방 하나가 있었는데. 그 약방 봉투에 이 문양이 찍혀 있었어. 그때 약방 주인이 누구였냐면."
막금산이 잠시 멈추었다.
"학영회 이전 얘기야. 네가 태어나기도 전이고."
서진해는 봉투를 손에 든 채 움직이지 않았다. 담소령도 부뚜막 쪽에서 조용히 이쪽을 보고 있었다. 세 사람 사이에 잠깐의 정적이 놓였다. 막금산의 입이 한 번 열렸다가 다시 닫혔다.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그 앞에서 멈춘 것이었다.
"그 약방 주인 이름이 뭐요?"
서진해가 물었다.
막금산이 서진해를 보았다. 잠깐이었지만 그 눈빛에 무언가가 지나갔다. 오래된 것이었다. 오래되어서 먼지가 앉아 있는 것.
"다음에."
막금산이 말했다.
"오늘은 이것만."
서진해는 더 밀어붙이지 않았다. 다음에, 라는 말이 거짓말처럼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막금산이 다음에라고 할 때는 보통 진짜 다음이 있었다. 그것이 언제인지가 문제일 뿐이었다.
저녁 무렵, 담소령이 밥상을 차렸다. 무국과 보리밥이었다. 윤세하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밥상이 넷이 앉기에 딱 맞는 크기였는데 세 사람만 앉으니 한 자리가 이상하게 넓어 보였다. 아무도 그 자리를 언급하지 않았다. 막금산이 국을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간이 없어."
"장이 다 됐어요."
담소령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다 됐으면 사 오면 되잖아."
"오늘 장은 사러 갔다 오면 닫혀요."
"그럼 어제 사 오든가."
"어제는 소저가 불태웠잖아요."
막금산이 입을 다물었다. 서진해는 숟가락을 들다 말고 담소령을 보았다. 담소령은 아무 일도 없다는 얼굴로 보리밥을 떴다. 막금산이 불태운 게 아니라는 것은 서진해도 알았다. 장독에서 뭔가를 꺼내다가 담소령이 엎질렀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담소령이 막금산에게 그 책임을 미루는 것은, 아마도 오늘 연화루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더 이상 아무것도 말하지 않겠다는 선언과 같은 것이었다. 그 방식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서진해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뻔했다. 막금산은 간 빠진 국을 두 숟가락 더 떠먹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도 나름의 항복이었다.
밥상이 끝나고 막금산이 마당으로 나갔다. 담소령이 그릇을 걷으면서 서진해에게 낮게 말했다.
"오늘 만난 그분이 전갈을 보낸 게 아닐 수도 있어요."
서진해가 고개를 들었다.
"삼 층으로 부른 전갈 말이에요. 그분이 직접 보낸 게 맞는지, 저도 아직 확신이 없어요."
담소령의 손이 그릇 위에서 멈추었다. 그 손 위로 촛불이 흔들렸다. 바람이 없는데도 흔들렸다. 서진해는 그 불꽃을 잠깐 보았다가 담소령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그렇다면."
서진해는 말하다가 멈추었다. 담소령이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말하지 않은 것은 같은 것이었다. 누군가가 그 전갈을 보내 서진해를 그 자리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담소령도 갓 쓴 남자도 아닐 수 있었다. 서진해는 봉투를 다시 생각했다. 막금산이 말한 오래된 약방. 학영회 이전의 이름. 접힌 종이 안에 적혀 있을 이름들. 그 이름들이 하나씩 펼쳐질 때마다 이 자리에 없는 누군가가 조금씩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당에서 막금산의 기침 소리가 한 번 들렸다. 밤이 오고 있었다. 담소령은 그릇을 들고 부뚜막 쪽으로 걸어갔다. 서진해는 촛불이 다시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이번에도 바람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