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으로 향하는 첫 야영지의 밤은 불빛보다 어둠이 넓었다. 말뚝에 매단 등불은 바람이 불 때마다 납작하게 눕고, 그때마다 천막과 수레의 그림자가 서로 자리를 바꿨다. 카일은 천막 입구에 앉아 미라가 싸 준 말린 사과 한 조각을 반으로 베어 물었다. 단맛은 금방 사라졌지만 손가락에는 오래 남았다. 돌아오면 빵을 사 달라던 목소리도 함께였다.
잠들지 못한 이유는 추위가 아니었다. 낮에 본 다크스의 밀서가 자꾸 눈앞에 떠올랐다. 붉은 밀랍, 대열 밖에서 그것을 받아 든 손, 그리고 보지 못했다고 말한 레오의 얼굴. 이안에게 보고했지만 돌아온 것은 또다시 북방에 도착하면 말하자는 대답뿐이었다.
옆 천막에서 얕은 기침이 한 번 났다. 레오였다. 잠든 척하는 사람의 기침은 너무 가지런했다.
카일은 바닥의 조약돌 하나를 집어 천막 아랫자락으로 굴렸다.
툭.
잠시 뒤 레오가 얼굴만 내밀었다.
“뭐지?”
카일은 대답 대신 물자 수레 쪽을 보았다. 보초가 방금 지나간 자리에서 그림자 하나가 낮게 움직이고 있었다. 낮 동안 대열 뒤에서 장부를 들고 다니던 교관 보조였다. 이름은 모르지만 얼굴은 기억했다. 남자는 보급 수레의 축 아래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냈다. 붉은 밀랍이 등불 끝에서 잠깐 번쩍였다.
레오의 눈에서 잠기가 사라졌다. 그는 검집을 들어 보였고, 카일은 고개를 저었다. 쇠를 뽑는 소리가 나면 상대는 달아날 것이다. 두 사람은 천막을 사이에 두고 갈라졌다. 레오는 바깥 울타리 쪽으로, 카일은 수레 그림자 안쪽으로 돌았다.
교관 보조는 야영지 끝의 말뚝 앞에서 멈췄다. 울타리 너머에는 짙은 외투를 쓴 기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얼굴은 두건에 가려졌고 한 손만 나와 있었다.
“새벽 교대 전에 넘기라고 했다.”
보조가 밀서를 내밀었다.
카일은 그 목소리를 기억했다. 행군 중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 물자 수를 보고하던 목소리였다. 특별할 것 없는 얼굴이 특별할 것 없는 일을 하듯 배신을 건네고 있었다.
“누가 시켰지?”
카일이 그림자 밖으로 나서며 물었다.
보조의 어깨가 들썩였다. 기수는 놀라지 않았다. 손을 뻗어 밀서를 낚아채려 했지만, 울타리 반대편에서 나타난 레오가 검집으로 그 손목을 쳤다. 밀서가 흙 위에 떨어졌다.
짧은 정적 뒤에 기수가 웃었다.
“역시 그 검을 알아보는군.”
그가 말한 상대가 카일인지 레오인지 알 수 없었다. 기수는 허리춤에서 작은 병을 꺼내 보급 수레의 천막 위로 던졌다. 병이 깨지며 기름 냄새가 확 번졌다. 불씨가 닿자 마른 천이 숨을 들이켜듯 부풀었다.
말들이 울부짖었다. 놀란 회색 말 한 마리가 뒷발로 말뚝을 걷어찼다. 고삐가 풀리지 않은 채 수레 쪽으로 몸을 틀었고, 그 아래에서 야간 물지게를 나르던 어린 심부름꾼이 넘어졌다. 밧줄 고리가 아이의 발목에 감겨 있었다.
기수는 이미 어둠 속으로 말을 돌리고 있었다. 카일이 달리면 따라붙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저자를 잡으면 아버지의 이름도, 몸이 기억하는 검도 물을 수 있을지 몰랐다.
아이의 짧은 비명이 들렸다.
카일은 기수에게서 등을 돌렸다.
검을 뽑은 것은 사람을 베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말이 다시 뛰기 직전, 카일은 밧줄을 한 번에 끊고 아이를 품에 안아 굴렀다. 말발굽이 조금 전 아이의 머리가 있던 흙을 찍었다. 뜨거운 재가 카일의 목덜미에 떨어졌다. 그는 아이를 수레 밑에서 밀어낸 뒤 불붙은 천을 끌어내 발로 짓밟았다.
“물 가져와! 말부터 바깥으로 빼!”
소리에 잠에서 깬 병사들이 뛰쳐나왔다. 수통이 날아오고, 누군가 말고삐를 끊었다. 불은 건초 두 단과 천막 한 폭을 태운 뒤 꺼졌다.
어둠 속의 말발굽 소리는 이미 멀어지고 있었다.
