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밝기 직전의 파서진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취선객잔 앞 흙길에 새벽 안개가 허리까지 차올랐고, 우물가 두레박은 누가 건드렸는지 삐걱대며 돌다 멈춰 있었다. 소령은 어젯밤 윤채가 떠난 창고 문 앞에서 칼자루를 잡은 채 동이 트는 것을 지켜봤다. 잠은 오지 않았다. 오려고 하지도 않았다. 창고 안에서는 증인이 짚더미에 등을 기댄 채 얕은 숨을 쉬고 있었다. 소령은 그 숨소리를 들으며 밤을 버텼다.
현성을 오간 나흘 동안 막리연은 소령에게 새 초식을 얹지 않았다. 등에 새겨진 기억 덕분에 사초식부터 육초식의 형상은 흉내 낼 수 있었지만, 세 초식을 한 호흡으로 잇고 나면 반드시 기운을 끊어 다시 세워야 했다. 사초식, 오초식, 육초식은 각각 한 번씩만 펼친 뒤 호흡을 되돌리는 식으로 익혔다. 여섯 초식을 이어 쓸 수 있게 된 것이 아니었다. 칠초식은 여전히 금지였다.
소령은 창고 앞에서 그 순서를 속으로 되짚었다. 일초식부터 삼초식까지 잇는다. 숨을 끊고 물러난다. 남은 세 수는 하나씩만 쓴다. 몸이 흔들리면 즉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그것이 닷새 동안 확인한 한계였다.
막리연이 국밥 한 그릇을 들고 옆에 앉은 것은 하늘이 겨우 회색으로 변할 무렵이었다. 말 없이 그릇을 내밀었고, 소령은 말 없이 받아 들었다. 식었다. 그런데도 한 숟가락 떴다. 팽노의 솜씨였다. 어젯밤 내내 부엌에서 불을 지켰다는 뜻이기도 했다.
"사형은 왜 무인들을 물렸을까."
소령이 먼저 말을 꺼냈다. 막리연은 잠시 국물을 들여다봤다.
"본인만 처리하고 싶었거나. 아니면—"
막리연이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곽진해한테 보고하기 싫었거나."
"어느 쪽이든 사형은 아직 제 편이 아니에요."
"그래. 그런데 적도 아닌 것 같지."
소령은 그 말을 씹다가 삼켰다. 국밥 한 그릇을 다 비우는 동안 둘 다 더 말하지 않았다. 흙길 위로 안개가 조금씩 걷혔다. 마구간 쪽에서 말이 발굽을 굴렸고, 젖은 짚 냄새가 바람에 실려왔다.
팽노가 부엌에서 나온 것은 그 직후였다. 행주로 손을 닦으며 걸어오다가 소령 앞에 멈춰 섰다. 아무 말 없이 소령의 어깨를 한 번 눌렀다. 손바닥이 묵직했다. 말 대신 그것으로 충분했다. 소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날이 밝자 막리연은 증인에게 자신이 기억하는 날짜와 장소, 설리항의 이름을 직접 말하게 하고 두 부로 받아 적었다. 증인은 읽어 들은 내용을 확인한 뒤 손도장을 찍었고, 팽노와 막리연이 입회자로 이름을 남겼다. 그 진술만으로 곽진해나 설리항의 책임이 확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묵살된 보고 사본, 새로 바뀐 창고 자물쇠, 증인의 진술을 서로 다른 자료로 보존해 다음 확인으로 잇기 위한 기록이었다.
한 부는 증인과 함께 북쪽 길로 보내기로 했고, 다른 한 부는 객잔과 떨어진 곳에 따로 맡겼다. 원본 보고 사본도 같은 꾸러미에 넣지 않았다. 누군가 한 사람이나 한 봉인을 빼앗아도 전부 사라지지 않게 한 뒤에야 팽노는 담여화에게 뒷길을 맡기기로 했다.
그 고요가 깨진 것은 오시가 막 지나서였다. 파서진 남쪽 방향에서 말발굽 소리가 울렸다. 하나가 아니었다. 담여화가 약재상 쪽 골목에서 뛰어왔고, 숨을 고르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혈사문이야. 열 명은 넘어. 근데 그 앞에 혼자 말 타고 오는 사람이 있는데—"
담여화가 잠깐 말을 멈췄다. 눈에 뭔가를 본 사람의 표정이었다.
