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증언석에 앉는 날
전화가 늦은 밤
세희는 경보를 받은 밤의 이야기를 하면서 핸드폰을 뒤집어 놓았다.
세희는 경보를 받은 밤의 이야기를 하면서 핸드폰을 뒤집어 놓았다.
“지금 들어 오는 전화까지 그날 것으로 보지 않았으면 해요.”
가람은 녹음을 해도 되는지 먼저 물었다. 세희는 오늘은 하지 말자고 했다. 어떤 자료를 제출할지 정하기 전, 자기 기억이 어디까지인지부터 말하고 싶다고 했다. 가람은 메모장에 날짜만 쓰고 펜을 내려놓았다.
두 사람은 회관이 아니라 버스정류장 근처의 작은 찻집에서 만났다. 세희가 골랐다. 회사 정문도 마을 회관도 아닌 자리였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이 그녀를 알아볼 때마다 시선이 잠깐 흔들렸다. 그 사실을 피하려고 더 안쪽으로 자리를 옮기지는 않았다.
처음 경보를 보고한 시각은 저장된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세희는 당직 설비담당에게 연락했고, 센서 상태를 같이 확인하자는 답을 들었다. 표시값이 튀었다가 내려간 적이 있어 담당자가 오류를 의심한 것도 기억했다. 그 답을 들었다고 자신의 걱정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다시 올라가면 연락하라고 했어요. 그래서 기다렸어요. 기다리라는 말은 아니었는데, 저는 그렇게 한 것 같아요.”
가람은 그날 세희가 설비를 멈출 권한이 있었는지 물었다. 세희는 측정기를 확인하고 보고할 권한은 있었지만 공정 전체를 멈추라는 지시를 자기 이름으로 낼 수는 없었다고 했다. 다만 다시 연락할 수는 있었다. 그녀는 할 수 없었던 일과 하지 않은 일을 구분하려고 애썼다.
가람은 그 차이를 적었다. 세희는 메모장을 보지 않았다. 종이에 자기 말이 들어가는 순간, 어디선가 다른 뜻으로 읽힐까 봐 걱정된다고 했다. 가람은 적은 내용을 보여 줬다. 세희는 기다렸다라는 말 뒤에 그날 밤이라는 범위를 붙여 달라고 했다.
다음 날 아침에는 점검 요청이 있었다. 확인된 부분은 점검 요청이 발송됐다는 데까지였다. 설비를 확인하러 온 사람이 어떤 범위까지 봤는지는 작업내역을 더 받아야 했다. 세희는 결국 센서가 멀쩡했으니 누군가 일부러 지연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날 찾지 못한 오류가 다른 날 없었다는 뜻도 아니죠.”
그녀가 먼저 말했다. 가람은 이제 이 문장을 자기 입으로만 되풀이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는 사람이 오히려 책임을 가장 많이 떠안을 때도 있었다. 세희의 손은 찻잔을 감싸고 있었고, 차는 이미 식어 있었다.
회사에서 보험사에 통지한 시각은 그보다 늦었다. 채린이 확인한 접수 목록에도 같은 시각이 있었다. 가람은 통지 경로가 그것 하나였는지 추가로 물어 둔 상태였다. 지금 자료에 안 보인다는 이유로 다른 연락이 전혀 없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었다.
“그 사이에 밤이 하나 더 있었어요.”
세희가 말했다. “저한테는 제일 길었던 밤인데, 회사 설명에서는 점검 중이라는 세 글자로 끝나더라고요.”
가람은 그 밤에 어떤 연락을 더 했는지 물었다. 세희는 혼자 기억으로 모두 답하지 않겠다며 휴대전화를 돌려놓았다. 당시에 남겨 둔 보고와 통화 내역이 있었다. 사적인 대화까지 내놓아야 하느냐고 물었다. 가람은 사건에 필요한 항목을 먼저 정하고 다른 부분은 분리하자고 했다.
