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 트랙은 비어 있다
일흔두 자리의 틈
미경이 선반을 들어 올리려 하자 태오가 먼저 팔을 걷었다.
미경이 선반을 들어 올리려 하자 태오가 먼저 팔을 걷었다.
“잠깐요.”
노을이 말렸다. 미경이 가져온 건 허가서가 아니라 시설 수리 일정표였다. 선반을 고정한 벽 나사가 헐거워 교체할 예정이었다. 수리는 오늘 오후. 어제 매트가 옮겨진 뒤 바닥이 드러나 있었고, 선반을 들면 아래쪽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보고 싶다고 현장의 수리 순서를 바꾸어서는 안 됐다.
시설 기사 둘이 들어왔다. 한 사람은 노을이 가져온 카메라를 보고 얼굴을 굳혔다.
“작업 과정 찍으실 거면 미리 말씀하셔야 합니다.”
“기사님 얼굴은 찍지 않겠습니다. 선반 아래 상태만, 허락되면요.”
기사는 미경에게 물었다. 미경이 현재 사용자의 동의 범위를 다시 보여 주었다. 선반 자체는 건물 고정 설비라 관리인이 수리할 수 있었다. 그 안의 물건은 손대지 않는다. 기사들은 상단에 남은 현재 입주자의 파일 상자를 먼저 주인에게 옮겨 달라고 했다. 태오는 또 기다렸다.
청년이 왔다. 공연 뒤 목이 잠겼지만 웃으면서 자기 상자를 가져갔다.
“어제는 바퀴, 오늘은 선반. 내일은 천장을 열 건가요?”
“천장은 안 봅니다.”
태오가 대답했다.
“농담인데.”
“저도 그러길 바랍니다.”
청년은 빈 상자를 안고 웃었다. 태오는 그가 자신의 일정을 또 조정했다는 걸 알았다. 조사비에서 사례비를 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러면 증인이 아니라 협조자가 되는 것 같아 망설였다. 미경은 현재 사용자가 자기 물건을 옮기는 건 건물 수리에도 필요한 일이라고 말했다. 청년은 두 사람의 고민을 듣더니 차라리 다음 공연 때 표나 사 달라며 나갔다.
선반이 벽에서 떨어질 때 못 하나가 바닥에 튀었다. 짧은 쇳소리가 울리자 태오의 어깨가 움찔했다. 노을은 그보다 바닥에 드러난 긴 매트를 보았다. 어제 그린 부분과 이어지는 자리에는 네모난 받침 자국이 두 겹으로 남아 있었다.
기사가 못을 줍기 전에 태오가 구두 끝으로 길을 막았다. 작은 못 하나가 매트 위를 굴러가면 사진에 없던 흠이 생길 것 같았다. 그는 손으로 줍고 싶었지만 장갑이 없었다. 기사가 자석 막대를 가져왔다.
“이건 새 못입니다. 녹슨 건 제가 안 만졌어요.”
“알겠습니다.”
기사는 태오가 자신을 의심한다고 생각했는지 목소리가 딱딱해졌다. 태오는 설명하려다 말았다. 자기 두려움이 남의 작업을 늦췄다는 사실은 이미 보였다. 그는 못을 종이 봉투에 넣어 기사에게 돌려주었다. 기사는 못의 규격을 확인하고 수리 상자에 넣었다.
노을은 매트 한쪽이 선반 발에 붙어 올라온 것을 봤다. 힘주어 떼면 찢어질 수 있었다. 기사는 들고 있던 선반을 다시 바닥에 내렸다. 둘이 함께 받침을 괴고 매트가 스스로 떨어질 틈을 만들었다. 오래된 직물이 천천히 펴졌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셋은 말하지 않았다. 선반이 우지끈 무너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무척 시끄러운 순간이었다.
“탐정 일을 하려면 팔힘이 필요하군요.”
기사가 땀을 닦았다.
“선반 수리도 그렇죠.”
태오가 대꾸하자 기사가 처음으로 웃었다. 그는 지금 고친 선반이 언제 또 흔들릴지 몰라 걱정하고 있었다. 조사팀은 옛 자국만 보고, 기사는 내일 이 방에 들어올 사람의 손가락을 보고 있었다.
