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오후 네 시 이십 분이었다.
사무실은 조용했다. 주간 보고가 끝난 뒤 팀원들이 하나씩 자리를 비운 탓에, 열린 창으로 바깥 공기가 들어오는 소리가 꽤 크게 들렸다. 형광등 하나가 미세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아침부터 그랬는데 아무도 신청을 안 넣었다. 서하는 모니터 앞에 앉아 소송 건 서류 목록을 다시 펼쳤다. 오전에 도윤이 배당 경로 표시 칸에서 시선을 멈췄던 그 장면이, 여섯 시간이 지나도록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아직도 그거 봐요?"
지우가 커피 두 잔을 들고 돌아오면서 서하의 모니터를 흘깃 봤다. 서하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답했다.
"배당 경로 표시 칸이요. 아무리 봐도 이 칸이 왜 있는 건지 모르겠어서요."
"그거, 내부 배정 이력 추적용이에요. 원래 자동으로 채워져야 하는 칸인데."
지우가 커피를 내려놓으면서 덧붙였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았다.
"비어 있으면요?"
서하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지우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서하의 화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비어 있으면 안 되는 칸이에요. 그게 비어 있다는 건, 배정 과정에서 뭔가 빠졌다는 뜻이거든요. 아니면 누가 지웠거나."
지우는 그 말을 하고 나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아무렇지 않은 척이었지만, 컵을 내려놓는 손이 조금 빨랐다. 서하는 그걸 봤다. 지우도 이미 오래 생각해 온 말이라는 게 느껴졌다. 오늘 처음 꺼낸 게 아닌 것 같았다.
그때 도윤이 복도에서 들어왔다. 손에 파일이 없었다. 그게 이상했다. 도윤은 항상 뭔가를 들고 다녔다.
"강 심사역님, 보고서는요?"
서하가 묻자 도윤은 자리에 앉으면서 짧게 답했다.
"상무님께 넘겼어요."
"차 수석님한테 아니고요?"
"아니요."
더 이상 설명이 없었다. 서하는 지우를 봤다. 지우는 커피를 마시는 척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 동작 하나가,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말해 줬다. 차진혁을 건너뛰고 상무에게 직접 넘겼다는 건, 도윤이 이미 어떤 판단을 끝냈다는 뜻이었다. 서하는 그 판단이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알지 못했다.
도윤이 마우스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하는 시선을 거두려다가 멈췄다. 도윤의 화면에 배당 관리 시스템이 열려 있었다. 메뉴 탭이 몇 번 바뀌더니, 이력 조회 화면으로 넘어갔다. 도윤은 사건 번호를 입력했다. 엔터 키를 누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사무실이 너무 조용한 탓이었다. 프린터도 꺼져 있고, 전화도 울리지 않는 금요일 오후였다.
그리고 화면에 빨간 글씨가 떴다.
서하는 그 화면을 직접 보지 못했다. 하지만 도윤의 손이 마우스 위에서 멈췄다가, 천천히 손목 아래로 내려오는 걸 봤다. 그 동작 하나가 전부였다. 도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화면을 닫지도 않았다. 그냥 그 상태로 잠시 앉아 있었다. 등이 평소보다 조금 굳어 보였다.
서하는 숨을 참았다.
"강 심사역님."
목소리가 생각보다 작게 나왔다. 도윤이 고개를 돌렸다.
"조회가 안 됐어요?"
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모니터 전원을 내리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일 캐비닛 쪽으로 걸어가더니 서랍 하나를 열었다. 서하는 그 서랍이 어떤 서랍인지 알고 있었다. 지난 화요일에 지우가 메모를 꺼냈던 바로 그 서랍이었다. 금속 서랍이 열리는 소리가 짧게 났다. 도윤은 안을 들여다보다가 아무것도 꺼내지 않고 닫았다.
"지우 씨."
도윤이 서랍을 닫으면서 지우를 불렀다.
"오승우 팀장 이전 배정 기록, 직접 본 사람 있어요?"
지우가 커피를 내려놨다. 이번엔 피하지 않았다.
"본 사람은 없어요. 기록 자체가 시스템에서 잘린 것 같더라고요. 제가 메모에 적은 거, 서하 씨한테 주지 않았어요?"
서하가 손을 들 뻔했다. 참았다.
"네, 받았어요."
도윤이 서하를 봤다. 짧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서하는 그 시선이 단순한 확인이 아니라는 걸 느꼈다. 평가도 아니고 지시도 아니었다. 뭔가를 재는 것 같았다. 얼마나 알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월요일에 시스템 담당 쪽으로 열람 요청 넣을 거예요. 이름은 제 이름으로 해요."
