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 법정·사회파 드라마 42화

바다가 증언석에 앉는 날

문 안에 있던 사람

생산본부장실 앞에서 세희는 출입증을 뒤집었다. 사진이 보이지 않는 쪽을 바깥으로 하고 의자에 앉았다. 비서가 커피를 묻자 물만 부탁했다. 가람도 같은 대답을 했다. 유리문 안에는 낯익은 공장 모형이 있었지만 지하관은 없었다. 모형의 푸른 바다는 공장 담장 가까이까지 말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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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본부장실 앞에서 세희는 출입증을 뒤집었다. 사진이 보이지 않는 쪽을 바깥으로 하고 의자에 앉았다. 비서가 커피를 묻자 물만 부탁했다. 가람도 같은 대답을 했다. 유리문 안에는 낯익은 공장 모형이 있었지만 지하관은 없었다. 모형의 푸른 바다는 공장 담장 가까이까지 말끔했다.

본부장은 예정 시각보다 십오 분 늦게 들어왔다. 회사 대리인도 함께였다. 그는 인사를 마친 뒤 세희에게 요즘 현장 일이 어떠냐고 물었다. 평소의 상사가 아랫사람에게 묻는 말투였다. 세희는 “오늘은 그 얘기를 하러 온 게 아닙니다”라고 답했다.

본부장의 손이 재킷 단추 위에서 멈췄다. 가람은 자료를 탁자에 놓았다. 수신도장 아래 생산본부장실이라고 적힌 부분이었다. 본부장은 당시 비서 계정으로 문서를 받았다고 했다. 접수한 문서를 자신이 전부 읽는 것은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읽은 사람이 다음에 누구에게 보냈는지 확인하면 되겠군요.”

가람이 말했다. 비서가 옆방으로 갔다. 본부장은 세희를 보았다. 세희는 물컵을 만지작거리다가 손을 뗐다. 질문이 자기 쪽으로 돌아올 것을 기다리는 자세가 아니었다. 본부장은 그 시선을 피하고 자료 첫 장을 읽었다.

“이건 전체 설비를 대상으로 한 권고였습니다.”

“여기에는 P-17 구간이 따로 적혀 있습니다.”

“생산계획이 같이 있었어요. 우리가 아무것도 안 한 건 아니고.”

그는 새 측정기 설치와 정비 예산을 말했다. 세희가 그 회의에 참석했던 것은 맞았다. 하지만 측정기를 들여놓은 일과 관벽 상태를 확인한 일은 서로 다른 작업이었다. 가람이 차이를 물으려는데 세희가 먼저 말했다.

“측정기는 우리가 설치했습니다. 배관 검사는 제가 배정받은 적 없습니다.”

회사 대리인이 당시 담당표부터 보자고 했다. 세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큰소리로 기억을 밀어붙이고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았지만, 자기 손으로 했던 일을 다른 사람의 지시까지 늘려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가람은 그녀가 꺼내 놓은 손을 보았다. 회관에서 무릎 사이에 감췄던 손이었다.

비서가 돌아와 화면을 돌렸다. 수신 계정에서 보낸 자료의 목록이 있었다. 본부장에게 전달한 요약에는 새 측정기 설치비와 월간 점검 예산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 P-17의 관벽 확인은 별도 첨부에 남아 있었다. 첨부파일을 연 기록이 어디까지 보존되어 있는지는 오늘 확인할 수 없었다.

본부장은 요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게 제가 봤던 문서입니다.”

“당시 실제로 무엇을 보셨는지는 더 확인하겠습니다. 다만 회사에 문서가 도착한 뒤 누가 업무를 배정했는지는 답해 주셔야 합니다.”

가람의 말에 대리인이 숨을 길게 내쉬었다. 본부장은 회의실 문을 닫아 달라고 비서에게 말했다. 문이 닫힌 뒤에도 세희는 출입증을 뒤집은 채 두었다.

