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증언석에 앉는 날
남겨 놓을 쪽
세희는 수첩의 한 쪽을 보여 주기 전에 그 옆 쪽을 손바닥으로 덮었다.
세희는 수첩의 한 쪽을 보여 주기 전에 그 옆 쪽을 손바닥으로 덮었다.
“엄마 병원 가는 날을 바꿨다고 적은 거예요. 이건 사건하고 상관없습니다.”
가람은 읽지 않았다고 답했다. 세희는 읽었어도 그 말을 듣고 싶었을 거라며 손을 뗐다. 수첩에는 회사 일정과 집안일, 장을 볼 목록이 같은 크기의 글씨로 들어 있었다. 법정에 필요한 날짜만 골라 쓰기에는 사람의 하루가 너무 촘촘하게 붙어 있었다.
오늘은 세희가 먼저 사무실로 왔다. 태곤은 현장 업무를 확인하러 가서 오후에 합류하기로 했다. 가람은 원본을 펼칠 자리를 만들고, 필요한 쪽을 세희가 직접 정하도록 기다렸다. 그녀는 여러 번 접어 모서리가 닳은 페이지를 찾았다.
두 번째 경보 회의라고 적힌 날이었다. 회의실 번호와 시작 시간은 있었고, 끝난 시간은 없었다. 아래에는 점검 중이라는 말을 듣고 더 묻지 못했다는 짧은 문장이 있었다. 세희는 그날 자기 목소리가 작았다는 것은 기억하지만, 메모에 없는 다른 사람의 말까지 정확히 되풀이할 자신은 없다고 했다.
“아무 말 안 했다는 것하고, 말이 작았다는 것은 다르죠.”
가람이 물었다. 세희는 그렇다고 답했다. 시작할 때 현재 경보를 다시 봐야 한다는 얘기는 했고, 상급자가 이미 점검 중이라고 말한 뒤에 추가 질문을 하지 못했다. 그녀가 침묵했다고 부른 것은 그 뒤의 시간이었다. 가람은 그 설명을 그대로 남겼다.
수첩 한 줄만 떼면 회의 내내 아무 말도 안 했다고 읽힐 수 있었다. 반대로 처음 한 질문만 적으면 끝까지 강하게 요구한 사람으로 보일 수 있었다. 세희는 어느 쪽으로도 자기를 고치지 말아 달라고 했다. 가람은 새로 쓰는 사본의 문장을 그녀가 먼저 확인하게 했다.
회사의 회의실 예약 기록은 같은 날짜와 시간에 맞았다. 예약자가 누구였고 참석자가 누구였는지는 다른 자료였다. 가람은 예약됐으니 명단의 모두가 끝까지 앉아 있었다고 단정하지 않았다. 세희가 기억하는 사람들과 제출된 참석 자료를 나란히 놓았다.
이름 두 개가 달랐다. 한 사람은 앞부분에 잠깐 왔다 나갔다고 세희가 기억했다. 다른 사람은 명단에는 없지만 문을 열고 들어와 보고를 받아 갔다. 가람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 물었다. 세희는 직책은 기억하지만 이름은 확인해야 한다고 했다.
그때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세희는 받지 않으려다가 화면을 보고 가람에게 잠깐 기다려 달라고 했다. 수첩에서 손을 거두지 않은 채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는 오늘 약을 받으러 가는 길에 집에 들렀는데 왜 아무도 없느냐고 물었다.
세희는 사무실에 나와 있다고 했다. 회사에 있느냐는 질문에 대답이 늦어졌다. 어머니는 회사 밖이어도 일을 하면 사무실이지 않느냐며 묻지 않았다. 냉장고에 반찬을 넣어 두려는데 오래 안 먹을 것 같아 가져갈지 묻고 있었다.
“먹을 거야. 다 놓고 가.”
세희가 급하게 답했다. 어머니는 웃으며 서두르지 말라고 했다. 오늘 저녁 늦으면 내일 먹어도 되는 것들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세희는 전화를 끊고 수첩 옆의 손을 내려다봤다. 병원 날짜를 바꾼 일을 어머니는 이제 꺼내지 않았다.
