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진해가 무릎을 꿇은 것은 한낮이 지나 해가 기울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흑풍채 채주의 무릎이 땅에 닿는 소리는 생각보다 작았다. 돌 위에 포대 자루 하나 내려놓는 것과 별 차이가 없었다. 담소하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도 검을 거두지 않았다. 칼날 끝이 곽진해의 목 아래 두 치쯤 되는 자리에서 멈춰 있었다. 바람이 없었다. 담소하의 손은 떨리지 않았다. 삼 년 전 멸문의 밤에도 이 사람은 이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웃고 있었다. 불빛 속에서 웃으면서 검을 들었다. 지금은 웃지 않았다. 그것만이 달랐다.
훈련장 흙바닥에 핏자국이 번져 있었다. 대부분 곽진해의 수하들 것이었다. 담소하의 오른쪽 옆구리에서도 무언가 뜨끈하게 흘렀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검자루를 쥔 손바닥 안쪽이 까져서 쇠 냄새가 났다. 담소하는 그 감각을 느끼면서도 눈을 곽진해에게서 떼지 않았다. 흙바닥에 무릎을 꿇은 사람이 이렇게 작아 보일 줄은 몰랐다. 삼 년 동안 머릿속에서 이 사람은 항상 화염보다 크게 서 있었다.
"청문검파,"
담소하가 말했다.
"담소하. 기억하십니까."
곽진해는 대답하지 않았다. 입술이 움직이긴 했는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눈빛이 검날과 담소하의 얼굴 사이를 오갔다. 두려움이라기보다는 계산에 가까운 눈이었다. 담소하는 그 눈을 알아봤다. 이 사람은 끝까지 무언가를 재고 있는 것이다. 살 수 있는 말이 무엇인지, 어디까지 토해 내야 검이 비켜 가는지.
"기억한다."
목소리가 낮고 잠겼다. 곽진해가 마침내 말했다.
"그 밤, 청문의 막내 녀석. 너였냐."
담소하는 검을 거뒀다. 한 번에, 깔끔하게. 베지 않았다.
뒤에서 백천리가 낮게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노경천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담소하는 곽진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름을 기억했으면 됐습니다."
그것이 전부였다. 복수를 완성했다는 말도, 원한을 갚았다는 선언도 하지 않았다. 그냥 그것으로 끝이었다.
곽진해가 바닥에 손을 짚으며 쓴웃음을 흘렸다.
"죽이지 않는 건가."
말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담소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곽진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눈빛이 이상했다. 두려움이 빠져나간 자리에 다른 것이 들어와 있었다. 경멸도 안도도 아닌, 어딘가 비틀린 동정 같은 것.
"잘못 찾아왔다, 아이야."
곽진해가 말했다.
"진짜 원수는 내가 아니야. 나는 시킨 대로 했을 뿐이다. 그걸 모르면 강호에서 오래 살지 못해."
담소하의 손이 다시 검자루 위에 올라갔다. 그러나 뽑지 않았다. 뽑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이 사람이 살아 있어야 물어볼 수 있다. 사부가 왜 죽어야 했는지. 그 밤 불 속에서 누가 명을 내렸는지. 담소하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지금 당장 그 이름을 물어봐야 하는가. 아니었다. 아직 그럴 때가 아니었다. 이 자리에서 이름을 얻어 봤자, 증명할 힘이 없으면 이름은 그냥 돌멩이다.
곽진해는 더 말하지 않았다. 수하들이 달려와 그를 부축했고, 흑풍채 무리는 쫓기듯 물러났다. 그들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동안 담소하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노을이 기울어진 하늘 아래, 발밑의 흙에 핏자국 몇 개가 번져 있었다. 담소하는 그 자국을 한참 내려다봤다. 삼 년이었다. 삼 년 동안 이 순간을 버텼는데, 막상 끝나고 나니 몸이 어디서부터 아픈지 알 수가 없었다.
"잘했다."
노경천이 옆으로 다가왔다. 조용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형다운 말투였다. 담소하는 그 말에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형은,"
담소하가 말했다.
"방금 곽진해가 한 말. 시킨 자가 따로 있다고 했습니다. 형은 그게 누구인지 압니까."
짧은 침묵이 있었다. 노경천이 대답하기 전에 바람이 한 번 지나갔다. 그 바람이 너무 길었다. 담소하는 형의 옆얼굴을 봤다. 노경천의 눈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초점이 먼 데로 갔다가 돌아오는 움직임. 모른다고 할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강호에 그런 말 하는 자는 많아. 책임을 미루려는 거야."
노경천이 말했다. 웃지 않았다. 그것이 오히려 더 이상했다. 담소하는 형의 얼굴을 봤다. 형의 눈은 곽진해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있었다. 무언가를 재는 눈이었다. 곽진해의 눈과 같은 종류의 눈이었다. 담소하는 그것을 알아채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더 물으면 형이 더 깊이 닫힐 것이었다.
