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가 서미라 어머니 가게 앞에 도착했을 때 골목 편의점 냉장고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저녁 여섯 시가 조금 지난 시각이었고, 비가 오지는 않았지만 공기가 눅눅했다. 재개발 구역 특유의 냄새, 오래된 시멘트와 배수구가 섞인 냄새가 골목 아래쪽에서 올라왔다. 선우는 문 앞에서 잠깐 멈췄다. 오전에 마틴한테 보낸 문자가 아직도 읽음 표시만 남아 있었다. 한 번 더 보낼까 하다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구청 서류 보완 기한이 열이틀 남은 사람한테 저녁 회의 참석 여부를 재촉하는 게 맞는 건지, 선우는 그 경계를 아직 몰랐다.
안에는 서미라가 접이식 테이블을 펴 놓고 파란 플라스틱 의자를 다섯 개 끌어다 놓은 상태였다. 종이컵에 보리차를 따르는 중이었다. 선우가 들어서자 서미라가 고개를 들었다.
"마틴은요?"
인사 대신 그 말이 먼저 나왔다. 선우가 "문자 보냈는데요" 하고 말하자 서미라는 더 묻지 않았다. 종이컵을 테이블 위에 하나씩 놓으면서 입을 다물었다. 그 침묵이 대답이었다.
골목 끝 양복점 조 씨가 먼저 왔다. 앞치마를 두른 채였다. 가게 문을 잠그고 오다가 실밥이 손에 묻었는지 손바닥을 바지에 문지르면서 들어왔다. 분식집 박 씨는 조금 늦게 왔다. 냄비 뚜껑을 닫고 왔다고 했다. 국물 냄새가 옷에 배어 있었다. 자리에 앉으면서 박 씨가 말했다.
"오늘 뭐 결정하는 거예요? 저 가스 불 줄여 놓고 왔거든요."
농담처럼 말했지만 눈빛은 농담이 아니었다.
윤태식이 나타난 건 그때였다. 문이 두 번 두드려지고,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열렸다. 철문 경첩이 낡아서 끝에 가면 혼자 멈추지 못하고 벽에 닿는 소리를 냈다. 쾅. 서미라가 돌아봤다. 윤태식은 문틀 안에 서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손에는 A4 봉투가 들려 있었다. 서류 봉투치고는 얇았고, 스테이플러로 모서리를 한 번 찍은 흔적이 있었다.
"저 부른 사람이 없는 것 같은데."
서미라가 먼저 말했다. 태식은 신발을 신은 채 한 발짝 더 들어왔다.
"선우 씨가 자리 알려 줬습니다."
선우는 테이블 모서리에 기대서 있다가 시선이 몰리자 잠깐 눈을 피했다. 서미라가 선우를 봤다. 선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왔어요?"
태식한테 하는 말인지 서미라한테 하는 변명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조 씨가 태식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박 씨는 아무 말 없이 종이컵을 두 손으로 감쌌다.
아무도 종이컵을 태식 앞에 밀어 주지 않았다. 태식이 직접 보리차를 따라 마셨다. 서미라가 그걸 봤지만 말하지 않았다. 태식이 A4 봉투를 테이블 가운데 놓았다.
"공동행동 제안서 초안입니다. 제가 손본 거라서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은 고쳐도 됩니다. 조합이 어떤 방식으로 문서를 읽는지는 내가 알고 있으니까."
서미라가 봉투를 가져갔다. 한 장을 꺼내서 읽었다.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읽는 속도가 빠르지 않았고, 두 번째 장을 넘길 때 숨을 한 번 참았다. 선우가 옆에서 같이 읽었다. 제목은 단순했다.
'공동행동 참여 의향서 및 요구사항 목록'. 아래에는 항목이 여섯 개였다. 철거 일정 공식 통보 요구. 세입자 명부 원본 열람 요구. 개별 협상 중단 및 공개 협의 전환 요구. 이주 대책 수립 이전 현장 착수 금지. 공동 법률 지원단 구성 요청. 마지막 항목은 빈칸이었다. 서명인 란이 아니었다. 요구사항 목록에서 여섯 번째 항목 자체가 처음부터 비어 있었다.
"어떻게 만들었어요, 이걸."
박 씨가 물었다. 물음표가 붙은 말이었지만 경계하는 소리가 섞여 있었다. 태식이 답했다.
"법무사 아는 사람 있습니다. 비슷한 구역 싸웠던 데서 썼던 거 참고해서 만들었어요. 서명 두 개 이상 받으면 구청 민원 창구에 정식 접수 가능한 형식입니다."
박 씨가 다시 물었다. "두 개면 돼요?" 태식이 말했다. "법적으로 최소한은 두 개지만, 숫자가 적으면 무게가 없어요. 많을수록 조합이 무시하기 어렵습니다."