카일이 숨을 몰아쉬며 돌아보자 레오는 교관 보조를 엎드리게 한 채 한쪽 무릎으로 등을 누르고 있었다. 흙바닥의 밀서는 그의 장화 밑에 있었다. 봉인은 깨지지 않았다.
“잡을 수 있었잖아.” 레오가 말했다.
“알아.”
“후회하나?”
카일은 울음을 참느라 입술을 깨문 아이를 보았다. 아이는 아직 자기 발목을 두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아니.”
그 대답은 생각보다 쉽게 나왔다.
밀서는 베른 대위의 천막에서 열렸다. 카일은 그것을 먼저 펼치지 않았다. 베른은 봉인의 모양과 발견 시각을 장부에 적고, 이안과 레오와 카일을 입회인으로 세웠다. 교관 보조의 이름은 모렌이었다. 그 이름도 장부에 적혔다. 누가 잡혔는지조차 모른 채 일이 끝나지 않게 하려는 기록이었다.
베른이 밀랍을 잘라냈다. 종이에는 야영지의 보초 교대 시각과 호송 경로가 적혀 있었다. 마지막 두 줄에서 그의 손이 멈췄다.
‘마구간의 카일은 살려서 붉은 깃발 아래로 보낼 것. 그라스가 직접 검을 확인한다.’
그 아래에는 카일이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출생지와, 반으로 꺾인 칼이 새겨진 문장이 있었다. 출정 전 이안이 말없이 되돌려준 낡은 양피지 조각의 그림과 정확히 맞물리는 반쪽이었다.
이안은 두 문장을 다시 읽었다. 이번에도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지만 침묵으로 끝내지는 않았다.
“다크스가 네 아버지의 가문을 지웠다. 그라스는 그때 다크스 편에서 검을 들었던 자다. 살아 있다면 북방 검은 기수단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
카일은 밀서를 내려다봤다.
“제 아버지 이름은요?”
“에드란 베일.”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그런데 가슴 한가운데 오래 비어 있던 자리에 정확히 떨어졌다. 카일은 그 이름을 따라 말하지 않았다. 지금 입에 올리면 자기 이름이 그 아래로 밀릴 것 같았다.
베른은 모렌을 천막 중앙에 앉혔다. 손은 묶었지만 누구도 때리지 않았다. 이안이 물을 한 컵 놓았고, 베른은 같은 질문을 순서대로 했다. 밀서를 누가 주었는지, 누구에게 넘기기로 했는지, 다른 지시가 있었는지. 모렌은 처음에는 입을 다물었으나 밀서의 봉인과 장부 기록을 확인한 뒤 조금씩 대답했다.
성 밖에서 다크스의 집사가 밀서를 건넸고, 붉은 깃발을 단 기수에게 넘기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라스의 얼굴은 본 적 없다고 했다. 카일을 죽이지 말라는 이유도 몰랐다.
“은빛 머리 여자는?” 카일이 물었다.
모렌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다크스의 사람은 아니었다.”
“어떻게 알지?”
“우리가 그 여자를 감시했으니까.”
모렌은 성벽 아래에서 은빛 머리의 여자를 두 번 보았다고 했다. 한 번은 카일이 훈련받을 때였고, 한 번은 이안이 마구간 앞에 숫돌을 내려놓던 밤이었다. 그 여자는 이안이 돌아선 뒤 숫돌 밑에 쪽지를 밀어 넣었다. 며칠 뒤에는 마구간 지붕에서 카일에게 말을 걸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모렌이 아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이름도, 어느 편인지도 몰랐다.
“그 여자가 쪽지를 썼다는 건 확실한가?”
“직접 넣는 걸 봤다.”
은빛 감시자와 쪽지, 지붕 위의 낯익은 목소리가 처음으로 한 사람의 그림자를 얻었다. 하지만 얼굴도 이름도 여전히 어둠 속이었다.
모렌이 경비병에게 끌려 나간 뒤, 레오는 밀서의 문장을 보고 있었다. 반으로 꺾인 칼의 끝을 손가락으로 짚은 채였다.
“왜 네가 그 기술을 알았지?” 카일이 물었다.
레오는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우리 집 검고에 같은 문장이 찍힌 낡은 교본이 있었다. 아버지는 한 번만 보여 주고 태웠어. 베일가의 검을 만났을 때 살아남는 역수라고 했다.”
“그래서 내 손목 치기를 알아봤군.”
“알아본 게 아니라 겁먹은 거다.” 레오가 이를 드러내지 않은 채 웃었다. “노예라고 내려다보던 놈이, 집에서 없애라고 배운 검을 쓰고 있었으니까.”
카일은 화를 낼 말을 찾다가 멈췄다. 레오가 처음으로 자기 비겁함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교본을 네 집이 왜 갖고 있었지?”
