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박재원이라는 이름 석 자가 상가 골목을 돌았다.
제일 먼저 소문을 들고 온 사람은 역시 박명자였다. 명자는 세탁소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안으로 들어서더니, 마스크도 반쯤 내린 채로 카운터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숨을 조금 몰아쉬고 있었다. 계단을 뛰어 내려온 모양이었다.
"민주야, 큰일 났어. 재원이가 내려왔대."
민주는 스팀 다리미를 들고 있다가 손을 멈췄다. 재원이라는 말이 낯설지 않았다. 명자 조카. 건물 지분을 물려받은 쪽. 지난 몇 주 동안 골목 어딘가에서 그 이름이 한두 번씩 오갔다. 그러나 직접 나타났다는 말은 처음이었다.
"언제요?"
"어젯밤에 왔나 봐. 아침에 이 층 복도에서 딱 마주쳤는데, 나한테도 인사를 안 하더라고. 내 건물인데."
명자가 혀를 찼다. "그러더니 오늘 오전에 각 가게마다 쪽지 놓고 갔대. 오후에 개별 면담 하겠다고."
민주는 다리미를 내려놓고 카운터 아래 선반을 열었다. 아직 아침 첫 손님도 안 왔는데, 면담이라는 말이 벌써 어깨를 짓눌렀다. 선반 안쪽에서 영수증 묶음을 꺼내는 척하다가 그냥 닫았다.
"무슨 면담이요."
"매각이래. 건물 통째로. 그냥 팔아버리겠다는 거야."
명자의 목소리가 한 톤 내려갔다. "근데 재원이가 하는 짓이 이상해. 전체 공지를 안 하고, 가게마다 따로따로 부른다잖아."
따로따로. 민주는 그 두 글자를 속으로 한 번 더 읽었다. 전체를 한 자리에 모으면 서로 눈치를 보고 버티는데, 하나씩 불러 앉히면 각자의 사정이 먼저 입 밖에 나온다. 그걸 노리는 거다.
쪽지는 오전 열 시쯤 세탁소 문 아래 들어와 있었다. 작은 봉투에 반듯하게 접힌 종이 한 장. 민주는 뜯기 전에 잠깐 들여다봤다. 봉투 뒷면에 이름도 없고 도장도 없었다. 그냥 하얀 봉투였다.
안에는 짧은 문장이 세 줄 있었다. 건물 매각과 관련하여 각 임차인 사정을 고려한 조건을 제안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오후 두 시, 삼 층 빈 사무실로 오시면 됩니다. 박재원 드림.
사정을 고려한 조건. 민주는 종이를 접어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좋은 말이 이렇게 차갑게 읽히는 경우는, 보통 뒤에 따라오는 숫자가 좋지 않을 때였다.
점심 손님이 두 명 다녀가고 나서 옆 가게 황 사장이 문을 빼꼼 열었다. 신발 수선을 하는 황 사장은 나이가 일흔에 가까웠고, 상가에서 제일 오래된 세입자였다. 그가 이렇게 직접 문을 두드리는 경우는 드물었다.
"강 사장, 그 쪽지 받았어?"
"네, 받았어요."
"나는 안 갈 거야." 황 사장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 단호함이 조금 흔들려 있었다. "근데 안 가도 되는 건지 모르겠네."
민주는 잠깐 황 사장 얼굴을 봤다. 주름이 깊었고, 눈 아래가 어두웠다. 아마 어젯밤부터 잠을 못 잔 것 같았다.
"일단 뭔 말을 하는지는 들어봐야 하지 않겠어요?"
민주가 말했다.
"안 가는 건 들은 다음에 결정해도 되니까요."
황 사장이 고개를 끄덕이는 건지 흔드는 건지 모를 동작을 하다가 문을 닫았다.
오후 두 시 삼십 분쯤, 민주는 삼 층 계단을 올라갔다. 면담 시간보다 삼십 분 늦은 건 의도한 것도 아니고 그냥 손님이 있었다. 손님을 내보내고 나니 그 시각이 됐다.
삼 층 빈 사무실 문은 열려 있었다. 안에는 접이식 탁자 하나와 플라스틱 의자 두 개가 있었고, 박재원이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삼십 대 중반쯤으로 보였다. 양복 상의를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쳤고, 서류가 탁자 위에 몇 장 펼쳐져 있었다.
"어서 오세요. 세탁소 강 사장님이시죠?"