서미라가 서류를 내려놓았다.
"당신이 왜 이 서류를 만들어요. 당신이 누구 편인지 우리가 모르는 것 같아요?"
목소리에 감정이 없었다. 감정이 없는 서미라가 더 무서웠다. 선우는 그걸 알았다. 태식이 답하기 전에 선우가 먼저 말했다.
"이 사람이 조합 현장소장이라는 거 우리 다 알고 있고, 저도 압니다. 근데 지금 이 서류가 틀렸는지 맞는지 먼저 봐야 하지 않아요."
서미라가 선우를 불렀다. "선우 씨." 부른 것만으로 끝냈다. 선우는 입을 다물었다.
방이 잠깐 조용해졌다. 조 씨가 종이컵을 만지작거렸다. 박 씨는 서류를 집어서 다시 읽기 시작했다. 태식은 앉은 채로 등을 의자 뒤에 기댔다. 서두르지 않았다.
"제가 현장소장인 건 맞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현장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저만큼 아는 사람도 없어요. 조합이 다음에 뭘 할 것 같은지도요."
잠깐 멈췄다가 이었다.
"감정으로 싸우면 집니다. 조합은 문서로 움직이거든요. 우리도 문서로 움직여야 해요."
"우리라고 했어요, 지금."
서미라가 다시 물었다. 태식이 잠깐 멈췄다.
"잘못 말했습니다. 여기 사람들이 문서로 움직여야 한다고요."
그 대답이 오히려 정직하게 들렸다. 선우는 그 점이 마음에 걸렸다. 윤태식이 '우리'라고 실수한 게 아니라는 느낌. 그러면서도 곧바로 정정한 것. 어느 쪽이든 선우가 지금 판단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박 씨가 서류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는 서명할게요. 이 글 보니까 우리가 뭘 요구하는 건지 처음으로 글로 보이네요."
목소리가 작았다. 체면을 차리는 말이 아니었다. 박 씨는 펜을 달라고 했다. 서미라가 핸드백에서 꺼내서 건넸다. 조 씨는 서명란 앞에서 펜을 받아 들고 한참 앉아 있었다.
"저는 솔직히 모르겠어요. 이번 달 임대료 내고 나면 통장에 사십이만 원 남아요. 싸우는 데 돈이 드는 건 아닌 거죠?"
시선은 선우한테 향했다. 선우가 대답했다. "지금 단계는 접수 비용 없어요. 민원 창구 제출이니까요." 조 씨가 서명했다. 천천히, 획을 끊지 않고.
두 개가 됐다. 서미라는 마지막으로 펜을 받아서 서명란 아래 자기 이름을 썼다. 서명하면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다 쓰고 나서 봉투에 서류를 다시 넣으면서 태식을 봤다.
"이거 구청 창구에 내일 넣을 거예요. 당신이 만든 서류라는 건 거기 적혀 있지 않으니까, 그 부분은 당신이 알아서 정리하세요."
태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일어서면서 종이컵을 들어 마지막 한 모금을 마셨다. 뒤돌아 나가면서 철문이 또 벽에 닿았다. 이번엔 소리가 조금 작았다.
박 씨와 조 씨가 먼저 자리를 떴다. 박 씨는 나가면서 "가스 불 올려야겠다" 하고 중얼거렸다. 조 씨는 아무 말 없이 앞치마 끈을 고쳐 묶으면서 나갔다. 사람들이 흩어지고 선우와 서미라만 남았다. 서미라가 접이식 테이블을 접으려다 멈췄다. "마틴 왜 안 왔어요?" 물었다. "문자 보냈는데 답 없었어요." 서미라의 목소리가 높아지지 않았다. "열이틀 남은 사람한테 문자 한 번 보내고 끝낸 거예요?" 그게 더 무게가 있었다. 선우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서미라가 테이블을 접었다. 다리가 맞물리는 소리가 났다. "내일 구청 창구 가기 전에 마틴한테 먼저 가요. 서류에 이름이 빠진 사람이 우리 서명 목록에도 빠지면 안 되잖아요."
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창밖에서 편의점 냉장고 소리가 들렸다. 골목은 그 시간에도 그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오면서 선우는 한 가지가 마음에 남았다. 태식이 만든 서류 여섯 번째 항목, 마지막 빈칸. 서명인 란이 아니었다. 다시 꺼내서 보지 않았지만 기억은 남아 있었다. 요구사항 목록에서 여섯 번째 항목은 처음부터 비어 있었다. 누가 채워야 하는 자리인지, 태식이 일부러 남긴 건지는 아직 몰랐다. 그리고 조합이 이 서류를 이미 알고 있다면, 그 빈칸은 함정일 수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