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열한 시, 아르덴 호텔 1층 복도는 늘 그렇듯 오래된 냄새를 품고 있었다. 카펫에 밴 습기, 환기 덕트 사이로 빠져나오지 못한 먼지, 그리고 아무도 켜지 않은 향초의 잔향 같은 것들. 서린은 프런트 뒤편 사무실 문을 열자마자 모니터를 켰다. 메일 알림은 두 개였다. 하나는 지민, 다른 하나는 배성재 측 법무팀이었다.
법무팀 메일 제목은 짧았다.
유지보수 예산 집행 보류 요청.
서린은 제목을 한 번 더 읽었다. 매각 압박을 메일 열두 통으로 밀어 넣더니, 이번에는 예산 줄을 직접 죄겠다는 뜻이었다. 체크인 데스크 조명 교체, 엘리베이터 점검, 배관 보수. 신청해 둔 항목마다 보류 표시가 찍혀 있었다. 서린은 마우스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간 걸 느끼고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메일 창을 닫았다. 열어 둔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지민의 메일은 달랐다.
언니, 저 지금 올라가요. 좋은 거 하나 물고 왔음.
이모티콘이 세 개나 붙어 있었다. 서린은 화면을 보며 짧게 숨을 내쉬었다. 지민이 저런 말을 할 때는 둘 중 하나였다. 정말 좋은 소식이거나, 서린이 싫어할 소식을 좋다고 포장해 왔거나.
문이 열리고 지민이 노트북과 커피 두 잔을 동시에 들고 들어왔다. 한 손에 든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기울기가 아슬아슬했다.
"쏟겠다."
"안 쏟아요."
지민이 노트북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커피를 옆으로 밀었다.
"언니 거예요. 오늘 표정이 아메리카노 표정이에요."
"라테 표정이면 뭔데."
"그건 아직 희망이 있을 때 표정이고요."
지민은 태연하게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저 오늘 채널 하나 연결했어요. 푸드 미디어 쪽인데, 강도윤 복귀 콘텐츠 단독 협업 조건 들고 왔거든요."
서린은 커피를 집으려다 멈췄다.
"어떤 채널."
"테이블 서울이요. 구독자 팔십만이고, 파인다이닝 콘텐츠 비율이 높아서 타깃이 딱 맞아요. 조건은 촬영 협조랑 브랜딩 노출, 그리고 셰프 인터뷰 포함이에요."
"도윤 씨가 동의했어?"
"아직요. 그래서 오늘 미팅에서 꺼내려고요."
서린은 그제야 커피를 들었다. 차가운 컵이 손바닥에 닿는 감각이 또렷했다. 인터뷰. 도윤이 공개 석상에서 마이크 앞에 선 건 스캔들 직후의 해명 자리 이후로 없었다. 그 뒤로는 아무것도 없었다. 서린은 그 침묵의 무게를 알고 있었다. 적어도 어느 정도는.
"일단 오늘은 주방 운영 계획이랑 메뉴 방향만 잡아."
서린이 말했다.
"미디어 건은 도윤 씨 반응 보고 나서."
"알겠어요. 그런데—"
지민이 화면을 내리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도윤 씨 지금 와 있어요. 방금 도착했다고 소희 언니한테 문자 왔는데요."
서린은 시계를 봤다. 열한 시 이십 분. 미팅은 오후 두 시였다.
아르덴 주방은 호텔 지하 1층 끝에 있었다. 연회장과 연결된 대형 주방이 따로 있었지만, 서린이 도윤에게 지정한 곳은 그쪽이 아니었다. 직원 식사를 담당하던 작은 주방. 지금은 거의 쓰지 않는 공간이었다. 계약서에는 '파인다이닝 파일럿 메뉴 개발용 전용 공간'이라고 적혀 있었다.
서린이 주방 문을 밀었을 때, 도윤은 이미 레인지 앞에 서 있었다. 재킷은 벗어 의자에 걸쳐 두고, 소매를 팔꿈치까지 접은 채 가스 밸브를 천천히 돌려 보고 있었다. 불은 켜지지 않았다. 그냥 만지는 것 같았다. 오래된 물건의 상태를 손으로 먼저 읽는 사람처럼.
"두 시에 미팅인데요."
도윤이 돌아봤다. 놀란 기색은 없었다.
"일찍 왔어요. 공간 좀 보려고요. 뭐, 안 돼요?"
"계약서에 사용 시간 명시했는데요."
"오전 미팅 이후 전일 사용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도윤이 가스 밸브에서 손을 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오늘 오전에 미팅 잡혀 있으면 지금이 미팅 이후 아닌가요."
서린은 말을 삼켰다. 억지 논리였지만, 지금 당장 계약서를 꺼내 반박할 만큼 틀린 말도 아니었다.
"주방 상태는요."
"레인지 두 개는 점화 상태 확인이 필요하고요."
도윤이 자연스럽게 주방을 훑으며 말했다.