"웃고 있어. 그 사람만 웃고 있었어."
막리연의 얼굴이 굳었다. 소령도 알았다. 곽진해였다.
팽노가 부엌 안쪽으로 다시 들어갔다가 나왔다. 손에 쥔 것은 행주가 아니었다. 오래되어 가죽이 거무스름하게 변한 짧은 도였다. 어디서 꺼낸 것인지 소령은 몰랐다. 아니, 물어볼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 팽노는 그 도를 허리춤에 찼다. 손이 떨리지 않았다.
"담여화, 창고 증인 데리고 객잔 뒷길로 나가라. 현성 쪽이 아니라 북쪽 산길."
팽노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담여화가 눈을 크게 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빠른 사람이었다. 더 묻지 않고 돌아섰다. 발소리가 사라지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남은 것은 셋이었다. 소령은 칼자루를 쥐었다. 손바닥에 땀이 배었다. 흙먼지가 발굽 소리와 함께 남쪽에서 밀려오기 시작했다.
곽진해는 말에서 내리지도 않고 취선객잔 앞에 섰다. 혈사문 무인들이 양옆으로 펼쳐졌고, 희뿌연 흙먼지 속에서 창날이 희미하게 번들거렸다. 곽진해의 웃음소리가 먼저였다.
"하하, 그래, 이렇게 됐군. 식도귀 팽 어르신도 계시고, 막 전 순찰사도 계시고."
그는 말 위에서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소령의 얼굴에 닿았을 때 웃음이 조금 더 깊어졌다.
"그리고 청명문의 마지막 불씨. 살아 있었어. 3년이나."
소령은 칼자루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청명문 멸문을 직접 지휘한 게 당신이오?"
물음이 아니었다. 확인이었다. 곽진해가 말 위에서 허리를 폈다.
"지휘라는 말이 좀 과하지만—"
그가 안장에서 뛰어내렸다. 발이 땅에 닿는 소리가 묵직했다. 흙먼지가 잠깐 일었다.
"틀리진 않았어."
막리연이 옆에서 낮게 말했다.
"소령아."
"알아요."
소령이 칼을 뽑았다. 이번에는 손이 떨리지 않았다.
싸움은 길지 않았다. 길 수가 없었다. 곽진해는 그냥 강한 것이 아니었다. 도법 하나하나에 무게가 실렸고, 그 무게는 소령이 지금까지 상대해 본 어떤 검보다 달랐다. 쇳소리가 날 때마다 팔목이 저렸다. 소령은 청명잔영검 일초식부터 삼초식까지 한 호흡으로 잇고 곧장 반 걸음 물러났다. 끊긴 숨을 다시 세운 뒤 사초식부터 육초식은 한 수씩만 꺼냈다. 여섯 초식을 연달아 완성한 것이 아니라, 이미 몸에 새겨진 형상을 한계 안에서 나누어 버틴 것이었다. 칠초식으로 넘어가려는 순간 기맥이 흔들렸다. 예상한 일이었다. 두렵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금지선을 넘는 대신 처음 세 수로 돌아갈 수 있었다.
막리연이 그 틈을 메웠다. 곽진해의 도를 막아서며 소령이 물러설 공간을 만들었고, 팽노는 소리 없이 혈사문 무인 두 명을 쓰러뜨렸다. 식도귀라는 별호가 허명이 아니었다. 나이가 무색할 만큼 손목의 힘이 달랐다. 쓰러진 무인의 갑옷이 흙바닥에 끌리며 쇳소리를 냈다.
곽진해가 막리연의 검을 흘려내며 비웃었다.
"오방맹을 버린 자가 이런 데서 칼을 드나. 설리항이 알면 웃겠어."
막리연의 눈빛이 흔들렸다가 가라앉았다.
"그 이름, 내가 직접 묻을 거야. 기다려."
그 말이 끝나기 전에 소령이 다시 치고 들어왔다. 일곱 번째 초식이 아니었다. 세 번째로 돌아갔다. 처음부터 다시. 완성하지 못한 검결로 완성된 도법을 이기려는 것이 아니었다. 버티는 것이 목적이었고, 버티는 것이 이미 싸움이었다.
곽진해의 도가 소령의 왼쪽 어깨를 스쳤다. 옷이 찢어졌고 피가 났다. 소령은 비틀거리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발이 흙을 파고들었다. 그 눈이 곽진해를 똑바로 봤다.
