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 법정·사회파 드라마 45화

바다가 증언석에 앉는 날

배가 멈춘 날짜

만석은 달력을 펼치자마자 가람의 펜을 빼앗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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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석은 달력을 펼치자마자 가람의 펜을 빼앗았다.

“그날은 바다 때문이 아니야.”

조업이 멎은 날을 표시하려던 펜 끝이 멈췄다. 만석은 오래된 사진을 찾아 엔진 아래에 묻은 기름을 보여 줬다. 그날 배를 세운 것은 고장 때문이었다. 수리비가 아까워 직접 손보려다 결국 기사를 불렀고, 기사에게 혼난 것까지 기억했다.

“여기도 넣으면 돈을 더 받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옆에서 재문이 말했다. 만석이 그를 봤다. 재문은 사람들에게 듣고 온 말을 대신 물은 것이라고 덧붙였다. 가람은 원래 못 나간 날과 오염 때문에 못 나간 날을 나눠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고 고장 수리 이후의 손실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만석이 펜을 돌려줬다. 가람은 잘못 찍을 뻔한 점 옆에 작은 별표를 붙였다. 바로 지우지 않고 엔진 수리일이라고 적었다. 나중에 왜 빠졌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설명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었다. 만석은 자기 달력인데 자기보다 꼼꼼하게 다룬다고 했다.

이른 아침 회관 창문으로 부두가 보였다. 아직 출항할 수 없는 배들의 줄은 조금씩 길이가 달라졌다. 배가 움직이지 않아도 사람들은 물때에 맞춰 내려왔고, 무엇을 손봐야 할지 찾아냈다. 아무 일도 없는 날이 아니라, 같은 일을 계속 기다리는 날이었다.

재문은 수리집에 맡긴 틀의 사진을 보여 줬다. 어제보다 바닥에서 조금 올라가 있었다. 주인이 받침을 놓아 준 것이었다. 재문은 받침을 자기가 마련해야 하는지 물었다. 만석은 그건 주인에게 물으라며 웃었다. 둘의 말투가 며칠 전보다 느슨해져 가람도 웃었다.

가람은 보험 계약 시작일을 달력 위에 얹었다. 오래된 관벽의 기록은 그 앞에 있었고, 늘어난 손해는 각자의 장부에서 찾아야 했다. 만석은 그 날짜를 넘어가는 펜을 손으로 막았다. 배가 멈춘 사정부터 보자는 뜻이었다.

가람은 두 가지를 동시에 설명하다가 만석에게 제지당했다.

“먼저 내 배부터 하자. 바다는 너무 커.”

가람은 종이를 돌렸다. 만석의 배가 멈춘 날짜, 어장 접근이 제한된 날짜, 실제 판매를 못 한 날짜를 따로 적기 시작했다. 만석은 첫 칸을 보고 지루하다는 얼굴을 했지만, 세 번째 칸에 이르자 자세를 고쳐 앉았다. 바다에 나갔다 돌아와서도 물건을 못 판 날이 있었기 때문이다.

재문은 판매 중단 통지를 받은 날을 기억했다. 다만 만석과 같은 날은 아니었다. 거래처에 보낸 마지막 상자의 인수 시간이 문자에 남아 있었다. 만석은 자기 배가 먼저 묶였으니 재문도 그날부터 못 판 줄 알았다고 했다.

“내 거래처는 마지막까지 받아 줬어. 좋은 마음인지 모르고 받아 줬는지야 모르지만.”

재문이 말했다. 가람은 상대의 마음을 적는 대신 실제 인수한 날짜를 적었다. 돈이 들어온 날짜도 다를 수 있었다. 재문은 통장 알림을 찾으려고 한참 화면을 넘기다가 광고를 잘못 눌렀다. 만석이 옆에서 손가락을 거두라고 했다. 두 사람의 실랑이로 정적이 풀렸다.

정미가 회관에 들어올 때는 딸도 함께였다. 딸은 오늘 학교가 늦게 시작한다고 했다. 가람은 어른들의 얘기를 억지로 듣게 하지 말자고 했지만, 딸은 창가에서 숙제를 하겠다며 자리를 골랐다. 정미는 판매가 줄어든 기간에 대한 자료를 내려놓고 딸의 의자를 벽에서 조금 띄웠다.