백천리가 한쪽에서 땅에 꽂혀 있던 도를 뽑으며 말했다.
"의협이라는 게 원수 코앞에서 검을 거두는 건 줄 몰랐는데. 나는 배운 게 없어서."
비꼬는 말이었지만 악의는 없었다. 오히려 그 말이 담소하의 숨통을 조금 열어 줬다. 담소하가 낮게 말했다.
"죽이면 사부한테 물어볼 수가 없어서요."
백천리가 잠깐 멈칫하더니 도를 어깨에 걸쳤다. "그것도 이유가 되는군." 그가 덧붙였다. "근데 옆구리 좀 봐라. 피 새고 있어."
담소하가 내려다보니 옷 아래로 검붉은 얼룩이 번져 있었다. 생각보다 컸다.
"괜찮습니다."
담소하가 말했다. 백천리가 혀를 찼다.
"괜찮다는 말은 안 괜찮을 때 하는 말이야."
그러면서도 자기 허리춤에서 천 조각을 꺼내 던져 줬다. 담소하는 받아서 옆구리를 눌렀다. 천이 금방 붉어졌다. 백천리가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운교객잔에 돌아온 것은 해가 완전히 진 뒤였다. 묘련이 문 앞에 서 있었다. 등을 기대고 팔짱을 낀 채로, 세 사람을 훑어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셋 다 살아 있네."
감탄인지 핀잔인지 분간이 안 됐다. 담소하가 "예" 하고 대답하자 묘련이 문을 열었다. "들어와. 밥 식기 전에."
밥상은 소박했다. 된장국과 묵은 김치, 두부 한 모. 백천리는 밥 한 공기를 비우고 나서 술을 달라고 했다가 묘련한테 "여기 주막 아니야" 라는 말을 들었다. 그래도 묘련이 항아리 하나를 꺼내다 줬다. 노경천은 밥을 먹는 내내 조용했다. 담소하도 말이 없었다.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은 서로 다른 무게였다. 노경천의 침묵은 닫혀 있었고, 담소하의 침묵은 열려서 어딘가로 새고 있었다. 된장국 김이 밥상 위로 올라왔다가 흩어졌다. 아무도 그것을 보지 않았다.
식사가 끝나고 묘련이 그릇을 치우러 오다가 담소하의 손을 봤다. 검을 쥐느라 손바닥 안쪽이 까져 있었다. 묘련이 아무 말 없이 행주를 가져와서 손을 잡았다. 닦아 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잡고만 있었다. 담소하는 손을 빼지 않았다. 몇 초쯤 지났을까. 묘련이 손을 놓고 그릇을 들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아무 말이 없었다. 담소하는 그 자리에서 잠시 손을 내려다봤다. 따뜻했던 온기가 천천히 식었다.
밤이 깊어 백천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나는 내일 여기를 떠날 생각이야."
담소하가 "어디로요?" 하고 물었다. "모르지. 발 가는 대로." 백천리가 담소하를 내려다봤다. "근데 말이야. 곽진해가 한 말. 나는 그게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담소하가 고개를 들었다. 백천리가 계속했다. "배후가 있어. 그리고 그 배후는 곽진해보다 훨씬 높은 데 있을 거야. 그걸 파고 싶으면 조심해야 해. 네가 청문검파의 이름을 강호에 드러낸 순간부터, 그쪽에서도 너를 찾기 시작할 테니까."
담소하가 "알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백천리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갔다. 노경천은 그 대화 내내 등을 보이고 앉아 있었다. 등이 너무 조용했다. 담소하는 형의 등을 한 번 봤다가 시선을 거뒀다. 말을 걸지 않았다. 지금 형이 무슨 말을 하든, 그 말이 진심인지 계산인지 구분할 자신이 없었다.
담소하는 그날 밤 혼자 뒤뜰에 나갔다. 달이 없는 하늘이었다. 마구간 쪽에서 젖은 짚 냄새와 말 냄새가 섞여 흘러왔다. 바람이 차가웠고, 등 뒤의 자국이 옷 안에서 가늘게 아렸다. 사부가 마지막 순간에 손으로 새긴 그 자국. 검결이었다. 삼 년 동안 화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담소하는 등에 손을 뻗으려다 멈췄다. 닿지 않는 자리였다. 언제나 그랬다. 손이 닿지 않는 자리에 사부가 남긴 것이 있었다.
저 멀리 관도 쪽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담소하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곽진해의 마지막 말이 귓속에 남아 있었다. 진짜 원수는 내가 아니야. 담소하는 그 말이 거짓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노경천이 침묵한 이유도. 그 이름을 형이 알고 있다면,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다면, 다음에 마주쳐야 할 것은 원수가 아니라 형일지도 몰랐다. 담소하는 오래 서 있었다. 이름을 되찾은 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고,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재 속에서 더 깊이 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