그때 내선전화가 울렸다. 본부장은 받지 않으려다 표시창을 보고 수화기를 들었다. 정비동 작업이 멈췄다는 연락이었다. 공용 통로에 반입한 자재가 길을 막아, 오늘 오후 옮기기로 한 격리 유지용 장비를 들여놓지 못했다. 본부장이 먼저 목소리를 높였다. 누가 자재를 거기에 놓으라고 했느냐고 물었다.

세희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가람은 같이 가도 되겠느냐고 했다. 대리인은 오늘 열람 목적과 다르다며 망설였다. 세희가 말했다. 그 통로는 자신이 매일 지나던 곳이며, 현재 안전조치에 쓸 장비가 못 들어가면 내일 또 같은 회의에 앉아야 한다고.

본부장은 먼저 문을 열었다. 네 사람은 안전모를 받아 정해진 통행선으로 걸었다. 공장의 소리는 담장 밖에서 듣던 것보다 낮고 두꺼웠다. 가람은 돌아가는 부분을 보려고 선 밖으로 발을 내밀었다가 세희의 팔에 막혔다. 호기심만으로 사람의 일터 안쪽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통로에는 긴 팔레트 두 개가 놓여 있었다. 한쪽에서는 자재를 옮길 지게차를 기다렸고, 다른 쪽에서는 설치팀이 장비 상자를 내려놓지 못한 채 서 있었다. 누군가는 손으로 밀어 공간을 만들자고 했다. 현장 책임자가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무게와 중심을 모르는 자재를 사람이 당길 일이 아니었다.

본부장은 기다리는 기사에게 얼마나 늦어졌느냐고 물었다. 기사는 시계를 보여 줬다. 십 분은 아니었다. 본부장은 자재 반입을 맡은 부서를 호출했다. 그제야 통로를 비우는 순서가 정해졌다. 직원들이 팔레트 가까이 몰리는 대신 양쪽 출입을 막고 기다렸다.

태곤이 휴게실 쪽에서 걸어왔다. 그는 세희를 보더니 반가워하다가 본부장 얼굴을 보고 표정을 거뒀다. 안전모 끈을 풀지 않은 채 서 있었다. 가람은 회의에서 몇 차례 그의 목소리를 들었지만, 실제 일하는 자리에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대표님이 직접 오시면 통로가 빨리 열리네요.”

태곤이 말했다. 본부장이 얼굴을 찌푸렸다. 태곤은 도발하려고 한 말이 아니라는 듯 설치팀을 가리켰다. 오전부터 부서끼리 연락을 돌렸지만 서로 자재 주인을 찾는 동안 아무도 옮기지 않았다고 했다. 기사는 태곤의 말이 맞다며 장비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가람은 아까 탁자의 요약문을 떠올렸다. 한 사람이 가진 문서와 한 사람이 옮길 수 있는 팔레트는 달랐다. 태곤은 자재가 길을 막은 것을 알았고 본부장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길을 비우게 할 수 있는 말은 본부장의 전화에서 빨리 나왔다.

지게차가 통로 앞에서 멈췄다. 운전자는 책임자와 손짓을 맞춘 뒤 팔레트를 들어 올렸다. 모두 뒤로 물러났고, 바퀴가 지나간 자리에서 나무 조각 하나가 튀었다. 세희가 가람의 팔을 잡았다. 가람은 먼지보다 그 손의 힘에 놀랐다. 팔레트가 옮겨지고 책임자가 통행선을 다시 열 때까지 세희는 손을 놓지 않았다.

설치팀이 장비를 들였다. 태곤이 상자 한 귀퉁이를 받치려다가 담당 기사의 요청대로 자리를 비켰다. 그는 도움도 자기 방식으로만 하면 방해가 될 때가 있다고 중얼거렸다. 가람이 들었는지 확인하고는 웃었다. 가람도 웃었다. 지난밤 만석에게 들은 말을 떠올렸다.

본부장은 통로를 보는 담당을 한 명 지정하겠다고 했다. 태곤은 한 명에게 모든 반입부서의 책임을 몰아주지 말아 달라고 바로 답했다. 정해진 반입 자리와 시간이 있어야 사람이 통로를 지킬 수 있다고 했다. 설치기사가 옆에서 같은 말을 보탰다.

