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증언석에 앉는 날
폐쇄보다 좁은 동사
가람 일행은 공장 전체 폐쇄라는 말 대신 니켈 세척과 연결 가능성이 있는 두 공정의 정지 요구를 구체화한다. 만석의 조업 손실과 세희가 감수하는 직장 내 비용을 함께 놓고, 위험을 좁혀 적는 것이 과거 피해를 축소하는 합의가 아님을 확인한다.
배세희는 공정도 위에 붉은 펜을 대고도 선을 긋지 못했다. 열한 개 공정 이름 아래에는 기계번호가 촘촘했다. 강만석은 벽에서 두 걸음 떨어져 지도를 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복잡한 공장도면보다 검은 방수복 자락에 말라붙은 소금이 더 선명했다.
“어디까지 멈추자는 거요?”
세희가 두 칸을 동그라미로 둘렀다. 니켈 세척수와 연결 가능한 공정 둘이었다. 펜 끝에서 짧은 마찰음이 났다. 만석은 그 작은 원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열한 개 중에 둘.”
“현재 확인할 수 있는 위험을 기준으로 먼저 요구하는 범위입니다.”
“바다는 셋 중 하나만 죽은 게 아니오.”
그가 말한 셋은 공동어장 세 구역이었다. 세희는 나머지 아홉 공정에 줄을 긋지 않았다. 만석의 말에 밀려 아무 근거 없이 원을 넓히면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설명할 수 없었다. 반대로 두 개만 멈추면 안전하다고 지금 말할 수도 없었다.
최다온이 공정도 위에 얇은 종이를 올렸다. 배수와 수계 연결을 확인한 선이 겹쳤다. 어떤 곳은 이어졌고 어떤 곳은 아직 점선이었다. 만석은 점선 끝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여기서도 갈 수 있다는 말 아닙니까?”
“확인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연결되지 않았다고 확인한 선은 아니고요.”
“그런데 아홉 개는 계속 돌리고?”
세희가 대답하려다 멈췄다. 그녀가 ‘계속’이라고 말하는 순간 만석은 정상 가동을 허락해 달라는 뜻으로 들을 것이다. 서가람이 빈 종이를 공정도 옆에 붙였다. ‘멈추기’, ‘차단하기’, ‘확인하기’ 세 단어를 썼다.
“일단 오늘 요구할 행동을 고릅시다. 공장이 괜찮다는 선언문은 아닙니다.”
만석은 의자를 끌어 앉지 않았다. 법정에서도 책임과 긴급손해를 나눠 묻더니, 마을에 돌아오니 공장까지 작게 나누고 있었다. 모든 것을 작은 칸에 넣다 보면 자기들이 겪은 일도 작아지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접힌 종이를 꺼냈다. 조업이 멎은 날들이 적혀 있었다. 빈 날은 점 하나로 표시했는데, 점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바다가 나아질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다.
“여기 하루가 그냥 빈칸 같지요.”
세희는 종이를 봤다. “아닙니다.”
“오늘도 배를 못 띄웠소. 내일도 똑같으면 기계 둘 세웠다는 소리가 밥이 되겠소?”
세희는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노동자의 임금도 밥이라는 말을 하면 곧 누구의 밥이 먼저냐는 싸움으로 돌아갈 것 같았다. 그 싸움에서 이겨도 오염수는 멎지 않았다. 그녀는 도면 아래 붙어 있던 배수 확인표를 떼어 테이블로 가져왔다.
“이 두 공정에서 유량이 차단돼야 합니다. 나머지는 독립된 배수인지 확인하고 감시받아야 하고요. 확인이 안 되면 그대로 정상이라고 둘 수 없습니다.”
만석이 종이를 받지 않았다. “회사 사람이 회사 물길을 보겠다는 거요?”
