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곡 입구에 도착했을 때 눈은 이미 무릎 높이까지 차 있었다. 엘리안은 말 위에서 내리지 않고 잠시 그 높이를 눈으로 쟀다. 말의 숨이 하얗게 피어올랐고, 안장 아래 가죽이 추위에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가짜 수레 다섯 대가 선두에 섰고, 수레바퀴 자국이 협곡 안쪽으로 천천히 이어졌다. 실제 군량은 어제 밤 동쪽 우회로로 먼저 돌렸다. 협곡 안에 끌고 들어가는 것은 흙과 짚, 그리고 카이런의 계산 위로 던지는 미끼였다.
출발 전 마구간에서 루키안이 말 옆에 서 있던 모습이 아직 눈에 남아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왼손 장갑을 두 번 고쳐 끼었다. 봉인 문양이 있는 쪽이었다. 엘리안이 다가가 낮게 말했다. 쓰지 않아도 됩니다. 루키안은 고개를 끄덕이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저 장갑 끝을 한 번 더 당겼을 뿐이었다. 그 침묵이 지금도 엘리안의 어딘가에 걸려 있었다.
"루키안은 어디 있습니까."
세라가 말 옆으로 다가오며 낮게 물었다. 목소리에 불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도 아니었다. 엘리안은 서쪽 능선 쪽을 짧게 눈짓으로 가리켰다. 능선 위 바위 그늘에 루키안의 검은 외투 자락이 바람에 한 번 펄럭였다가 잠잠해졌다.
"능선에 있습니다. 봉인은 쓰지 않아도 됩니다. 저기 서 있는 것만으로도 카이런 측은 계산이 흔들립니다."
세라는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입술을 한 번 좁혔다가 폈다. 그것이 동의인지 판단 유보인지는 구별하기 어려웠다. 엘리안도 굳이 확인하지 않았다. 세라의 대원들이 수레 뒤편으로 흩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밟는 발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울렸다.
작전은 반각(半刻) 동안은 계획대로 흘렀다. 가짜 수레가 협곡 중반에 들어서자 동쪽 절벽 상단에서 투창 두 개가 날아왔다. 예상보다 빨랐다. 선두 수레가 측면에서 창을 맞고 삐걱거리며 멈췄고, 그 뒤로 회색늑대 대원 셋이 소리를 높이며 후퇴하는 시늉을 했다. 계획에 없는 것은 그 직후였다. 서쪽 능선 중간에서 불빛이 번쩍였다. 투창이 아니었다. 마도구 섬광이었고, 방향이 이쪽이 아니라 동쪽 절벽 상단을 향해 있었다.
"저건 뭡니까."
세라가 이미 말 머리를 틀며 능선 쪽을 보고 있었다. 엘리안은 대답하기 전에 먼저 협곡 안쪽 신호를 확인했다. 회색늑대 대원들은 아직 위치를 유지하고 있었다. 다만 동쪽 절벽에서 두 번째 투창이 날아오는 각도가 처음과 달랐다. 각도가 다르다는 것은 사람이 이동했다는 뜻이었다. 절벽 상단에 예상보다 많은 수가 있거나, 아니면 위치가 사전에 새나갔거나.
엘리안은 속으로 욕을 한 번 삼켰다.
"올라갑니다."
루키안이 능선에서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뛰는 게 아니라 걷고 있었는데, 그 걸음이 이상하게 빠르고 목적이 분명했다. 세라가 먼저 말에서 내렸다. 엘리안도 뒤따랐다. 루키안이 가까워지자 그의 왼손 손등에 옅은 빛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이 보였다. 봉인 문양이었다. 건드린 것이 아니라 경계가 반응한 것이었다. 장갑이 벗겨져 있었다.
"협곡 동쪽 절벽에 열두 명이 있습니다."
루키안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다만 호흡이 조금 짧았다.
"처음 계획은 여섯이었죠. 두 배입니다. 그리고 서쪽 능선 진입로에 세 명이 더 있습니다. 이쪽으로 내려오는 경로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뜻입니다."
세라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검이 아니라 단도였다. 엘리안은 루키안의 왼손을 다시 봤다. 봉인 문양 빛이 아직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바람이 협곡 입구를 타고 들어오면서 눈가루를 흩뿌렸다. 엘리안의 뺨이 따끔하게 얼었다.
"루키안."
"압니다. 쓰지 말라고 했죠."
루키안이 엘리안을 보며 말했다. 비꼬는 말투였지만 이번만큼은 웃음기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상황에서 봉인을 쓰지 않으면 세라 단장의 대원 셋이 협곡 안에서 절벽 위 열두 명을 상대해야 합니다. 숫자를 세는 건 저보다 두 분이 더 잘하시겠지만, 제가 봐도 좋은 숫자는 아닙니다."
