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가온이 감사팀 사무실에 나타난 건 오전 열한 시 이십 분이었다.
이겸은 그 시간을 알지 못했다. 예전 생에서 민가온을 처음 만난 건 계열사 용역 결과 보고서 안에서였다. 이름 석 자로만. 얼굴은 그보다 훨씬 나중이었다. 적어도 이 시점에서 그녀가 직접 감사팀 층으로 걸어 올라올 이유는, 이겸의 기억 어디에도 없었다. 그 공백이 불편했다. 기억에 없는 움직임은 통제 바깥의 움직임이었다.
해진이 먼저 봤다. 복도 끝 유리문 너머로 작은 배낭을 맨 여자가 수신처를 확인하듯 층 안내판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해진은 일어서려다 멈췄다. 그러고는 이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부장님. 저 분, 어제 제가 정리한 외부 용역 프로필에 있는 사람 아닌가요?"
이겸은 서류에서 눈을 들었다. 유리문 너머 여자는 이미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이겸은 대답 대신 서류를 뒤집어 엎었다. 해진이 그 동작을 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민가온은 들어오면서 두리번거리지 않았다. 시선이 사무실 안쪽을 한 번 훑고 이겸에게 멈췄다. 배낭을 앞으로 끌어안고 서서 인사도 없이 말했다.
"한이겸 부장님이세요?"
목소리가 전화와 달랐다. 전화에서는 차갑고 짧았는데 지금은 오히려 조심스러웠다. 이겸은 일어서지 않고 대답했다.
"맞습니다. 앉으세요."
그녀는 앉지 않았다. 배낭 끈을 두 손으로 쥔 채 서 있었다. 해진이 자리에서 일어서 의자를 빼주려는 동작을 시작했고, 이겸이 손으로 그것을 막았다. 해진이 멈췄다. 민가온이 그 짧은 교환을 보았다. 그녀의 눈이 이겸에서 해진으로, 다시 이겸으로 돌아왔다. 뭔가를 읽으려는 눈이었다.
"전화는 제가 먼저 했지만, 여기 온 건 제 판단입니다."
그녀가 말했다.
"전략실에서도 연락이 왔거든요. 그쪽이 하루 빨랐어요."
이겸은 말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대답이었다. 민가온도 알았는지 배낭 끈을 한 번 더 고쳐 쥐었다. 사무실 안에 프린터 돌아가는 소리가 잠깐 났다가 멈췄다. 이겸은 그 소리가 멈추는 타이밍을 들었다.
"어느 쪽이 먼저 접촉했느냐보다 제가 왜 여기 왔냐가 더 중요할 것 같아서요."
그녀가 계속했다.
"저는 제가 분석한 데이터가 어디에 쓰이는지 알고 싶어요. 전략실은 그걸 안 가르쳐줬어요. 감사팀은 제 이름을 어디서 꺼냈는지 안 가르쳐줬고요."
해진이 펜을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 이겸은 그 소리를 들었다. 민가온의 마지막 문장은 이겸에게만 향한 게 아니었다. 해진도 들었다. 그리고 해진은 자신이 그 이름을 꺼낸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겸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민가온보다 반 뼘쯤 컸고, 그 차이만큼의 거리를 두고 섰다.
"앉으세요.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이번에 민가온은 앉았다. 이겸도 앉았다. 해진은 자기 자리에 있었고, 두 사람 사이 약간 비껴난 각도에서 노트를 펼쳤다. 이겸은 해진 쪽을 보지 않았다. 해진은 펜을 들었지만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전략실에서 뭘 요청했습니까?"
민가온이 배낭 안쪽 지퍼를 열었다. 접힌 종이 한 장이 나왔다. 이겸은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녀가 테이블 위에 펼쳤다. 종이 가장자리가 한 번 접혔다 펴진 흔적이 있었다. 여러 번 꺼내 봤거나, 아니면 오는 길에 한 번 더 확인한 것이었다.
프로젝트 코드명 다섯 개. 그 아래 날짜 범위. 이겸은 그것을 읽으면서 표정을 고정했다. 두 번째 코드명 옆에 해진이 어제 비교표에 적어 넣은 미확인 프로젝트명과 같은 글자 배열이 있었다.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앞에 영문 두 글자가 달랐다. 하지만 뒤 숫자열이 일치했다. 이겸은 그 숫자열을 두 번 읽었다. 세 번은 읽지 않았다.