“독립된 확인이 필요합니다. 저도 제 기록만으로 괜찮다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제야 다온이 펜을 들었다. 감시 대상과 확인해야 할 연결을 도면 위에 표시했다. 회사의 자체 측정값만 받는 방식으로는 지금 싸움을 끝낼 수 없었다. 누구나 같은 자료를 보고, 정한 기준을 넘거나 독립 배수가 확인되지 않을 때 조치 범위를 다시 넓혀야 했다.
가람은 세희에게 공정을 멈춘다는 말을 더 구체적으로 해 달라고 했다. 스위치 하나를 내리는 장면처럼 써도 되는지 물었다. 세희는 고개를 저었다. 잔류액과 연결설비, 작업자의 안전한 정지 순서를 검토해야 했다. 그녀가 혼자 벽판 앞에서 확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면 우리가 써야 할 건 가동중지 요구와 안전한 실행계획 제출이군요.”
가람이 적었다. 만석은 문장이 길어지는 것을 못마땅해했다. 세희는 그 문장에 실제로 손을 댈 사람들을 생각했다. 법정에서 ‘즉시’라고 쓰는 순간 누군가 밸브 앞에서 안전모를 눌러쓰고 서야 했다.
잠시 뒤 세희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공장 쪽 일정 확인이었다. 그녀는 회의가 더 걸린다고 말했다. 짧게 답하고 전화를 끊었지만 얼굴에 피로가 드러났다. 만석이 그 표정을 보고 물었다.
“이 회의도 근무로 쳐 줍니까?”
세희는 선뜻 그렇다고 하지 않았다. “확인해야 합니다.”
“회사에서 여기 오라고 해서 온 사람 아니오?”
“제 역할로 온 겁니다. 회사가 듣고 싶은 말만 하러 온 것은 아니고요.”
그 말 뒤에는 잠깐 정적이 왔다. 만석은 자신도 회사의 대표라는 말로 세희의 얼굴을 덮어 왔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보다 어느 쪽에서 월급을 받는지를 먼저 봤다. 그러나 세희가 원을 그은 두 공정은 회사로 돌아가 설명해야 할 표시였다.
다온은 테이블의 종이 끝을 눌렀다. 열린 문으로 바닷바람이 들어왔다. 어촌계 사람들이 쓰던 회의실이라 문을 닫아도 바다 냄새가 남았다. 세희의 안전모는 의자 아래에 놓여 있었다. 만석의 장화와 거의 붙어 있었다.
가람이 두 물건 사이를 지나 공정도로 갔다. “위험한 곳을 멈추면서 그곳에서 일한 사람에게 임금도 같이 끊기라고 요구할 이유는 없습니다.”
만석이 바로 말했다. “그 돈을 우리 배상금에서 내자는 건 아니겠지요.”
“재원과 부담 주체를 따로 요구해야 합니다. 지금 여기서 지급을 약속할 수는 없습니다.”
가람은 임금유지라는 단어를 안전조치 옆에 적었다. 회사가 현장의 위험을 해결하는 동안 노동자에게 그 값을 전부 넘기지 말라는 요구였다. 이를 적었다고 임금이 확보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빼 버리면 회의실의 노동자는 멈추라는 말에 동의할 자리가 없었다.
세희가 만석을 봤다. “위험한 두 공정을 멈추는 것과 공장 사람 전부를 버리는 것은 다른 명령입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벽에는 아직 아홉 공정이 남아 있었다. 그대로 둬도 되는지 확인한다는 단서를 모두 달아도, 둘이라는 숫자가 작은 것은 변하지 않았다. 만석은 배를 띄우던 선원들에게 돌아가 무엇을 말할지 생각했다. 전면폐쇄에서 물러섰다고 들을 사람이 있을 것이다.
“우리한테 공장 편 들라는 말로 들릴 수 있소.”
세희가 의자에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저도 돌아가면 어민 쪽에서 공정 멈추고 왔다는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잠깐 봤다. 회의가 끝난 뒤 돌아갈 곳이 다르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변명처럼 들리지 않았다. 가람은 둘 사이에 말로 다리를 놓으려 하지 않았다. 대신 각자가 가져갈 문장에 어떤 조건이 있어야 하는지 물었다.