“그건 나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알고 싶지 않았던 거겠지.”
대답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레오의 태도 변화가 호기심이나 변덕만은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해졌다.
베른이 장부를 덮고 작은 서류 한 장을 꺼냈다.
“이제 네 신분 문제를 정리한다.”
서류의 제목은 ‘기사단 수습 종사 등록’이었다. 북방 호송에 자원하고 최종 시험을 통과한 사람은 출신 신분과 관계없이 임무 기간 기사단의 보호를 받는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등록되는 순간 영지의 소유자는 카일을 임의로 불러들이거나 팔거나 벌할 수 없었다. 식량과 치료, 소액의 종사비가 지급되고, 징계는 기사단의 입회와 기록을 거쳐야 했다.
“해방장은 아니다.” 베른이 분명히 말했다. “노예 신분이 오늘 밤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임무가 끝나면 공적과 출생 기록을 놓고 별도 심사를 받아야 한다. 그래도 적어도 이 원정 동안 너는 누구의 물건으로 다뤄지지 않는다.”
카일은 이안을 보았다.
“처음부터 이걸 알고 계셨습니까?”
“알았다.”
“그래서 신분 불문 선발을 연 겁니까?”
“너를 성 밖으로 빼낼 수 있는 합법적인 길이 그것뿐이라고 생각했다.”
이안은 변명하듯 덧붙이지 않았다. 대신 카일의 시선을 그대로 받았다.
“하지만 널 지켜본다는 이유로 훈련장의 모욕과 폭행을 그냥 두었다. 내가 나서면 다크스가 네 존재를 알아챌 거라고 겁냈다. 그건 시험이 아니었다. 내 비겁함이었다.”
카일은 식수통 앞에서 맞았던 턱을 만지지 않았다. 상처는 이미 아물었지만 그날의 침묵은 남아 있었다.
“다시는 그러지 마십시오.”
“그러지 않겠다.”
짧은 대답이었다. 처음으로 이안의 침묵이 약속보다 작아졌다.
베른이 깃펜을 카일 쪽으로 돌렸다.
“강요하지 않는다. 서명하지 않으면 동이 틀 때 호위를 붙여 성으로 돌려보낸다. 서명하면 수습 종사인으로 호송 임무를 계속한다. 어느 쪽이든 오늘 붙잡은 사람과 밀서는 네 공적으로 기록된다.”
카일은 깃펜을 들었다. 글씨를 오래 배운 적은 없었지만 자기 이름은 쓸 줄 알았다. 남의 문장 아래 대신 찍히는 손도장도, 소유를 표시하는 낙인도 아니었다. 그는 천천히 두 글자를 적었다.
카일.
이안이 보증인 칸에, 레오가 입회인 칸에 이름을 썼다. 베른은 서류를 접어 봉인한 뒤 손가락 두 마디만 한 철패를 카일에게 내밀었다. 앞면에는 기사단의 표식이, 뒷면에는 방금 적은 이름과 등록번호가 새겨져 있었다.
철패는 화려하지 않았다. 목에 걸자 차갑고 무거웠다. 손목의 낙인이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쇠가 몸에 닿는 감각은 예전과 달랐다. 이것은 누군가가 잠근 사슬이 아니라, 자신이 읽고 고른 문서의 증표였다.
천막 밖으로 나오자 불이 꺼진 수레 옆에 심부름꾼이 담요를 두르고 앉아 있었다. 카일을 보자 아이가 엉거주춤 일어섰다.
“아까… 고맙습니다.”
카일은 괜찮다는 말 대신 풀린 발목 붕대부터 다시 묶어 주었다. 아이가 잠들 자리까지 확인한 뒤에야 야영지 바깥을 보았다. 달아난 기수가 남긴 발굽 자국은 어둠 속으로 이어졌다. 그 끝에는 그라스가 있고, 다크스가 있고, 이름 모를 은빛 여자가 있었다.
답을 놓친 밤이었다. 그런데 카일은 그것을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레오가 옆에 와 섰다.
“기사라도 된 얼굴이군.”
“수습 종사인이다.”
“긴 이름이네.”
“노예보다는 낫지.”
레오는 잠깐 웃었다. 이번에는 카일도 따라 웃었다.
동쪽 능선 아래가 아주 조금 밝아지고 있었다. 카일은 철패를 손안에 쥐었다가 놓았다. 아버지의 이름은 알게 되었고, 적의 이름도 하나 얻었다. 하지만 그가 새벽에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자기 이름이 적힌 쇳조각과 무사히 숨 쉬는 아이였다.
그날 카일은 정식 기사가 되지 않았다. 자유인이 된 것도 아니었다. 다만 누구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사람을 먼저 지켰고, 그 선택 뒤에 자기 이름을 썼다.
그것이 카일이 고른 첫 번째 맹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