박재원이 일어서지는 않고 고개만 올렸다.
민주는 의자에 앉으면서 서류 방향을 힐끗 봤다. 숫자가 보였다. 보증금과 임대료가 적혀 있었고, 그 아래에 '명도 일정'이라는 두 글자가 있었다. 명도. 민주는 그 단어가 들어오는 순간 숨을 한 번 고르게 쉬었다.
박재원의 말은 깔끔했다. 건물 전체를 매각하기로 결정했고, 임차인들에게는 보증금 반환과 이사 비용 일부를 추가로 지원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조기 합의를 할 경우 세 달 치 월세를 면제하겠다고 했다.
"조기 합의가 언제까지예요?"
민주가 물었다.
"이번 달 말이요."
이번 달 말. 민주는 손을 무릎 위에 얹은 채로 탁자 위 서류를 한 번 더 봤다. 서류 오른쪽 아래에 서명란이 있었다. 비어 있었다.
"저는 오늘 서명은 못 해요."
"네, 물론이죠. 검토하시고 연락 주세요."
박재원이 서류를 가지런히 모아 밀었다. 가져가라는 뜻이었다. "다만 강 사장님 경우는 세탁소 설비 이전 비용이 다른 분들보다 좀 더 들 수 있으니까, 그 부분을 고려한 별도 조건도 얘기할 수 있어요."
별도 조건. 민주는 서류를 집어 들지 않았다.
"다른 분들도 다 이렇게 따로따로 만나시는 거예요?"
"네, 각자 상황이 다르니까요."
"한 자리에 모아서 얘기하면 안 되나요?"
박재원이 잠깐 멈췄다. 짧은 침묵이었는데, 그 침묵 안에서 그가 뭔가를 계산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정이 다른 분들이 한 자리에 있으면 불필요한 오해가 생길 수 있어서요."
민주는 그 말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류는 탁자 위에 그대로 뒀다.
계단을 내려오는데 명자가 이 층 복도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분명히 기다리고 있었다.
"뭐래?"
"이달 말까지 서명하면 조건 준다고요."
"얼마나?" "세 달 월세 면제에 이사비 일부요."
명자가 코웃음을 쳤다.
"그 돈으로 여기서 나가면 어디 가서 보증금이 나와. 이 동네에서."
그리고 목소리를 낮췄다.
"근데 민주야, 재원이가 황 사장한테는 아예 다른 조건을 제시했다는 얘기가 있어. 황 사장이 말을 못 하고 있어."
민주는 계단 끝에 서서 골목 쪽을 바라봤다. 빈 점포 셔터는 내려져 있었다. 낮인데도 그쪽은 어두컴컴했다.
저녁 여섯 시가 넘어서 준수가 들어왔다. 가방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고, 부엌으로 오는 발소리가 느렸다. 민주는 찌개를 끄고 그릇을 꺼내면서 등 뒤로 준수가 식탁에 앉는 소리를 들었다. 의자 다리 긁히는 소리가 짧게 났다.
"오늘 수업 늦게 끝났어?"
"응."
준수가 대답했다. 한 박자 늦었다.
민주는 찌개 냄비를 식탁에 올리면서 준수 얼굴을 봤다. 눈 아래가 어두웠다. 황 사장 얼굴이랑 비슷했다. 잠을 못 잔 사람의 얼굴.
밥을 먹는 동안 둘 다 크게 말하지 않았다. 준수가 찌개를 한 번 더 떴고, 민주는 그걸 보면서 뭔가 물어보려다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맛있어?"
"응, 맛있어."
그게 전부였다. 그날 저녁 식탁에서 나눈 대화는. 민주는 설거지를 하면서 창밖을 봤다. 빗기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봄비가 또 오려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민주는 한 가지를 떠올렸다. 삼 층 빈 사무실에서 박재원이 서류를 밀면서 했던 말. 별도 조건. 그 말을 황 사장한테도 했을 거고, 아마 다른 가게들한테도 각각 다른 말을 했을 거다. 같은 건물 사람들이 서로 얼마를 제안받았는지 모르게. 그렇게 하나씩 떼어내면, 결국 혼자 남은 사람이 버티기 어렵다.
민주는 행주를 개수대에 걸면서 손을 닦았다. 내일 아침 셔터를 올리기 전에, 황 사장 가게 문을 두드려야 할 것 같았다. 혼자 들은 말이 서로를 갈라놓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