이겸은 그 종이를 덮지 않았다. 치우지도 않았다. 그대로 테이블 위에 두었다.
"전략실이 이 코드명들의 원본 데이터를 요청했나요?"
"삭제 이력이요."
민가온이 짧게 말했다.
"어느 기간 동안 어떤 파일이 지워졌는지. 저는 분석 업무로 들어간 거였는데 요청 범위가 계속 달라졌어요. 처음엔 계열사 용역 정산 검토였다가, 나중엔 특정 프로젝트 접근 기록으로 바뀌었고, 마지막엔 접근한 사람 이름까지 달라는 거였어요."
해진이 펜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겸은 그것도 들었다. 접근한 사람 이름. 그 말이 공기 안에 잠깐 머물렀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완료 보고서를 제출하기 전에 멈췄어요."
민가온이 이겸의 눈을 보며 말했다.
"그게 두 달 전입니다. 그리고 어젯밤 감사팀에서 제 이름으로 연락이 왔어요."
이겸은 어젯밤이라는 단어에서 멈추지 않았다. 표정도 바꾸지 않았다. 하지만 등 뒤 어딘가에서 작고 차가운 것이 조여드는 느낌이 있었다. 그 연락은 이겸이 한 게 아니었다. 서초구 번호도 아니었다. 이겸이 민가온에게 처음 닿은 건 그 번호였고, 어젯밤 이후로 추가 접촉은 없었다.
"어느 경로로 왔습니까?"
"내부 감사팀 공용 메일이요."
민가온이 배낭을 다시 앞으로 당겼다.
"발신자 이름은 윤해진으로 되어 있었어요."
사무실이 조용해졌다. 프린터도 멈춰 있었다. 해진이 천천히 펜을 내려놓았다. 이겸은 해진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돌리면 안 됐다. 지금 이 자리에서 해진을 보는 순간, 민가온은 이겸이 이 상황을 몰랐다는 것을 읽을 것이었다. 모른다는 것을 들키는 건 이 자리에서 가장 비싼 실수였다.
"확인하겠습니다."
이겸이 말했다.
"오늘 오신 건 잘하셨어요."
민가온은 그 말을 한 박자 받아 들었다. 신뢰를 결정한 게 아니라 일단 받아 둔 얼굴이었다. 그녀가 종이를 테이블에서 집어 들려다 이겸이 손을 그 위에 올렸다.
"두고 가십시오."
짧은 눈싸움이 있었다. 민가온의 손이 멈췄다가 천천히 물러났다. 종이는 테이블에 남았다. 그녀는 배낭 끈을 고쳐 메고 일어섰다. 이겸도 일어섰다. 해진은 앉은 채였다.
민가온이 유리문 쪽으로 걸어가다 멈췄다. 돌아보지는 않고 말했다.
"전략실이 원한 게 지운 파일이 아니라 지운 사람이었다면, 감사팀이 원하는 건 뭔가요?"
이겸은 대답하지 않았다. 민가온이 기다리지 않고 나갔다. 유리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이겸은 종이를 집어 들고 두 번 읽었다. 그러고는 서랍을 열었다. 해진의 비교표와 수첩이 있는 자리였다. 종이를 그 위에 올렸다. 서랍을 닫았다. 손이 서랍 손잡이에서 떨어지는 데 한 박자가 걸렸다.
"부장님."
해진의 목소리가 조용했다. 이겸은 서랍에서 손을 떼고 돌아봤다.
"제가 보낸 메일 아닌 거 알고 계시죠?"
이겸은 대답하지 않았다. 해진이 의자를 밀고 일어섰다. 얼굴에 화가 없었다. 그게 더 무거웠다.
"확인해도 됩니까?"
이번에는 이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진이 자기 컴퓨터로 걸어갔다. 이겸은 해진의 등을 보다가 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깥에는 늦은 봄 오전 햇살이 낮게 깔려 있었다. 민가온이 건물 밖으로 나오는 게 창문 아래로 보였다. 그녀는 나오자마자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잠깐 멈춰 서서 화면을 보다가 방향을 틀었다. 감사팀이 있는 건물 반대쪽이었다.
이겸은 그 방향을 기억했다. 태성그룹 전략실 별관 주차 출입구 쪽이었다. 선제수를 뒀다고 믿었던 자리에 이미 다른 손이 닿아 있었다. 그리고 그 손은 해진의 이름을 먼저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