그때 태곤이 찻집 문을 열었다. 세희와 약속한 것은 아니었다. 가람에게 교대 기록을 전달하려고 왔다가 두 사람이 같이 있는 걸 보고 멈췄다. 세희는 앉으라고 했고, 가람은 오늘 세희가 말한 내용을 허락 없이 태곤에게 요약하지 않았다.
태곤은 그날 야간 근무자들이 지금 서로 기억을 맞추고 있다고 했다. 세희가 바로 고개를 들었다. 서로가 들은 일을 한 이야기로 만들지 말아 달라고 했다. 태곤은 그런 뜻이 아니었다며 한 사람이 회사 눈치를 보고 다른 사람이 마을 눈치를 보는 상태부터 걱정된다고 했다.
“그날 아무것도 못 봤다고 말할 수 있는 자리도 있어야죠.”
태곤의 말에 세희가 입을 다물었다. 가람은 교대자별로 직접 본 것과 전달받은 말을 따로 적자고 했다. 회사 계통에서 일한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경영 결재까지 아는 사람처럼 부를 수는 없었다. 태곤은 자신의 의견도 그날 현장의 기록과 구분해 제출하겠다고 했다.
세희는 잠시 창밖을 봤다. 비가 그친 자리에 버스가 멈췄고 학생들이 우르르 내렸다. 그녀는 자신도 남들이 뭘 기억하는지 먼저 물어보려고 했다고 말했다. 혼자만 틀리게 말할까 두려웠던 것이다. 태곤은 그 두려움까지 없애 주겠다고 하지 않았다.
대신 차를 새로 주문했다. 세희는 자신이 계산하겠다고 했고, 태곤은 가람에게 한 잔은 사 달라고 했다. 가람이 왜 자신만 내느냐고 묻자 태곤은 그가 제일 많은 종이를 가져왔다고 답했다. 세희가 웃었다. 웃고 나니 처음보다 목소리가 조금 덜 마른 것 같았다.
세 사람이 찻집을 나왔을 때 부두 쪽에서 경적이 들렸다. 물품차 한 대가 회관 앞 좁은 길을 막아 버스가 못 돌아가는 중이었다. 은실이 내려가 차주를 찾고 있었고, 만석은 반대쪽 차량이 더 들어오지 않도록 손짓했다. 가람은 익숙한 장면이라고 생각했다가 오늘은 공장 통로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다.
태곤이 먼저 길을 건넜다. 운전자는 금방 내려놓을 짐이라고 했다. 은실은 금방 끝날 줄 알고 십 분을 기다렸다고 답했다. 태곤은 버스를 뒤로 돌리려는 대신 물품차가 잠깐 들어갈 자리를 차주와 함께 확인했다. 만석은 그때까지 지나가는 자전거를 멈춰 세웠다.
가람은 버스에 올라 기사에게 이동 계획을 전했다. 승객 한 명이 법정에서 보는 사람 아니냐고 물었다. 가람은 오늘은 차를 빼 달라는 사람이라고 답했다. 창가에 앉은 정미의 딸이 손을 흔들었다. 가람이 그 손을 받아 흔드니 은실이 밖에서 내려오라며 불렀다.
물품차가 자리를 옮기고 버스가 지나갔다. 만석은 태곤에게 수고했다고 말했다. 태곤은 회사에서 길을 치우는 일과 여기서 길을 치우는 일이 서로 봐주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만석은 그런 말을 매번 해야겠느냐고 반문했다.
잠깐 공기가 굳었다. 세희가 두 사람 사이로 들어서지 않고 물품 상자를 은실에게 건넸다. 은실은 주문한 밀가루가 맞는지 확인하느라 대화에 끼지 못했다. 가람은 만석과 태곤의 표정이 풀리기를 기다리는 대신, 자기 손에 들린 상자를 내려놓을 자리를 물었다.
상자를 옮기고 나서 태곤이 먼저 말했다. 여기서 고맙다는 말을 받는 것은 좋지만, 그것 때문에 공장 직원이 다 사정을 몰랐다는 결론으로 가는 것도 싫다고. 자기가 대표한다고 해서 모든 교대자의 입장까지 정할 수는 없었다.
