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판 위 다섯 센티
하루를 넘기는 돌
라온이 합의서 초안을 받은 날, 태규는 작업대에 작은 플라스틱 판을 놓고 있었다. 교육용 부품이 굴러가지 않게 가장자리가 낮게 올라간 판이었다. 태규는 견적부터 설명하려다가 라온의 손에 들린 종이를 보고 말을 멈췄다.
라온이 합의서 초안을 받은 날, 태규는 작업대에 작은 플라스틱 판을 놓고 있었다. 교육용 부품이 굴러가지 않게 가장자리가 낮게 올라간 판이었다. 태규는 견적부터 설명하려다가 라온의 손에 들린 종이를 보고 말을 멈췄다.
“오늘 보는 날이었어?”
“오늘 받는 날. 바로 답은 안 하기로 했어.”
라온은 종이를 가방에 넣고 판을 만졌다. 모서리가 날카롭지 않았고 자기 손이 닿는 범위 안에 부품을 모을 수 있었다. 주문한 고객 물건이 아니라 태규가 시범으로 가져온 공구받침이었다. 라온은 용수도 하나 쓰면 좋겠다고 말했다. 태규는 수납함 높이와 판 크기를 먼저 재 보라고 했다.
라온은 길이를 쟀다. 숫자를 적으려는데 합의서의 금액이 자꾸 먼저 떠올랐다. 자기 손끝은 작은 판 위에 있고 머리는 아직 종이에 붙어 있었다. 그는 한 번 잘못 적은 길이를 지우고 다시 쟀다. 태규가 자를 반대편에서 잡았다.
“오늘 두 번 재자. 내 판까지 억울해지기 전에.”
라온은 웃었다. 웃고 나니 수치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판의 모서리에 부품 네 개를 놓고 집어 보았다. 가장 작은 와셔는 집게가 닿는 쪽에 모았다. 태규는 손을 대지 않고 보고만 있었다. 네 개가 떨어지지 않고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 라온은 사진을 찍어 용수에게 보냈다.
그날 오후 승후와 함께 초안을 읽었다. 책임비율, 휴업 손해, 지금까지 확정된 치료비, 열두 주 재활과 관련한 범위가 구분돼 있었다. 라온은 숫자를 따라 읽다가 교육비 문장에서 멈췄다. 자신이 시작한 직업교육의 자부담까지 같은 항목으로 읽히는 대목이 있었다.
“이걸 내 수업비까지 다 주는 말로 읽으면 안 되겠는데.”
승후도 표시했다. 설명받은 재활비와 라온이 별도로 부담할 교육비를 문구에서 분명히 나눠 달라고 요청할 부분이었다. 예정된 진료가 어디까지 포함되는지, 아직 일정이 잡히지 않은 부분을 어떻게 보는지도 적었다. 라온은 용수와 실습한 케이블을 떠올렸다. 같은 지름인 부품 두 개를 섞어 놓으면 조립할 때 막혔다.
승후가 오늘 사인할 필요는 없다고 하자 라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는 자기가 요청한 시간이었다. 그는 종이를 덮기 전에 마지막으로 자기 이름이 들어갈 칸을 봤다. 사고 뒤 자기 이름이 가장 많이 쓰인 곳은 병원과 비용 서류였는데, 요즘은 교육 출석표에도 적혔다. 빈 서명칸을 보는 감각이 전과 조금 달랐다.
운전자에게서는 짧은 메시지가 왔다. 초안을 전달받았으며 추가 질문에 답할 수 있도록 기다리겠다는 내용이었다. 라온은 그 메시지를 읽고 바로 답장을 쓰지 않았다. 종이의 질문을 먼저 정리해야 했다. 상대가 기다리는 동안 자기가 오늘 할 일을 포기할 필요는 없었다.
일요일 아침 단비는 컬링장 앞에서 주먹밥을 먹고 있었다. 미란이 장비함을 열기 전에 다 먹으라고 하자 마지막 조각을 급하게 넣었다가 목이 막혔다. 혜주가 물병을 내밀었다. 진수는 단비의 스틱 가방을 받아 놓고 웃었다.
“첫 돌부터 세게 치고 싶을 때마다 주먹밥 생각해.”
