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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1-5화]

열리지 않는 것들

작성: 2026.03.12 20:28 조회수: 48
창작물 안내
[AI 생성물] 본 소설의 내용과 표지는 인공지능(AI) 모델을 통해 기획 및 작성된 허구의 창작물입니다.
이 콘텐츠는 보험을 소재로 한 창작물이며 실제 상품 추천이나 보장 판단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민주는 새벽 다섯 시에 눈을 떴다. 알람이 울리기 전이었다. 세탁소를 연 지 십이 년, 이 시간이면 이미 스팀다리미 예열 버튼을 누르고 세제 통을 확인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손에 잡힌 건 다리미 손잡이가 아니라 종이였다. 어젯밤 준수가 식탁에 펼쳐 놓고 간 보험 증권 사본. 접힌 자국이 깊어 글자가 군데군데 끊겨 보였다.

민주는 누운 채 그 종이를 다시 펼쳤다. 계약자 이름, 보험 기간, 담보 항목. 읽는다고 다 이해되는 건 아니었지만, 모르는 채 덮어 두는 건 더 싫었다. 아니, 정확히는 무서웠다. 모르는 게 나중에 자기 잘못이 될까 봐.

부엌에서 주전자 끓는 소리가 났다. 준수가 먼저 일어난 모양이었다. 민주는 화들짝 놀라 종이를 쿠션 밑으로 밀어 넣었다. 아들 앞에서 보험 서류를 들여다보다 들키는 건 이상하게 체면이 상했다. 엄마가 모르는 얼굴을 보이는 일 같아서였다.

"일어났어?"

준수가 물었다.

"응. 너는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잠이 깼어. 커피 탈까?"

"아니, 보리차나 끓여. 속이 쓰려."

준수는 말없이 찬장을 열어 보리차 팩을 꺼냈다. 컵을 잡는 손등에 밴드가 붙어 있었다. 민주는 그걸 보고도 못 본 척했다. 물류창고 아르바이트에서 다쳤겠지. 준수도 엄마가 안다는 걸 알 것이다. 그래도 둘 다 묻지 않았다. 이 집에는 말하지 않는 게 싸움 대신이 되는 순간이 있었다.

보리차가 우러나는 동안 민주는 냉장고 문에 붙은 메모를 읽었다. 박명자가 어제 적어 준 것이었다.

'관리사무소 전화번호', '보험 접수는 사진부터', '날짜 보이게 정리'. 삐뚤빼뚤한 글씨였지만 할 일은 정확했다. 명자의 잔소리는 늘 이런 식이었다. 들을 때는 귀찮고, 지나고 나면 제일 쓸모 있었다.

아홉 시가 조금 넘어 민주는 세탁소 앞에 섰다. 셔터는 오늘도 내려가 있었다.

'누수 보수 공사 중, 일시 휴업' 이라고 적힌 안내문 한쪽이 바람에 들떠 달싹거렸다. 민주는 테이프를 꺼내 다시 눌러 붙였다. 손바닥으로 꾹 누르는데, 마치 자기 체면까지 같이 붙이는 기분이 들었다.

옆 꽃집 윤 사장이 물통을 들고 나오다 말했다.

"오늘도 못 여는 거예요?"

"보수 끝나야죠."

"아이고, 이 동네에서 민주 씨 가게 문 닫힌 거 처음 보는 것 같은데. 다들 물어봐요."

민주는 웃는 척했다.

"저도 처음이에요."

그 말이 생각보다 크게 들렸다. 처음. 그래서 더 서툴렀다.

주머니 속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단골 손님이었다. 결혼식 정장을 맡겨야 하는데 언제 문을 여느냐는 문자였다. 그 아래로는 요양원 이불 빨래, 맡긴 옷을 찾으러 가도 되느냐는 문의, 급한 와이셔츠 가능하냐는 메시지가 줄줄이 쌓여 있었다. 민주는 화면만 내려다봤다. 답장을 해야 하는데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지금은 안 됩니다.'

그 말을 십이 년 동안 한 적이 거의 없었다. 못 한다는 말은 늘 남의 입에서만 듣는 줄 알았다.

한참을 서 있던 민주는 결국 가장 오래된 문자창을 눌렀다. 몇 번 지웠다가 다시 썼다.

'죄송합니다. 누수 공사로 이틀째 문을 못 열고 있습니다. 맡기실 옷은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보내기 버튼을 누르는 순간 손끝이 떨렸다. 겨우 문자 한 통인데도, 셔터를 한 번 더 내리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잠시 뒤 답장이 왔다.

'아이고, 사람 안 다친 게 어디예요. 천천히 하세요.'

민주는 그 짧은 문장을 한 번 더 읽었다. 이상하게 눈이 시큰했다. 세탁물을 맡기는 손님이 아니라, 자기 사정을 알아주는 사람처럼 느껴져서였다.

점심 무렵 명자가 김밥 두 줄과 종이봉투를 들고 왔다. 들어오자마자 셔터 앞 플라스틱 의자에 털썩 앉더니 말했다.

"밥부터 먹어. 이런 날일수록 먹어야 머리가 돌아가."

"언니는 꼭 이런 날 더 잘 먹어요."

"내가 안 먹으면 누가 정신 차리냐."

명자는 종이봉투를 툭 내밀었다. 안에는 상가 관리 규약 사본, 건물 종합보험 약관 요약본, 관리사무소에서 받아 온 접수 메모가 들어 있었다. 민주는 김밥보다 먼저 서류를 집어 들었다.

"이걸 다 어디서 구했어요?"

"관리사무소. 두 번 갔어. 처음엔 없다고 하더니, 내가 그냥 안 나왔지."

"또 싸웠죠?"

