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 법정·사회파 드라마 44화

바다가 증언석에 앉는 날

지워진 조건

만석은 법정에 들어가기 전 휴대전화의 음량을 세 번 낮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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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석은 법정에 들어가기 전 휴대전화의 음량을 세 번 낮췄다.

“지난번에 재문이 전화했잖아. 그놈은 내가 여기 있는 줄 알면서도.”

오늘 재문은 오지 않았다. 비를 맞은 통발을 손보고, 정미의 가게에 맡긴 상자에서 필요한 물건만 꺼내기로 했다. 만석은 두 사람이 이제 혼자서도 문을 열고 닫는다고 말했다. 가람이 문고리는 재문이 고쳤지 않느냐고 하자, 만석은 자신도 뒤에서 단단히 받쳤다고 했다.

법정 문이 열렸다. 은실은 봉투 두 개를 가방 안에 다시 넣었다. 오늘은 자신이 한 말보다 보험사의 말을 들어 보려고 왔다고 했다. 가람은 그녀의 자리를 확인하고 앞쪽으로 갔다. 회사 대리인은 이미 앉아 있었고, 보험사 쪽에는 낯선 여자가 자료 상자를 정리하고 있었다.

유채린이었다. 위험조사와 손해자료를 함께 확인하는 보험사 담당자라고 소개했다. 가람은 그녀와 악수한 뒤, 검사 조건이 사라진 초안에 대해 물었다. 채린은 법정에 제출한 자료부터 보자고 했다. 친절한 인사를 했다고 당장 같은 편이 되는 관계는 아니었다.

안주원 재판장이 들어오자 방 안의 의자가 동시에 움직였다. 보험사 대리인은 회사의 완료 회신을 믿어 별도 검사 조건을 두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어 계약 체결 당시 중요한 사실을 잘못 전달받았으므로 계약 전체의 효력을 다투겠다고 말했다.

뒤에서 만석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가람은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초안과 최종 조건을 함께 보여 달라고 했다. 검사 권고가 있었다는 사실과 회사에 문서가 도착한 사실은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권고를 그대로 뒀다면 실제 어떤 결정을 했을지는 보험사가 설명해야 했다.

“검사가 끝나지 않았다면 계약을 안 했습니까?”

보험사 대리인은 당시 심사 기준을 따랐을 것이라고 답했다. 가람은 그 기준을 제출해 달라고 했다. 조건을 더 붙였을 가능성과 계약 자체를 거절했을 가능성을 하나의 말로 묶지 말아 달라고 덧붙였다. 채린이 옆에서 문서 번호를 찾아 대리인에게 건넸다.

회사 대리인은 외주 공사가 실제 진행됐다는 점을 강조했다. 가람은 수행 범위를 표시한 작업내역을 제출했다. 지상 연결부와 보온재는 정비됐다. 그러나 그 공사를 지하관 관벽 검사라고 부를 근거는 아직 없었다. 회사 대리인은 현장 담당자들의 용어가 달랐을 수 있다고 했다.

채린은 그 내역의 날짜를 확인하고 별지를 넘겼다. 가람은 그녀가 이미 모든 문제를 알고 왔을 거라고 생각했다가 마음을 고쳤다. 자기 앞의 자료를 처음 확인하는 사람에게도 답할 시간은 필요했다. 기다리는 것과 기다리기만 하는 것은 달랐다.

“그래서 용어만이 아니라 실제 작업을 확인했습니다.”

가람이 말했다. 은실이 뒤에서 가방을 만졌다. 만석은 손바닥을 무릎 위에 눌렀다. 두 사람은 저마다 해야 할 말을 갖고 왔지만 지금 끼어들면 방금 확인한 사실까지 소음에 섞일 수 있었다.

재판장은 당시 심사 기준과 문서 수정 경위를 더 제출하게 했다. 오늘 회사 설명을 받아들였다는 뜻도, 보험사 주장을 기각했다는 뜻도 아니었다. 가람은 그 뒤에 피해자에 대한 지급과 긴급 비용이 어떤 상태인지 함께 정리해 달라고 요청했다.