“다 먹었는데 왜 계속 방해해요.”
단비는 물을 마시고 볼을 눌렀다. 라온은 오늘 한동안 초안을 떠올릴 것 같다고 말했다. 미란은 팔 상태를 묻고 첫 목표를 짧게 정했다. 여든 분의 모의엔드 안에 오늘 모든 문제를 넣지 말고, 첫 두 투구부터 하자는 말이었다.
그날 배치는 마지막 두 돌을 남긴 상황으로 시작했다. 미란이 상대 역할 돌을 하우스 가까이에 놓았다. 라온은 이미 던진 첫 돌 위치를 가정한 표식을 보고, 자기 두 번째 투구를 맡았다. 진수는 바깥 가드 대신 앞쪽의 좁은 틈을 불렀다. 라온이 다듬던 부품 사이보다 넓은 틈이지만, 빙판에서는 멀고 작았다.
라온은 목표를 복창했다. 손은 종이의 서명칸으로 돌아가려 했고, 그는 시선을 하우스 앞의 점에 다시 붙였다. 스틱이 스톤을 밀었다. 호그라인 전에 돌을 놓은 뒤 손을 멈췄다. 스톤은 틈을 지나지 못하고 앞돌을 약하게 건드렸다.
앞돌이 옆으로 조금 이동했다. 막혔던 길이 아주 조금 넓어졌다. 라온은 실패한 투구를 성공이라 우기지 않았다. 혜주가 목표와 실제 위치를 적었다. 진수는 이제 열린 길을 보며 혜주에게 바깥 드로를 불렀다.
혜주의 돌은 가드 밖으로 나왔다가 안으로 굽었다. 라온은 스톤이 자기 돌을 스치지 않을지 끝까지 보았다. 작은 간격이 남았다. 혜주가 팔을 내려놓고 단비를 봤다. 단비는 상대 돌을 바로 치우고 싶은 얼굴이었다. 진수는 그녀에게 두 선택을 설명했다. 좁은 직선 히트와 방금 열린 바깥 길을 쓰는 드로였다.
단비가 하우스를 오래 보았다.
“드로. 오늘은 저 길로 들어가 볼래요.”
그녀가 선택했다. 힘을 덜 쓰는 돌은 겁이 나는 돌이기도 했다. 세게 밀면 자기 손에서 끝나는 느낌이 들지만, 느리게 간 돌은 긴 시간 빙판에 맡겨야 했다. 단비는 한 번 숨을 고르고 밀었다.
스톤이 바깥을 탔다. 라온의 앞돌 옆으로 돌아갈 때 혜주가 입을 가렸다. 돌은 상대 역할 돌 뒤쪽으로 들어갔다. 가장 가까운 돌보다 조금 멀었다. 단비는 실망한 표정을 짓다가 진수가 스틱을 든 것을 보았다. 마지막 한 돌이 남아 있었다.
진수는 단비의 돌에 붙여 상대가 보던 직선을 막는 목표를 택했다. 자기 마지막 돌로 한 점을 곧장 가져오려면 힘이 크게 달라져야 했다. 그는 놓는 순간을 한 번 연습하고 의자를 다시 정지시켰다. 스톤이 움직였다. 조금 빠르게 들어왔지만 단비의 돌을 스치며 멈췄다.
미란이 상대 역할의 마지막 응수를 설명했다. 가운데로 바로 들어올 길이 막혀 바깥을 돌아야 했다. 그녀의 돌은 돌아오다가 가드에 닿았다. 모의 배치에서 진수의 돌 하나가 가까운 자리로 남았다. 단비가 짧게 소리를 질렀다.
“내 돌이 안 가까웠는데도 쓸모가 있었네!”
혜주가 웃었다. “그 돌 없었으면 스킵이 그냥 허공에 붙였겠죠.”
진수는 허공에 붙이는 기술은 아직 못 배웠다며 스틱을 내려놓았다. 라온은 자신이 틈을 못 지난 앞돌까지 다시 보았다. 누가 한 번 잘 던져서 얻은 결과가 아니었다. 바뀐 자리마다 다음 사람이 손을 보탰다.