만석은 전화가 늦게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왜 직원들이 그냥 보고 있었느냐는 말이 목까지 올라왔다가 멈췄다. 그는 세희를 보았다. 세희는 무엇부터 설명해야 할지 몰라 보였다.
가람은 회사의 통지가 늦은 기록과 각 직원이 그 사이 한 일을 나눠 확인 중이라고 말했다. 그 일의 결과 추가 손해가 생겼는지도 별도였다. 태곤이 어깨를 조금 내렸고, 만석은 오늘은 더 묻지 않겠다고 했다. 그렇다고 궁금한 일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저녁에 보험사에서는 통지 지연에 관한 의견서를 보내 왔다. 그 지연이 계약상 의무를 어겼다는 주장이 들어 있었다. 가람은 이를 바로 주민들에게 보낸 뒤 지급이 다 막혔다고 설명하지 않았다. 어떤 연락이 언제까지 필요했다고 보는지, 지연 때문에 무엇이 더 악화됐다고 주장하는지 구체적으로 질의했다.
회사 답변은 점검을 진행하느라 사고 여부를 확인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는 것이었다. 가람은 진행 중이라는 말만으로 답을 대신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누가 점검 요청을 받고 무엇을 했는지 내역이 필요했다. 다음 날 같은 질문에 답하는 것은, 오늘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었다.
채린과 통화할 때 가람은 현재 차단 유지 비용 검토가 이 의견서 때문에 중단되는지 물었다. 채린은 자신이 단독으로 결정할 수 없다고 했다. 가람은 그렇다면 결정할 부서와 답변 시각을 확인해 달라고 했다. 상대가 모른다고 말할 수 있게 하되, 모른다는 말로 절차를 끝내 주지는 않았다.
밤이 되자 세희에게 문자가 왔다. 오늘 말한 보고 자료 중 무엇을 먼저 보여 주면 되는지 목록을 달라는 요청이었다. 가람은 메모를 정리해 보냈다. 사적인 메시지와 동료 개인정보를 통째로 보낼 필요는 없다고 적었다. 세희는 읽었다는 표시만 남겼다.
가람은 처음 경보를 받은 날의 교대 기록을 다시 열었다. 한 사람은 경보를 들었고, 다른 사람은 정비 요청을 받았으며, 또 다른 사람은 그날 자기 구역의 소리를 못 들었다고 했다. 그 셋을 하나의 침묵으로 만들면 회사가 지연한 시간까지 흐려질 수 있었다.
은실에게서 늦은 전화가 왔다. 가람이 처음에는 또 길이 막힌 줄 알았다고 하자 은실은 그런 일로 밤에 변호사를 부르지는 않는다며 웃었다. 회사 쪽 긴급 정화 비용을 받으면 해안 작업자들에게 식사를 팔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이미 누군가에게 받았다고 했다.
“받으면이라는 말 말고, 일하는 날을 알아야 재료를 사지. 열네 번 기다려 봤잖아.”
가람은 누가 물었는지 확인했다. 현장 준비를 맡은 회사 직원이었다. 그는 아직 돈이 확보됐다고 말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은실은 상대를 욕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일이 다시 생길 가능성에 반가워하면서도, 식당의 냉장고를 약속만으로 채울 수는 없었던 것이다.
가람은 담당자에게 일정과 재원 상태를 확인하겠다고 했다. 은실은 자기가 먼저 물어도 된다며, 다음에 통화할 사람의 번호만 알려 달라고 했다. 가람은 담당자가 공개한 업무 연락처를 보내 줬다. 은실의 주문을 언제까지나 대신 받아 줄 수는 없었다.
전화를 끊고 얼마 뒤 채린에게 답이 왔다. 현재 차단 유지 검토와 과거 통지 지연 주장은 나눠 진행할 수 있으나, 추가 정화 비용은 아직 집행 재원이 확정되지 않았다는 내용이었다.
가람은 보고서 옆에 은실의 질문을 적었다. 누구의 잘못인지 따지는 밤이 또 하나 길어지는 동안, 내일 일을 준비하는 사람에게는 쌀을 살 시간이 줄어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