“두 회사가 계약을 다투는 동안 이미 필요한 조치가 멈출 수는 없습니다. 지금 다투는 항목과 다투지 않는 항목을 나눠 주십시오.”

보험사 대리인은 모든 비용이 담보된다는 전제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가람도 그 전제를 두지 않았다. 회사가 해야 할 안전조치와 보험사가 부담할 수 있다고 보는 비용, 최종 손해배상은 각각 근거를 밝히면 됐다. 오늘의 요청은 주민들이 그 셋의 싸움이 끝날 때까지 아무 창구도 갖지 못하는 일을 막자는 것이었다.

채린이 자리에서 자료를 정리했다. 현재 차단 유지와 추가 유입을 막는 조치 중 검토 가능한 항목을 다음 협의 전에 확인하겠다고 했다. 회사 대리인은 기존 조치의 예산을 이미 마련했다고 답했다. 가람은 실제 지출 내역도 같이 달라고 했다. 말이 오가는 사이 만석의 휴대전화 화면이 켜졌다.

그는 받지 않았다. 진동만 울리다가 멈췄다. 잠깐 뒤 다시 울렸다. 만석이 은실에게 화면을 보여 줬고, 은실이 문밖을 가리켰다. 만석은 조용히 일어나 나갔다. 가람은 그 모습을 보았지만 심리가 끝날 때까지 질문을 이어 갔다.

휴정 뒤 복도에서 만석을 만났다. 재문에게 온 전화였다. 남쪽 부두의 낮은 창고 문으로 빗물이 들어오고 있었다. 정미에게 옮긴 상자는 괜찮지만, 아직 창고에 남은 긴 틀이 젖고 있다고 했다. 창고 주인이 오늘 열쇠를 받으러 와서 오래 문을 열어 둘 수도 없었다.

“그거 무겁습니까?”

“둘이 들면 돼. 잘 들면.”

은실이 가람을 위아래로 봤다. 어제 화분을 옮긴 표정을 떠올린 눈이었다. 만석은 가람에게 들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차로 부두에 가겠다는 말이라고 덧붙였다. 가람은 남은 제출을 마친 뒤 갈 테니 무리해서 혼자 옮기지 말라고 했다.

채린이 복도 끝에서 다가왔다. 만석은 그녀를 보더니 보험이 있는 게 맞느냐고 물었다. 가람이 끼어들기 전에 채린이 대답했다. 계약이 있다는 사실과 지금 청구한 비용을 누가 얼마만큼 맡는지는 다르게 다투고 있다고 했다.

“나는 보험을 잘 모르니까, 그 말을 집에 가서 풀어 봐야겠네.”

만석의 목소리가 올라가지 않은 탓에 더 무거웠다. 채린은 쉽게 설명한 안내를 따로 준비하겠다고 했다. 만석은 안내를 달라는 말이 아니었다며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채린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은실은 그 사이 자신이 가져온 봉투를 가람에게 맡겼다.

가람은 채린에게 긴급 비용 항목을 말로만 알려 주지 말고, 보류된 사유와 다음 답변 시점을 같이 보내 달라고 했다. 채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건넨 명함을 받은 뒤 가람은 만석을 따라 나갔다. 채린은 따라오지 않았다.

부두에 도착하니 재문이 문앞에 서 있었다. 긴 틀은 사람 키보다 컸다. 비를 피하려고 창고 안쪽에 둔 탓에 다른 물건을 먼저 옮겨야 했다. 재문은 오늘 반납할 자리와 아직 쓸 자리를 구분하다가 종이 상자 두 개를 젖게 만들었다고 했다.

“정미네에 더 가져가면 안 되겠지?”

“물어보자.”