정미의 기록은 만석의 것과 달랐다. 조개가 안 팔려서 가게의 다른 물건까지 덜 팔리기 시작한 때는 조금 뒤였다. 먼 데서 사러 오던 손님이 줄었고, 냉장고를 비워 두는 날이 늘었다. 정미는 아이에게 이런 얘기를 들려주기 싫어 말끝을 짧게 했다.

딸이 고개를 들었다. “엄마, 빈 냉장고는 내가 봤는데.”

정미는 잠시 말을 잃었다. 만석이 딸에게 달력을 밀어 보이며 날짜를 대신 써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가람은 어른들의 손실 기록을 아이에게 맡기자는 것은 아니라고 거들었다. 딸은 날짜만 반듯하게 쓰고 본문은 어른들이 쓰면 되지 않느냐고 했다.

정미가 웃었다. 딸은 공책 옆에 빈 달력을 놓고 숫자를 썼다. 한 칸에 두 날짜를 쓰지 않도록 간격을 남겼다. 가람은 그 정돈된 칸을 보면서 어른들의 엉킨 시간도 언젠가는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온은 조금 늦게 도착했다. 회사가 제출한 가입 후 야간 세척 기록 중 추가로 대조할 수 있는 스물두 차례의 후보가 있다고 했다. 만석은 전에 열네 번이라고 했는데 왜 갑자기 늘었느냐고 물었다. 다온은 확인한 자료의 범위가 다르다고 설명했다.

다온은 열네 구간의 일지와 전류 대조표를 놓고, 옆에 가입 뒤 기록에서 가져온 스물두 후보를 놓았다. 새 목록에는 아직 겹침을 확인할 표시가 비어 있었다. “세척 기록입니다. 매번 지하관으로 바다에 나갔다는 횟수가 아니에요.” 만석은 늘어난 숫자를 달력으로 가져오려던 손을 거뒀다.

만석이 이마를 문질렀다. “숫자가 늘면 좋은 소식인 줄 알았는데.”

“대신 모르는 걸 어디서 찾을지는 더 분명해졌습니다.”

다온은 그렇게 말하고 실제 확인된 시간창만 달력에 표시했다. 정미의 딸이 스물두 개를 그려 주려다가 멈췄다. 다온이 고맙다며 펜을 받았다. 새 목록은 이 달력의 사실 칸이 아니라 옆에 붙인 확인할 일에 들어갔다.

점심 무렵 회사와 보험사에 보낼 자료를 나누고 있을 때, 재문이 휴대전화에서 오래된 영상을 발견했다. 거래처와 선적 수량을 맞추려고 찍어 보냈던 영상이었다. 물건보다 뒤쪽 소리가 더 크게 담겨 있었다. 만석은 자기 목소리부터 알아듣고 끄라고 했다. 영상 속에서는 재문에게 상자를 그렇게 쌓지 말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다온이 잠시만 다시 틀어 달라고 했다. 멀리 공장 쪽의 불빛이 보였다. 그 빛만으로 어떤 공정이 돌아가는지 알 수는 없었다. 다만 영상의 시각과 선적 장소가 남아 있어, 다른 운전 기록과 비교할 자료가 될 수 있었다. 재문은 그날 물이 탁했던 기억도 있다고 했다.

“기억은 따로 적어 주세요. 영상에는 탁한 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다온이 말했다. 재문은 기분 나빠하지 않고 화면을 가까이 들여다봤다. 정말 물은 잘 보이지 않았다. 자기 머릿속 장면과 영상 안의 장면은 같은 날인데도 달랐다. 가람은 원본을 보존한 뒤 제출 방식과 장소 정보 공개 범위를 재문과 상의했다.

재문은 위치를 감추면 못 믿는 것 아니냐고 했다. 가람은 조사에 필요한 사람에게는 확인시키되 누구나 가져다 쓸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재문은 자신의 거래처 이름도 함께 가려 달라고 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던 자료가 다른 사람까지 담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얼굴이었다.

가람은 점심을 먹으러 은실의 가게에 갔다. 예약이 아닌 약속을 한 세 사람 중 둘은 왔고 한 명은 연락이 없었다. 은실은 문이 열릴 때마다 준비한 그릇을 봤다. 나오는 사람이 없자 세 번째 수저를 서랍에 넣고 남은 찌개는 저녁에 내겠다고 했다. 두 사람 몫은 먼저 팔았지만 더 올려 놓은 밥은 남았다.