협곡 안에서 함성이 들렸다. 카이런 측 습격대가 속임수를 알아채고 압박을 시작한 것이었다. 가짜 수레가 버텨주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엘리안은 루키안의 왼손과 협곡 안쪽과 세라의 얼굴을 차례로 봤다.
세라는 말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입을 열었다.
"얼마나 쓸 수 있습니까."
루키안이 세라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잠깐 놀란 것 같았다. 엘리안에게 물어볼 것이라 예상한 것 같았다.
"절벽 상단 세 지점을 흔드는 것 정도입니다. 죽이는 게 아니라 위치를 무너뜨리는 것. 그 이상은 쓰면 제가 서 있기 힘들어집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세라가 엘리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허락을 구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확인하는 눈빛이었다. 엘리안은 한 박자 늦게 끄덕였다. 그 한 박자가 무엇을 담고 있었는지는 세라도 루키안도 묻지 않았다.
루키안이 돌아섰다. 봉인 문양이 왼손에서 팔목까지 번지면서 빛이 짙어졌다. 소리는 없었다. 눈 위로 바람이 한 번 크게 지나갔다가 협곡 동쪽 절벽 방향에서 둔탁한 무너짐이 두 번 울렸다. 투창이 날아오던 방향에서 사람 목소리가 혼란스럽게 터져 나왔다. 세라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뒤를 향해 짧게 외쳤다.
"들어간다."
회색늑대 대원들이 협곡 안으로 밀어 넣었다. 습격대는 절벽 위 지지선이 무너지자 협곡 안으로 내려오지 못하고 분산됐다. 가짜 수레 작전이 설계했던 것과는 다른 경로로 마무리됐지만, 결과는 비슷하게 이어졌다. 협곡 안이 정리되는 데 반각이 더 걸렸다.
루키안은 그 사이 능선 아래 바위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엘리안이 다가갔을 때 루키안은 눈을 뜨고 있었지만 시선이 허공 어딘가에 고정돼 있었다. 왼손을 오른손으로 감싸 쥔 채로. 입술이 창백했다. 말을 아끼는 것인지,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인지 구별되지 않았다.
"한동안은 쓸 수 없습니다."
루키안이 먼저 말했다.
"압니다."
엘리안이 그 옆에 앉았다. 협곡 안에서 아직 소리가 들렸다. 세라의 목소리도 간간이 섞였다. 엘리안은 무릎 위에 팔을 올리고 협곡 쪽을 바라봤다. 루키안의 호흡이 조금씩 고르게 돌아오는 것이 옆에서 느껴졌다.
"마도회에서 이 사실을 알면 문제가 됩니다."
루키안이 말했다. 정보를 전달하는 것인지 스스로 확인하는 것인지 구분이 어려운 말투였다.
"알겠습니다."
엘리안은 그것만 대답했다. 루키안이 잠시 엘리안을 봤다가 다시 시선을 협곡 쪽으로 돌렸다.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로 바람이 지나갔다.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가늘고 조용한 눈이었다.
협곡이 정리되고 세라가 돌아왔을 때, 그녀는 루키안 옆에 엘리안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잠깐 멈췄다. 루키안의 왼손이 오른손에 감싸여 있는 것도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세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루키안 앞에 무릎을 한쪽 꿇고 그 손을 살폈다. 용병단 단장이 무릎을 꿇는 일은 흔하지 않았다. 세라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을 터였다.
"어디까지 올라왔습니까."
루키안이 대답 대신 왼손 소매를 살짝 걷었다. 문양이 팔꿈치 아래까지 번져 있었다. 피부가 열을 머금은 것처럼 붉었다.
세라가 일어섰다.
"내려가기 전에 붕대를 감아야 합니다. 문양이 보이면 수송로 쪽 사람들이 헛소리를 시작합니다."
루키안이 처음으로 짧게 웃었다. 세라의 말이 걱정인지 지시인지 구별되지 않는 어투였기 때문이었다. 세라는 그 웃음을 보고도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허리춤에서 천 조각을 꺼내 루키안에게 건넸다. 루키안이 받아 들었다.
엘리안은 그 장면을 보면서, 오늘 이 협곡 위에서 계산했던 것들이 전부 맞지는 않았지만 틀리지도 않았다는 것을 천천히 정리했다. 가짜 수레는 계획대로 지나갔다. 루키안의 봉인은 예상보다 일찍 쓰였다. 세라는 묻지 않고 움직였다. 그리고 협곡 동쪽 절벽에 열두 명이 있었다는 사실은, 누군가가 이쪽 경로를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오늘 작전이 끝났다고 해서 그 사람도 함께 끝난 것은 아니었다. 루키안의 왼팔에 감기는 붕대 소리가 조용한 협곡 입구에 작게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