만석이 답했다. 재문은 가게 통로를 이미 한 번 비운 걸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돈을 더 준다고 통로가 늘어나지는 않았다. 가람은 긴 틀의 사진을 찍어 정미에게 보내고, 가능한 자리를 물었다. 정미는 그 길이는 안 들어온다고 즉시 답했다. 안 되는 것을 빨리 알자 세 사람은 다른 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은실이 한참 뒤에 도착했다. 그녀는 시장 입구에서 사 온 비닐과 따뜻한 보리차를 들고 있었다. 긴 틀을 보고 손부터 대지 않았다. 어느 부분을 들면 괜찮은지 재문에게 물었다. 재문은 틀의 끝 두 곳을 짚다가, 은실은 비닐을 잡아 주는 편이 낫겠다고 바꿨다.

“잘 고쳤네.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지.”

은실이 비닐을 폈다. 만석과 재문은 틀을 들고 가람은 문턱 앞의 상자를 치웠다. 밖으로 나온 틀을 덮으려는데 바람이 비닐을 뒤집었다. 은실이 무릎으로 한쪽을 눌렀다. 가람이 반대편을 잡으면서 비가 목 뒤로 들어왔다. 재문이 웃음을 터뜨렸다.

“변호사님은 이런 데서도 넥타이를 하네.”

가람이 젖은 넥타이를 셔츠 사이에 넣었다. 네 사람이 겨우 덮은 틀은 만석의 작은 차에 들어가지 않았다. 당연한 사실을 차 옆에 대 보고 나서야 확인했다. 만석이 재문에게 왜 먼저 길이를 말하지 않았느냐고 하자, 재문은 긴 건 안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은실이 보리차를 돌렸다. 가람은 안 들어가는 차에 더 얹어 보자는 말을 막고, 가까운 작업장에 잠깐 맡길 수 있는지 연락했다. 재문이 오래 알던 수리집이었다. 주인은 다음 주 수요일까지면 한쪽 자리를 쓰라고 했다. 그보다 길면 비용과 공간을 다시 상의해야 했다.

재문은 무료라는 말에 먼저 고맙다고 했다가, 자기 도구는 필요한 만큼 챙겨 가겠다고 덧붙였다. 매번 자리를 내준 사람을 불러야 할 정도로 안쪽을 막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수리집은 운반차도 갖고 있었다. 잠시 뒤 차가 왔고, 넥타이를 걷어 넣은 가람은 그때야 틀을 제대로 실을 수 있었다.

창고 주인이 도착했을 때 바닥은 비어 있었다. 재문은 열쇠를 돌려줬다. 그는 장사가 안 돼 자리를 줄이는 것도 자기 일이었는데, 법정에 가면 큰 결론을 기다리는 사람으로만 앉게 된다고 말했다. 은실은 자신도 그렇다며 보리차 빈 통을 챙겼다.

가람은 오늘 할 질문이 법정 안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틀 하나를 옮길 자리는 찾았고, 은실의 내일 쌀은 마련됐다. 그 일을 끝냈다고 회사가 만든 위험까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큰 다툼 속에 작은 일까지 버려 두는 것도 해결은 아니었다.

사무실로 돌아온 저녁, 채린에게 약속한 답변 일정이 왔다. 현재 차단 유지와 추가 유입 예방 비용 중 어떤 항목을 먼저 검토할 수 있는지, 다음 날 오후까지 목록으로 회신하겠다고 했다. 최종 담보를 인정한다는 문구는 없었다. 가람은 회신 시간을 달력에 적고 만석에게 문자를 보냈다.

잠시 뒤 만석에게 사진이 왔다. 수리집 한쪽에 긴 틀이 반듯하게 서 있었다. 그 앞에 재문이 손바닥만 한 이름표를 붙여 놓았다. 맡긴 사람의 번호와 다시 찾을 날이 적혀 있었다.

가람은 사진을 확대했다. 수요일이라는 글자 아래에 새로 쓴 줄이 있었다. 만석이 추가한 모양이었다.

그날 바다에 못 나가도, 이것은 찾으러 온다.

가람은 내일 확인할 비용 목록을 다시 열었다. 누가 계약을 없던 일로 만들고 싶어 하든, 사람들의 내일은 없던 일이 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