도윤이 그렇게 말하고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서하는 잠깐 그 말의 무게를 가늠했다. 차진혁 수석이 창구 단일화를 강조했다는 건 팀원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런데 도윤은 그 통로를 건너뛰고, 시스템 담당 쪽으로 직접 요청을 넣겠다고 했다. 그 말 한 마디 안에 얼마나 많은 계산이 들어 있는지, 서하는 다 알지 못했다. 다만 그게 조용하지만 분명한 선 넘기라는 건 알았다.
지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모르는 거예요, 그 요청."
농담처럼 들렸지만 농담이 아니었다. 도윤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하는 그 교환이 얼마나 많은 말을 생략하고 있는지 느끼면서, 자신의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이미 식어 있었다.
퇴근 시간이 됐다. 지우가 먼저 일어서면서 가방을 들었다.
"서하 씨, 오늘 뭐 먹어요?"
"모르겠어요. 편의점이요, 아마."
"또요? 거기 김밥 질기잖아요."
"씹는 맛이 있잖아요."
지우가 웃었다. 도윤은 반응이 없었다. 서하는 가방을 챙기면서 모니터를 껐다. 도윤의 화면은 아직도 켜져 있었다. 빨간 글씨는 이미 사라졌겠지만, 서하는 그 접근 권한 오류 메시지가 어떤 글씨였는지 자꾸 상상하게 됐다.
'열람 권한이 없습니다'
같은 건조한 문장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문장이 왜 이렇게 무겁게 느껴지는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서하는 복도 끝을 봤다. 차진혁의 자리는 오후 내내 비어 있었다. 외근이라고 했다. 어디 외근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게 아무렇지 않게 지나간 하루였는데, 지금 생각하니 아무렇지 않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서하는 핸드폰을 꺼냈다. 문자 앱을 열었다. 아버지의 이름이 화면 위쪽에 있었다. 읽음 표시는 벌써 사흘째였다. 서하는 커서를 문자 입력창에 올려놨다. 손가락이 자판 위에서 잠깐 머물렀다.
뭐라고 써야 할지 여전히 몰랐다. 잘 지내냐는 말은 너무 멀었고, 나 요즘 힘들다는 말은 너무 가까웠다. 그 사이 어딘가의 말을 아직 찾지 못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서하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로비를 빠져나오면서 서하는 잠깐 발걸음을 늦췄다. 건물 유리문 너머로 바깥의 가로등이 보였다. 금요일 저녁의 거리는 늘 조금 다른 빛이었다. 더 따뜻하거나 더 지친 빛이거나. 오늘은 후자 쪽이었다. 퇴근하는 사람들이 빠르게 지나쳤다. 다들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서하는 잠깐 그 흐름 바깥에 서 있었다.
월요일 아침이 오면, 도윤이 열람 요청을 넣을 것이다. 그 요청이 차진혁의 창구를 건너뛴다는 사실을 차진혁이 언제 알게 될지, 서하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배당 경로 표시 칸이 비어 있고, 오승우 이전 배정 기록이 잘려 있고, 원고 대리인이 소장 제출 이후에 교체됐다는 사실들이 이제는 각각이 아니라 하나의 방향으로 기울고 있다는 느낌이, 퇴근길 내내 서하의 발걸음을 무겁게 했다.
편의점 김밥은 역시 질겼다. 서하는 계산대 앞 의자에 앉아 혼자 씹으면서 핸드폰 화면을 다시 열었다. 냉장고 모터 소리가 낮게 깔렸다. 편의점 조명은 사무실보다 더 하얗고 더 피곤한 빛이었다. 아버지의 이름. 읽음 표시. 그리고 빈 입력창.
손가락이 움직였다. 세 글자를 눌렀다가 지웠다. 다시 눌렀다. 이번엔 지우지 않았다.
'아버지, 잘 지내요?'
전송 버튼 위에서 멈췄다. 어제보다 더 오래 그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오늘도 전송되지 않았다. 손가락이 내려갔다. 다만 서하는, 이번에 그 속도가 달랐다는 걸 알았다. 조금 더 늦게 내려갔다. 그게 전부였지만, 그게 전부가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김밥 한 줄을 다 먹고 나서도 서하는 잠깐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월요일이 오면 도윤이 버튼을 누를 것이다. 그리고 그 버튼이 어디까지 울릴지, 아직 아무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