그 짧은 대화가 끝났을 때 본부장은 당장 오늘 남은 반입을 다른 자리로 돌리라고 말했다. 태곤은 호출기에 변경 내용을 전달했다. 장비 상자가 마침내 안쪽으로 움직였다. 누가 박수를 치지는 않았지만, 기다리던 기사 하나가 식어 버린 커피를 버리고 새 물을 받았다.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에 세희가 가람에게 낮게 말했다. “아까도 저런 일이었을지 몰라요.”

“어떤 일요?”

“누구한테 전달됐는데, 누가 결정해야 하는지 다들 옆방만 봤을지도요. 그게 잘못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가람은 지금 본 일을 옛날 일의 증명으로 쓰지 않겠다고 했다. 세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질문하는 방법은 달라질 수 있었다. 자료가 있었느냐만 묻는 데서 멈추지 않고, 어떤 업무가 누구에게 배정되었고 어디서 멈췄는지 물어야 했다.

본부장은 자리로 돌아와 당시 예산표를 꺼냈다. P-17 관련 항목 옆에는 반영 예정이라고 적혀 있었다. 뒤에 회신한 보수 완료라는 표현과는 달랐다. 가람이 두 문서를 나란히 놓자 세희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본부장도 이제 문서 한 장의 앞쪽만 보지 않았다.

“예정과 완료 사이에 공사가 있어야 하잖아요.” 세희가 말했다.

“그때 외주 정비를 했습니다.”

“그 외주가 어느 부분이었습니까?”

본부장은 담당자에게 연락하겠다고 했다. 가람은 오늘 받을 자료와 나중에 제출할 자료를 적었다. 그가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고 돌아가지는 않겠지만, 했다는 말만 가지고 공사의 위치를 그릴 수도 없었다. 회사 대리인이 서류에 의견을 적는 동안 세희는 예산표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정문 밖에서 세희가 멈췄다. 주머니를 뒤지더니 사물함 열쇠를 꺼냈다. 아까 현장에 내려갔을 때 장갑을 챙기려고 익숙하게 손을 넣었다는 것이었다. 책상 앞에만 앉다 돌아왔어도 자기 일이 끝나지 않았을 텐데, 통로를 다녀오니 더 선명해졌다고 했다.

“태곤 씨가 내일도 거기 서 있을 거예요. 그 사람한테 내가 왜 밖에서 회사 사람처럼 말하냐고 들을 수도 있겠죠.”

가람은 오늘 같이 들어와 준 것에 감사하다고 말했다. 세희는 고맙다는 말을 받으려고 한 이야기가 아니라며 열쇠를 다시 넣었다. 잠시 뒤 태곤에게서 설치장비 사진이 왔다. 상자는 통로 안쪽의 지정 자리에 놓여 있었다. 뒤에는 반입 금지 표시가 새로 붙었다. 세희가 사진을 가람에게 보여 주었다. 내일 이 표지가 있는지 물어볼 사람이 한 명 늘어난 셈이었다.

공장을 나왔을 때 만석에게 전화가 왔다. 재문과 상자를 다 옮겼다는 소식이었다. 정미의 문도 고쳤다고 덧붙였다. 가람은 오늘 통로가 열린 이야기를 했다. 만석이 한동안 말이 없더니 물었다.

“그럼 내일도 안 막힌대?”

“그것까지 확인해야죠.”

“고친 문은 닫아 봐야 알겠더라고.”

가람은 웃고 메모장을 폈다. 지금 만석의 말을 보고서에 쓰려는 것은 아니었다. 내일 설치팀이 실제로 일을 끝냈는지 묻는 연락을 잊지 않으려고 했다. 세희는 버스정류장에서 출입증을 다시 목에 걸었다. 사진이 바깥으로 돌아와 있었다.

저녁에 외주 정비업체의 작업내역 사본이 도착했다. 가람은 세희에게 파일을 받았다고 알린 뒤 첫 줄을 읽었다. 작업 범위에는 측정기 연결부와 지상 배관 보온재가 적혀 있었다. P-17 관벽 확인은 보이지 않았다. 완료 회신을 만든 오후가 처음으로 문서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