가람은 잠시 자료를 덮을지 물었다. 세희는 조금 쉬었다 하겠다고 했다. 가람이 물을 받으러 가는 동안 그녀는 자기 메모의 글씨를 보았다. 회사에서는 누군가가 못 읽겠다고 했던 글씨였다. 어머니의 약을 적은 줄은 자기가 읽을 수 있었다.
점심을 먹으러 나갔을 때 세희는 가람에게 회의 때 질문을 못 한 이유를 말하기 시작했다. 그날만 유독 몸이 피곤해서는 아니었다. 이미 점검 중이라는 설명을 다시 묻는 순간, 사람들 앞에서 담당자의 말을 못 믿는 사람으로 보일까 두려웠다고 했다.
“틀렸으면 제가 너무 시끄러웠던 사람이 되는 거잖아요.”
“그렇게 보이는 게 무서웠습니까?”
세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크게 틀리는 사람보다 여러 사람과 작게 맞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뒤 경보가 다시 확인됐을 때는 둘 중 하나를 고르는 문제가 아니었다. 보고를 다시 보내야 했다. 그녀는 다음 날 쓴 메모를 보여 주겠다고 했다.
가람은 그 메모가 그녀를 곧바로 용서받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말을 하려다가 멈췄다. 세희는 이미 자기 책임을 없애려고만 말하지 않고 있었다. 대신 그다음 날 무엇을 확인하고 누구에게 다시 물었는지 구체적으로 들었다.
식당에서는 두 사람에게 반찬이 하나씩 더 나왔다. 세희는 음식값이 다른 사람 손해를 조사하는 비용에 들어가는지 농담했다. 가람은 오늘은 각자 내자고 했다. 그녀가 전날 회사 비용표를 계속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둘은 웃고 계산대에서 자기 몫을 냈다.
사무실로 돌아오니 태곤이 먼저 와 있었다. 그는 세희가 넘긴 현장 업무의 설명이 새 담당자에게 불충분하게 전달됐다고 했다. 현재 확인할 위치와 격리 상태를 알려 주지 않고 외부 대응 때문에 나눴다는 말만 내려온 것이었다. 태곤은 인계 내용을 먼저 보충하게 요청했다.
세희가 바로 회사에 전화를 걸려 했다. 태곤이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녀가 다시 모든 설명을 혼자 해 주면 업무를 나눈 회사가 해야 할 일을 또 세희에게 돌려줄 수 있었다. 그는 세희의 설명이 필요한 부분과 회사가 내려야 할 배정표를 나누자고 했다.
세희는 전화를 내려놓았다. 자기 일을 지키려는 마음이 동료가 실수하지 않도록 모든 일을 대신 설명하려는 마음과 붙어 있었다. 둘이 같은 일이 아닌 것을 알아채려면 잠깐 멈추는 시간이 필요했다. 가람은 회사에 확인할 항목을 정리해 보냈다.
태곤은 수첩을 보는 자리에 들어가도 되는지 물었다. 세희는 사건 관련 부분만 보여 주겠다고 했다. 어머니 병원 날짜나 다른 동료의 사적인 말은 펼치지 않았다. 태곤은 오늘 보지 않은 부분이 있다고 적어도 상관없다고 했다. 모든 페이지를 봐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가람은 선택한 쪽의 사본을 만들면서 가린 자리의 이유를 따로 표시했다. 원본의 순서와 페이지 번호는 유지했다. 회사 쪽에서 필요한 원본 확인을 요구하면 절차를 정해 다툴 수 있도록, 지금 사라진 줄이 아니라 열람을 제한한 줄임을 남겼다.
수첩에는 다음 날 보낸 보고 제목이 적혀 있었다. 발송 자료와 대조할 수 있었다. 그 옆에는 전날 회의에서 더 묻지 못한 질문이 세 개 있었다. 첫 질문은 이미 점검한 것이 정확히 어느 부분이냐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확인이 끝날 때까지 해당 공정을 어떻게 관리하느냐는 것이었다.