“사진부터.”
이솔이 말했다. 태오는 숫자를 세려다가 카메라를 들었다. 선반을 완전히 치우기 전, 반만 든 상태, 바닥에 놓은 뒤의 위치를 나눠 찍었다. 기사들이 자기 일을 기다려 준 시간은 길지 않았다. 빨리 찍는 손이 도리어 떨려 한 컷이 흔들렸다. 그는 바로 다시 찍었다.
노을은 매트 가장자리에 붙은 작은 직물을 보았다. 오래 눌려 납작해진 보강천이었다. 구멍이 일정한 간격으로 둘씩 나 있었다. 태오가 상자 모서리라 생각한 자국 일부는 선반 받침의 발이었다. 태오가 실망한 얼굴을 하자 노을은 사진을 다시 돌렸다.
“발 자리를 빼고 남은 윤곽을 봅시다.”
기사가 새 나사를 끼우는 동안, 셋은 공용 작업대에서 사진을 펼쳤다. 보강천 구멍 여덟 개는 선반 발 네 개와 맞았다. 그 자리를 빼면 서로 닮은 직사각형 윤곽 두 개가 남았다. 다만 한쪽은 모서리가 짓눌려 길이가 분명하지 않았다. 태오는 각각의 폭을 재고 다시 쟀다. 자를 놓는 위치에 따라 몇 밀리미터씩 달라졌다.
“어느 쪽이에요?”
미경이 묻자 이솔은 “둘 다 사진에 남겨 주세요”라고 했다. 태오는 펜을 내려놓았다. 두 윤곽 안에 원반 한 장씩을 올려 보는 상상에서 빠져나오고 싶었다. 상자가 있었다면 원반은 바닥에 직접 닿지 않았을 것이다.
오후에 연복이 옛 주문서를 보내 왔다. 같은 규격의 36장용 보관상자를 두 번 주문한 기록이었다. 주문 날짜는 별관으로 반출된 뒤였다. 용량으로만 보면 합계 일흔두 장을 담을 수 있다. 주문한 상자가 실제로 납품되고 이 방에 놓였는지는 다른 기록이 필요했다. 노을은 규격을 읽고 작은 종이 모형을 접었다. 실제 원반을 가져오지 않고도 바닥 면적을 가늠할 수 있었다.
모형을 바닥의 자국 위에 놓으려다가 멈췄다. 종이가 낡은 매트에 닿으면 새 흔적이 생긴다. 노을은 투명판 위에서 사진과 모형을 맞췄다. 두 직사각형 가운데 한쪽의 폭은 주문서의 상자 바닥과 가까웠다. 다른 한쪽은 닳은 가장자리 탓에 판별이 어려웠다. 같은 규격 두 상자를 놓을 공간은 있었다. 그것이 실제로 놓였다는 말까지는 못 했다.
“그 두 상자에 일흔두 장을 담았다면, 여기 있었을 수 있겠네요?”
태오가 물었다.
노을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 상자를 주문한 건 맞아요. 한 윤곽은 크기도 비슷하고요. 바닥이 원반 수까지 말해 주진 않아요.”
태오는 그 말을 듣고 사진을 다시 봤다. 원반 일흔두 장의 자국을 기대한 눈에는 닳은 네모 둘만 남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한 장씩이 아니라 상자째 물건을 들여왔을 것이다. 상자의 바닥과 주문 규격을 맞추는 일이 지금 할 수 있는 비교였다.
수리 기사가 새 선반을 세웠다. 한쪽 다리가 바닥 홈에 들어가지 않아 흔들렸다. 노을이 바닥 자국을 보존해야 한다며 공구를 대지 말라고 하자 기사는 당황했다.
“흔들리는 선반을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습니다.”
미경도 기사의 편을 들었다. 현재 사용자가 손 다치면 옛 자국을 보존한 게 무슨 소용이냐고 했다. 태오는 잠깐 반발하고 싶었다. 오늘에야 본 자국이 사라질지 몰랐다. 그러나 청년이 내일도 이 선반에서 케이스를 꺼낼 것이다.