다음 모의 배치는 점수가 뒤진 마지막 상황이었다. 상대 역할 돌이 깊이 들어가 있었다. 단비는 이제부터 모든 돌을 붙이기만 할 거냐고 물었다. 진수는 이번에는 공격해야 한다고 말했다. 라온에게 짧은 가드를 요청하면서도, 실패하면 다음 돌을 어디로 보낼지 먼저 정했다.
라온의 가드는 목표보다 길었다. 진수는 미리 고른 바깥 길로 옮겼다. 혜주의 돌이 그 길 끝에 멈췄다. 단비는 이번에는 히트를 받았다. 스틱을 세우는 얼굴에 아까와 다른 신이 났다. 그녀의 돌이 상대 역할 돌을 밀어냈지만 자기도 뒤로 흘렀다.
단비는 양손을 번쩍 들었다가 바로 내렸다. 치운 것은 맞는데 자기 돌도 남지 않았다. 미란은 그 동작을 보고 웃었다. 혜주는 둘 다 나간 위치를 표시했다. 진수의 마지막 드로는 짧게 멈췄다. 이번 배치는 이기지 못했다.
단비가 아쉬워하며 말했다.
“첫 판에 드로 했다고 두 번째도 잘해지는 건 아니네요.”
“그래서 두 번째 판을 했지.”
진수가 자기 짧은 돌을 가리켰다. 라온은 그 말에 웃었다. 오늘의 첫 한 점을 가지고 나머지 시간까지 다 잘했다는 표정을 하지 않아도 됐다. 미란은 남은 시간에 각자 한 번씩 목표를 바꿔 놓게 했다. 평소 다른 사람이 불러 주던 자리를 직접 말하자 생각보다 설명이 길어졌다.
혜주가 단비에게 ‘조금 옆’이라고 했다. 단비는 조금이 몇 센티냐며 눈을 가늘게 떴다. 혜주가 하우스 쪽으로 가 목표를 다시 가리키자 모두 웃었다. 진수는 스킵 자리에서 매번 듣는 말을 이제 다른 사람도 해본다며 좋아했다. 라온은 서로의 목소리를 따라가면서 종이의 문장을 잠깐 잊었다.
여든 분이 끝난 뒤 그는 가방에서 초안을 꺼냈다. 얼음 옆에서 서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집에 가서 다시 읽을 표시를 찾아본 것이었다. 혜주가 무슨 종이냐고 묻자 라온은 설명했다. 단비가 오늘 바로 답할 거냐고 했다.
“수정할 말 보내고, 내일 다시 볼 거야.”
“그럼 오늘은 밥부터요.”
단비가 말했다. 진수는 주먹밥을 급하게 먹지 않는 조건이라며 그녀를 봤다. 이번에는 단비도 웃었다. 네 사람은 장비를 넣고 가까운 식당으로 갔다. 라온은 가방을 몸 옆에 두고 따뜻한 국을 먹었다. 질문은 이미 적혀 있었다. 오늘 붙였던 두 돌의 작은 접촉음도 손에 남아 있었다.
식당에서 단비는 주먹밥 대신 비빔밥을 골랐다. 계란을 가장 나중에 먹겠다며 위에 따로 올려 두었는데, 숟가락으로 섞다가 노른자를 터뜨렸다. 혜주가 그릇을 보고 웃자 단비는 이제 전부 같은 맛이라고 선언했다. 라온은 자기 계란 반쪽을 내밀었다. 단비는 사양하다가 아주 작은 조각만 받았다. 진수가 자기 것도 내밀자 그녀는 오늘 자기가 돌을 붙여 줬다고 식사까지 붙일 필요는 없다고 했다. 웃음이 식탁에서 한 바퀴 돌았다. 라온은 그릇을 비운 뒤 냅킨에 방금 성공한 모의 배치의 간단한 그림을 그렸다. 단비가 계란 얼룩 옆에 자기 돌을 동그라미로 표시했다.
집에 돌아와 승후에게 수정 요청을 보냈다. 교육비와 재활비의 구분, 예정 진료의 범위, 표현을 다시 확인할 줄을 세 가지로 정리했다. 그는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교육용 부품함을 열었다. 내일 용수와 맞출 지그를 생각하며 와셔를 뒤집었다. 같은 크기의 부품도 두께가 달랐다. 이번에는 첫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