"청명문 문주 도현진의 제자 한소령이오."
소령이 천천히, 또렷하게 말했다.
"오늘은 당신의 목을 칠 힘이 없소. 하지만 당신이 한 일을 세상에 알리는 건 다른 문제요."
곽진해의 눈이 가늘어졌다.
"증인? 이미 처리했을 텐데."
"창고는 어젯밤에 비었소."
소령의 대답 뒤에 막리연이 덧붙였다.
"진술은 두 부로 나눴고, 묵살된 보고 사본과도 따로 보냈다. 그 말만으로 네 죄가 확정된다는 뜻은 아니야. 하지만 사람 하나 없앤다고 기록까지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뜻이지."
그때 곽진해의 뒤편으로 늦게 도착한 무인 하나가 말을 세우고 그의 귀에 짧게 보고했다. 북쪽 길로 보낸 추격조가 빈 수레만 확인했고, 관아 순라가 소란을 듣고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내용이었다. 객잔 맞은편의 닫혔던 문들도 하나씩 열리고 있었다. 장터 사람들의 얼굴이 문틈과 창살 뒤에서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곽진해는 당장 밀어붙이면 우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증인은 이미 자리를 벗어났고, 기록은 갈라졌으며, 대낮의 파서진에서 더 많은 목격자를 만들게 됐다. 그가 처음 타고 온 목적도 소령을 죽이는 것보다 청명문의 불씨가 살아 있는지 확인하는 데 가까웠다.
잠깐의 침묵 뒤, 곽진해의 웃음이 느리게 돌아왔다.
"재밌는 아이네. 오늘 확인할 건 확인했어."
그가 도를 내리고 무인들에게 부상자를 거두라고 손짓했다.
막리연이 앞을 막았으나 팽노가 짧게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추격하면 북쪽으로 빠진 증인의 경로를 거꾸로 드러낼 수 있었다. 곽진해는 말에 오르며 소령을 내려다봤다.
"다음엔 설리항 어르신이 직접 궁금해하실 거야. 그때는 내가 아니라 훨씬 더 격이 다른 분이 오실 테니, 준비 잘 해두게."
말발굽 소리가 멀어졌다. 혈사문 무인들은 쓰러진 동료를 말에 나눠 태우고 남쪽 길로 물러났다. 막리연은 쫓지 않고 인원과 말의 수, 퇴각 방향을 종이에 적었다. 팽노는 흙바닥에 떨어진 뱀 비늘 호완 하나를 천으로 감싸 따로 보관했다. 흙먼지만 잠시 허공에 남아 있다가 가라앉았다.
취선객잔 앞 흙길에 셋만 남았다. 소령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다. 막리연이 옷소매를 찢어 묶어 주었다. 손이 빠르고 거칠었다. 아픈지 물어보지 않았고, 소령도 아프다고 말하지 않았다. 팽노는 짧은 도를 다시 어딘가에 집어넣었다. 아무도 먼저 말하지 않았다.
한참 뒤에 소령이 칼을 칼집에 꽂았다.
"증인은 살았소. 설리항의 이름을 직접 말했소."
소령이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그게 오늘의 전부요."
막리연은 곽진해 쪽이 남긴 호완과 부러진 창날의 위치를 기록했고, 팽노는 소령의 상처가 난 시각과 방향을 덧붙였다. 증인은 정해 둔 경로에 올랐고, 진술 사본과 묵살된 보고 사본은 서로 다른 봉인에 남았다. 곽진해를 이긴 날은 아니었다. 그가 없애려던 사람과 기록을 함께 지켜 낸 날이었다.
팽노가 짧게 말했다.
"밥 먹어라."
소령은 피식 웃었다. 웃음이 나올 줄 몰랐는데 나왔다. 어깨가 욱신거렸고, 검결은 여전히 반쪽짜리였고, 곽진해는 살아서 떠났고, 설리항은 아직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웃음이 나왔다. 막리연도 짧게 코웃음을 쳤다. 팽노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지만 먼저 객잔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오늘은 첫 번째 결산이었다. 아직 다 갚지 못한 빚이 더 많았다. 하지만 빚이 있다는 것은, 살아서 갚아야 할 이유가 있다는 것이기도 했다.
소령은 취선객잔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등 뒤로 오후 햇살이 파서진 흙길 위에 길게 내렸다. 재 속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