"싸운 게 아니라 목소리가 좀 커진 거야."

민주는 피식 웃었다가 곧 표정을 굳혔다. 약관 요약본 한가운데, '건물 내부 급배수 설비로 인한 수손 피해' 항목에 형광펜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그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조건과 면책이 빼곡했다.

명자가 김밥을 씹으며 말했다.

"좋은 소식만 있는 건 아니야. 건물 보험이랑 네 가게 보험이랑 어디까지 나뉘는지 봐야 해. 집기 손해가 따로인지, 영업 못 한 손해는 되는지, 그것도 다를 수 있대."

"그럼 결국 안 될 수도 있다는 거네요?"

민주의 목소리가 자기도 모르게 날카로워졌다. 명자는 바로 받아치지 않았다. 물 한 모금을 마시고 나서야 조용히 말했다.

"안 될 수도 있지. 그런데 그래서 더 기록해야 돼. 안 된다는 말 듣더라도, 뭘 근거로 안 된다는 건지는 알아야 하잖아."

그 말에 민주는 입을 다물었다. 화를 낼 데가 없을 때 사람은 제일 가까운 사람한테 목소리를 높인다. 방금 자기가 그랬다는 걸 알아차리자 더 민망했다.

"미안해요, 언니."

"미안한 건 나중에 하고, 사진부터 정리해. 날짜 보이게. 관리사무소 접수 시간도 적어 놓고. 보험이 되든 안 되든 기록은 남겨야 돼."

보험이 되든 안 되든.

확실한 답은 아니었지만, 그래서 오히려 붙잡을 수 있는 말 같았다. 민주는 그 자리에서 휴대전화 사진첩을 열었다. 젖은 장부, 천장 얼룩, 바닥에 떨어지던 물방울, 비닐을 씌워 둔 세탁물. 날짜순으로 앨범을 따로 만들고, 메모장에 시간과 상황을 적었다. 손은 바빴고, 마음은 조금씩 제자리를 찾았다. 적어도 지금은 멍하니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해 질 무렵 집에 돌아오니 준수가 식탁에 노트북을 펴 놓고 있었다. 화면에는 '상가 누수 피해 보상 절차', '휴업 손해 보상', '보험 특약 확인 방법' 같은 검색어가 줄줄이 떠 있었다. 준수는 엄마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자마자 황급히 창을 닫았다.

"왜 꺼. 계속 봐."

준수는 머쓱한 얼굴로 의자를 당겼다.

"그냥… 내가 괜히 아는 척하는 것 같아서."

"아는 척이라도 해. 지금은 그게 낫다."

민주는 맞은편에 앉았다. 잠깐 정적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건 준수였다.

"엄마, 그 보험 증권 사본. 아버지 서류 사이에서 찾았어."

민주의 손끝이 미세하게 굳었다. 아버지 서류. 이혼한 지 사 년이 지났는데도 그 서랍은 아직 그대로였다. 버리지도, 정리하지도 못한 종이들이 맨 아래 눌려 있었다. 게을러서인지, 차마 손을 못 대서인지, 이제는 본인도 구분이 안 갔다.

"엄마."

준수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특약란이 비어 있더라. 기본만 들어 있는 것 같아. 누수 같은 게 되는 건지 모르겠어."

민주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모른다는 말이 입안에서 무겁게 굴렀다. 엄마가 모른다고 말하면, 그 순간부터는 진짜 모르는 집이 되는 것 같아서.

그래도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나도 몰라. 그런데 내일 알아볼 거야. 보험사에도 전화하고, 관리사무소 접수도 다시 확인하고."

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짧은 끄덕임이 이상하게 민주를 더 다급하게 만들었다. 아들이 안심한 게 아니라, 엄마가 하겠다고 했으니 기다려 보겠다는 얼굴이어서였다. 더 미루면 안 된다는 뜻 같았다.

준수는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컵에 따르며 말했다.

"아, 그리고 셔터 앞에 오늘도 세탁물 걸어 놓고 간 사람 있었어. 비닐에 싸서. 메모 붙어 있었는데 '천천히 하세요'라고."

"누군데?"

"이름은 없었어. 근데 비닐 묶는 거 보니까 302호 할머니 같아. 그분 맨날 그렇게 묶잖아."

민주는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그러고는 금세 눈을 내리깔았다. 문을 닫아도 사람 마음까지 닫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 오늘은 유난히 크게 들어왔다.

밤 열한 시가 가까워졌을 때 민주는 냉장고 문에 새 메모를 붙였다.

'내일 할 일 — 피해 사진 정리본 보내기, 보험사 연락, 관리사무소 접수 확인.'

볼펜을 내려놓으려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준수 밴드 갈아 붙이기.'

뒤돌아서는 순간, 소파 위 쿠션 밑에서 보험 증권 사본이 반쯤 삐져나와 있는 게 보였다. 아침에 분명 깊숙이 밀어 넣었는데 누군가 다시 꺼내 본 흔적이었다. 민주는 잠시 서 있다가 그 종이를 집어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더는 숨기지 않기로 했다. 숨긴다고 없는 일이 되는 건 아니었다.

그때 사본 맨 아래에 연필로 작게 동그라미 쳐진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준수 글씨였다.

'계약자 변경 이력 — 확인 필요.'

민주는 그 문장을 한참 바라봤다. 누수 보상만 물어보면 될 줄 알았던 전화 한 통이, 전혀 다른 이야기부터 꺼내게 만들지도 몰랐다. 내일 보험사에서 제일 먼저 묻는 말이 피해 날짜가 아니라 계약자 이름이라면, 그때는 무엇부터 설명해야 할까. 식탁 위 종이가 바람도 없는데 가볍게 들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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