“필요한 만큼 고치세요. 그 전에 이 상태 사진을 한 번 더 찍겠습니다.”
이솔이 말했다. 기사들은 몇 분을 기다려 줬다. 선반 발 아래 얇은 받침을 넣고 흔들림을 잡았다. 자국 일부는 가려졌지만 수리 뒤에도 매트가 보관되도록 미경이 별도 봉투와 장소를 마련했다. 태오는 방을 나설 때 흔들리지 않는 선반을 손끝으로 밀어 봤다.
저녁에 문주에게서 전화가 왔다. 태오는 일흔두 장을 담을 상자 주문과 바닥 윤곽이 맞을 수 있다고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가 입을 다물었다. 문주는 잠시 기다렸다.
“그 자리가 수인의 자리도 되나요?”
“그런 말은 안 하겠습니다.”
“좋아요. 나는 오늘 당신 목소리가 좀 다른 줄 알았어요.”
태오는 웃었다. 문주는 수인을 찾지 말라는 말만 하려고 전화한 게 아니었다. 오래 기다렸던 사람이 한 가지라도 찾아서 기뻐하는 목소리를 듣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선반 발 자국과 닮은 상자 윤곽 하나를 구분했다고 설명했다. 문주는 끝까지 들었다.
“내일 공연 보러 오세요. 그 청년이 표를 사 달랬다면서요.”
“어떻게 알았어요?”
“그 친구가 나한테도 그랬어요. 표 팔 줄 아는 연주자예요.”
둘은 웃었다. 태오는 공연 표 두 장을 샀다. 누군가의 과거를 묻는 일 때문에 오늘 연주를 놓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공연장에는 문주가 먼저 와 있었다. 그는 무대가 가장 잘 보이는 자리가 아니라 출입문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태오가 이유를 묻자 장비가 잘못되면 나가서 사람을 부르기 쉬워서라고 했다. 습관이라며 웃었지만, 노래가 시작되자 문주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별관에서 만난 청년은 무대 위에서 더 작아 보였다. 케이스를 밀던 손으로 피아노 뚜껑을 열고 건반을 눌렀다. 첫 음은 맑지 않았다. 조금 거칠고 뒤에 남는 소리가 길었다. 태오는 그 소리를 창고의 물방울이나 오래된 원반에 붙이지 않았다. 청년이 오늘 고른 악기의 소리였다.
중간에 청년이 두 박자를 쉬었다. 태오는 반사적으로 숫자를 세려다 멈췄다. 문주가 팔꿈치로 그를 찔렀다.
“그건 여기 작곡가가 쓴 쉼표예요.”
“알아요.”
“표정은 안 그런데.”
태오는 웃음을 삼켰다. 둘은 곡이 끝날 때까지 말하지 않았다. 공연이 끝난 뒤 청년은 객석을 향해 인사했고, 문주는 다른 사람보다 조금 늦게 박수를 쳤다. 태오는 옆 사람의 손뼉이 어느 순간부터 자기와 같은 박자에 놓이는지 들었다. 옛 자국의 수를 세던 손이 이제는 아무것도 세지 않고 소리를 냈다.
나오는 길에 청년이 표를 샀느냐고 물었다. 태오가 두 장이라고 하자 청년은 다음엔 세 장을 사라며 농담했다. 노을을 데려오라는 뜻이었다. 문주는 노을이라면 공연장 공조기를 먼저 확인할 거라고 했다. 세 사람은 길 한복판에서 웃었다. 태오는 노을에게 그런 말을 전해 주기로 했다.
늦은 밤 이솔에게서 사진 정리본이 왔다. 매트에는 선반 발을 뺀 직사각형 윤곽 둘이 남았다. 그중 하나가 주문 상자 바닥과 비슷했다. 방에 무엇이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는 여전히 빈칸이었다. 다음에는 운송장 중량과 상자 규격을 맞춰야 했다. 태오는 노을의 종이 모형을 떠올렸다. 얇은 종이를 접어 만든 빈 상자에, 아직 누구의 이름도 적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