만석은 종이를 끌어왔다. 과거 피해를 두 공정 범위로 제한하지 않는다는 말을 넣으라고 했다. 현재 정지 범위를 좁혔다고, 어장 피해도 작은 범위에서만 인정하는 합의처럼 쓰이면 서명하지 않겠다고 했다.
가람이 답했다. “조치 동사는 좁혀도 과거 손해와 회사 책임은 따로 끝까지 계산하겠습니다.”
그는 실제로 종이를 나눴다. 당장 멈추고 확인할 행위가 한 장, 원인과 과거 손해를 규명할 요구가 다른 장이었다. 세희는 두 번째 종이를 없애자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과거 보수와 배수 자료도 확인 대상에 남아야 한다고 했다.
회사 답변서의 P-17이 가운데 놓였다. 열두 해 전에 폐쇄돼 현재 위험과 무관하다는 문장이 있었다. 만석은 그것이 거짓말일 것이라고 했다. 다온은 아직 땅속 상태를 보지 않았다고 답했다. 폐쇄가 철거인지 차단인지부터 확인해야 했다.
“그러면 그 관도 지금 열어 보자고 합시다.”
“현장에 접근할 근거와 안전계획부터 필요합니다.” 가람이 말했다. “오늘 그 요구를 같은 문서에 넣을 수는 있습니다.”
만석은 오래 숨을 내쉬었다. 또 기다리는 말 같았다. 그러나 아까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기다림만은 아니었다. 두 공정을 멈추라고 요구하고, 다른 배수의 독립성을 확인하며, 폐쇄됐다는 관의 실체도 따로 볼 길이었다.
그는 붉은 펜을 집었다. 두 공정 옆에 있던 원을 넓히는 대신 물음표가 남은 배수선 아래 밑줄을 그었다.
“이 확인 기한은 빈칸으로 내지 맙시다.”
가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담당과 답변기한을 요구안에 넣었다. 실제 날짜와 집행 가능성은 심문에서 다뤄야 했지만, 나중에 알아서 하라는 빈 약속으로 제출하지 않기로 했다. 다온은 측정 결과가 기준을 벗어났을 때 필요한 추가 조치도 빠뜨리지 말라고 했다.
회의가 끝날 무렵 세희는 안전모를 주워 들었다. 만석은 의자를 원래 자리에 놓다가 그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넸다. 두 공정 정지와 독립 배수 확인이 함께 적힌 초안이었다.
“가져가서 읽으시오. 우리가 공장 괜찮다고 했다는 말은 하지 말고.”
“그렇게 쓰지 않았습니다.”
“내가 돌아가서도 공장 사람 전부 물러서기로 했다는 말 안 하겠소.”
악수는 없었다. 세희는 초안을 반으로 접어 안전모 안에 넣지 않고 가방에 따로 보관했다. 만석도 어민 손해가 적힌 종이를 자기 주머니에 넣었다. 함께 만든 요구와 따로 남은 입장이 각자의 손에 있었다.
밖으로 나오자 선착장의 배들이 같은 높이로 흔들렸다. 가람은 그 움직임을 보며 통화를 했다. 공정정지에 드는 비용과 긴급조치 재원을 설명할 주체가 다음 심문에 나와야 했다. 환경책임 보험자와 정화보증금 관리기관에도 질문이 향했다.
그는 통화를 마치고 돌아섰다. 만석이 아직 문 앞에 있었다.
“둘 멈추자는 종이도 돈이 있어야 멈춥니까?”
“누가 비용을 대는지 미루면 실제로 움직이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만석은 바다를 봤다. 오늘 알아낸 것은 공장 전체를 닫지 않고도 위험에 손을 댈 수 있다는 길이었다. 그 길을 누가 돈을 내어 열 것인지는 다음 싸움이었다. 그는 자기 배로 내려가는 대신 다시 회의실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의자 하나를 더 남겨 두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