마지막 질문은 누구에게 다시 알려야 하느냐였다. 세희는 그 질문을 적으면서 자기에게도 화가 났다고 했다. 회사 안에서 일하는 자신이 다음 보고를 누구에게 해야 할지 다시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태곤은 자기 교대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고 말했다.
가람은 두 사람에게 같은 일이라고 증언을 맞추자고 하지 않았다. 세희의 보고는 세희의 기록으로, 태곤이 본 일은 태곤의 교대 기록으로 남길 수 있었다. 두 경험이 닮았다는 이유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그날을 설명해 주게 만들 수는 없었다.
오후에 회사에서 회의 참석 자료를 더 보내 왔다. 잠시 들어왔다 나간 사람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세희는 그 이름을 보자 얼굴을 찌푸렸다. 그 사람이 했다고 기억한 말 하나를 다른 사람이 했을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가람은 수정할 수 있다고 답했다. 오늘 이름을 확정한 뒤에도 기억의 근거는 더 확인해야 했다. 세희는 처음에 모른다고 말했으면 좋았을 텐데 이미 어렴풋한 기억으로 사람을 떠올렸다며 자책했다. 태곤은 지금 고친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회의실 예약이 맞는 것, 참석자가 확인된 것, 그 사람이 어떤 말을 했는지는 세 칸이었다. 가람은 마지막 칸에 확인 중이라고 남겼다. 세희는 그 빈칸을 보고 조금 편해졌다. 모르는 것을 써 넣지 않는 것만으로도 자기가 말할 사실을 지킬 수 있었다.
해가 기울 무렵 만석에게 연락이 왔다. 내일 심리에 주민 몇 명이 더 올 예정이었다. 세희가 증언하는 날인지 묻는 사람이 있었다고 했다. 가람은 아직 증언 일정과 열람 범위를 정리 중이라고 답했다. 준비하지 않은 사람을 주민들 앞에 세워 즉석 질문을 받게 하지는 않겠다고 했다.
만석은 오늘 확인한 만큼만 말하겠다고 했다. 대신 세희가 자신이 한 일을 제대로 설명하는 날을 기다린다고 덧붙였다. 태곤은 그 전화를 옆에서 들었다. 회사 쪽 사람들도 같은 말을 다른 뜻으로 하고 있다고 했다. 누구는 해명이라고 부르고 누구는 고백이라고 부를 수 있었다.
세희는 둘 다 자기 말을 먼저 정해 놓은 이름 같다고 했다. 자신은 알고 있는 것과 하지 못한 것을 말하려는 것뿐이었다. 가람은 제출하는 설명의 제목에 해명이나 고백을 넣지 않았다. 경고 보고 경위라고 적었다. 세희가 그 제목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가기 전 그녀는 수첩을 다시 가방 안에 넣었다. 갈색 봉투 옆이었다. 가람은 자기 사본을 잠금 보관함에 넣고 열람한 범위를 기록했다. 오늘 사건 바깥의 페이지를 읽지 않은 것은 단순한 예의가 아니라 자료를 어떻게 다룰지 함께 정한 약속이었다.
세희는 정류장에서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반찬을 넣고 잘 돌아갔느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뚜껑이 잘 안 닫히는 통 하나를 제일 위에 놓았다며 먼저 먹으라고 했다. 세희는 오늘 혼자 할 말을 다른 사람들이 끝까지 들어 줬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무슨 말이었느냐고 묻지 않았다. 끝까지 들으면 사람이 배고파지지 않느냐며 밥부터 먹으라고 했다. 세희는 웃었다. 버스가 들어왔고, 그녀는 가방을 앞으로 당겨 안고 올라탔다. 그 안에는 회사가 확인해야 할 종이와 회사가 읽지 않아도 되는 하루가 함께 있었다.
가람은 다음 심리의 질문지를 폈다. 사람의 책임을 나누려면 회사의 부서표보다 더 많은 것이 필요했다. 누가 보고를 받았고 누가 멈출 수 있었으며, 누가 다시 물을 수 있었는지. 그 질문 가운데에는 세희가 스스로 가져온 불편한 침묵도 있었다.
그는 마지막 질문에 표시를 했다. 회의에서 멈춘 목소리는 그다음 날 어디로 갔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