"냉장고는 소음이 있어요. 작동은 되는데 오래됐어요. 칼은 지참할게요. 나머지는 쓸 만해요. 공간 자체는 나쁘지 않아요."
서린은 주방 안으로 한 발 들어섰다. 천장 형광등이 일정한 간격으로 켜져 있었다. 1층 체크인 데스크 조명과 달리 여기는 깜빡임이 없었다. 쓰이지 않는 공간이 오히려 더 멀쩡한 경우도 있었다. 아르덴의 오래된 아이러니 중 하나였다.
"레인지 점화 점검은 오늘 오후에 시설팀 붙일게요."
서린이 수첩에 메모했다.
"냉장고는 이번 주 안에 교체 여부 확인하고요."
"서린 씨."
도윤이 불렀다. 직함이 없었다. 어제와 같았다.
서린은 수첩에서 시선을 들지 않았다.
"예산 문제 있죠."
도윤이 말했다.
"냉장고 교체 얘기 꺼낼 때 표정이 그랬어요."
"괜찮아요."
"그 괜찮아요가 진짜 괜찮다는 건지, 아니면 신경 쓰지 말라는 건지는 구분이 돼요."
서린이 수첩을 닫았다. 천천히, 정확하게. 그리고 도윤을 바라봤다.
"투자자 측에서 유지보수 예산 집행 보류 요청이 들어왔어요."
서린이 말했다. 숨길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이 호텔 안에서 일하면 보이게 되어 있었다.
"냉장고는 제가 처리할게요. 도윤 씨는 메뉴 계획서 초안만 오늘 미팅까지 잡아 오면 돼요."
"예산 보류를 걸어 놓고 파인다이닝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시키는 사람이 있어요?"
"있어요. 지금 여기."
짧은 침묵이 주방을 채웠다.
도윤이 먼저 시선을 거뒀다. 냉장고 쪽을 봤다가, 레인지를 봤다가, 그러다 창을 향했다. 지하 주방 창은 작고 높았다. 거리의 발목 높이만큼만 보였다. 서린은 그 옆모습을 보지 않으려다 결국 봤다. 2년 전과 달라진 건 없었다. 그게 오히려 더 불편했다.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도윤이 창을 보며 말했다.
"이 호텔, 지금 얼마나 버텨요?"
서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세 달요?"
도윤이 고개를 돌렸다.
"아니면 그보다 짧아요?"
서린은 그를 봤다. 도윤의 눈은 쉽게 읽히지 않았다. 걱정인지, 계산인지, 아니면 그냥 확인인지.
"왜요."
"그냥요. 알고 들어가야 할 것 같아서."
"계약서에 기간 명시돼 있어요. 그걸 기준으로 일하면 돼요."
"그렇죠."
도윤이 짧게 웃었다. 웃음 끝은 금방 사라졌다.
"근데 서린 씨, 나 이 호텔 상황 어느 정도는 알고 왔어요. 계약서 받기 전부터."
서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뭔가 작은 것이 움직이는 감각을 느꼈다. 그는 주방 레인지 점검을 하러 온 게 아니었다. 이미 알고 있었고, 그럼에도 서명했다.
그 이유를 묻는 말이 목 어딘가까지 올라왔다가, 끝내 내려갔다.
"두 시에 봐요."
서린이 수첩을 옆구리에 끼며 말했다.
"지민 씨도 올 거예요. 미디어 협업 건 하나 들고 올 텐데, 그 부분은 일단 들어는 봐요. 결정은 나중에 해도 되고."
"인터뷰 건요?"
서린이 걸음을 멈췄다. 지민 말고는 아무에게도 꺼내지 않은 내용이었다.
"어떻게 알아요."
"테이블 서울이 저한테도 연락했어요. 열흘 전에."
도윤이 의자에서 재킷을 들었다.
"거절했는데, 아르덴 쪽이랑 얘기가 됐다고 다시 연락이 와서요. 뭔지 알았죠."
서린은 지민을 떠올렸다. 그리고 지민이 '좋은 거 물고 왔다'고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렸다. 채널이 먼저 도윤에게 접촉했고, 거절당한 뒤 아르덴 쪽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지민이 그 경로를 알고 있었는지, 몰랐는지. 둘 중 하나였고, 어느 쪽이든 문제였다.
"두 시에 얘기해요."
도윤이 재킷을 걸치며 말했다. 목소리에는 특별한 감정이 없었다. 그냥 사실을 말하는 사람처럼.
"저도 들어볼게요."
서린은 주방을 나왔다. 복도 형광등이 조용히 켜져 있었다. 1층 체크인 데스크처럼 깜빡이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더 오래 눈에 남았다. 도윤이 계약서를 받기 전부터 아르덴 상황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 주방 냄새처럼 복도까지 따라왔다.
그리고 그 뒤를, 아직 묻지 못한 질문 하나가 천천히 밟고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