“한 명은 바람이 분다더니, 전화도 바람 타고 없어졌나 봐.”

은실은 가람의 그릇에 두부를 더 넣었다. 가람은 그 두부도 장부에 들어가야 하는지 농담했다. 은실은 변호사에게 주는 서비스는 회사 손해로 적지 않는다고 답했다. 두 사람은 웃었지만, 그 구분은 오늘 만든 날짜표만큼 실제였다.

은실은 납품이 완전히 끊긴 날과 식당 매출이 줄기 시작한 날을 표시했다. 거래처가 줄어도 마을 손님은 한동안 왔다. 반대로 회사 납품이 재개돼도 사라진 다른 손님이 바로 돌아올지는 몰랐다. 가람은 들어온 식사대금 열네 번을 이미 받은 돈으로 기록하고, 아직 정리되지 않은 다른 손실과 섞지 않았다.

오후에 채린의 목록이 도착했다. 현재 차단 유지 비용 중 일부는 검토를 진행할 수 있었지만, 추가 정화의 범위와 기존 손해는 더 자료가 필요했다. 가람은 바로 만석에게 다 됐다고 말하지 않았다. 오늘 약속한 시간에 답이 온 것은 확인했고, 돈이 언제 실제 나가는지는 다음으로 물었다.

채린과 통화하는 사이 회사에서는 별도의 손해표를 보내 왔다. 공장 정지 비용이 주민 조업 손실보다 앞에 놓여 있었다. 가람은 순서가 지급 우선순위인지 작성 관행인지 확인해 달라고 했다. 표의 순서를 바꾸는 것만으로 주민 돈이 들어오는 것은 아니었다.

회관에 돌아왔을 때 정미와 딸은 학교로 갔고, 만석과 재문이 달력을 보고 있었다. 재문은 자기 판매 중단일이 만석보다 늦어 미안하다고 했다. 만석은 그날까지 팔았으면 다행이었다고 답했다. 이어 달력의 엔진 수리일을 자기 손으로 다시 눌렀다. 펜을 빼앗을 때는 누구보다 결백해 보이고 싶었다. 하루를 빼고 나자 줄어든 돈이 아까운 마음도 들었다. 그는 그 별표를 가람에게 보여 주고 다시 지우지는 않았다.

가람은 달력 옆에 재문이 맡긴 영상의 목록을 붙였다. 만석이 자신의 엔진 수리일을 손끝으로 두드렸다. 그 하루를 뺀 자리가 처음에는 손실을 줄인 것처럼 보였지만, 남은 날짜가 도리어 더 단단해졌다고 했다.

그때 태곤에게서 연락이 왔다. 회사 손해표에 공정 정지 비용은 적혀 있는데, 실제 정지한 동안 작업자들의 임금을 어떤 계정으로 지킬지는 빠져 있다는 것이었다. 가람은 오늘 주민 자료도 그런 빈칸을 찾고 있었다고 말했다.

“우리도 날짜를 가져가면 되겠습니까?”

“예. 멈춘 날과 일한 날을 다 가져오세요.”

태곤은 자신들이 무조건 전면 정지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며 덧붙였다. 위험한 공정과 안전하게 할 수 있는 일을 나눠 보고 싶다는 말이었다. 가람은 그 구분 역시 회사의 말이 아니라 현장의 자료로 확인하겠다고 했다.

전화가 끝나자 만석이 빈 의자를 당겼다. 태곤이 앉을 자리를 미리 만드는 모양이었다. 재문은 달력이 더 필요하겠다고 했다. 가람은 새 종이를 꺼냈다. 오늘 만석의 날짜가 정리된 것이, 다른 사람의 날짜를 빼앗은 결과일 필요는 없었다.

해가 기울 때 다온에게 메시지가 왔다. 재문의 영상 시각을 원본 정보로 확인했고, 새 후보 가운데 하나와 대조를 시작했다고 했다. 결과는 아직 없었다. 대신 그날 회사가 어떤 통지를 보냈는지 먼저 찾아 달라는 요청이 붙어 있었다.

가람은 며칠 전 받은 경보 목록을 열었다. 세희가 회사에 보고한 시각과 회사가 보험사에 알린 시각 사이에, 밤 하나가 길게 비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