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 법정·사회파 드라마 41화

바다가 증언석에 앉는 날

붉은 줄의 끝

세희가 가져온 종이에서는 회관 난로 냄새가 났다. 가람은 첫 장을 창문 쪽으로 돌렸다. 붉은 밑줄은 글자를 가리지 않고 정확히 그 아래를 지나갔다. P-17 구간의 상태를 확인할 것. 그 문장이 놓인 자리는 오래된 위험평가서의 맨 끝이 아니라, 보험 계약 전에 보완을 요구한 항목의 가운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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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희가 가져온 종이에서는 회관 난로 냄새가 났다. 가람은 첫 장을 창문 쪽으로 돌렸다. 붉은 밑줄은 글자를 가리지 않고 정확히 그 아래를 지나갔다. P-17 구간의 상태를 확인할 것. 그 문장이 놓인 자리는 오래된 위험평가서의 맨 끝이 아니라, 보험 계약 전에 보완을 요구한 항목의 가운데였다.

만석은 안경을 코끝으로 내렸다. “누가 그었어요?”

“당시 평가 담당자요. 제 이름이 적힌 회신보다 먼저 만들어진 겁니다.”

세희가 손을 무릎 사이에 넣었다. 종이를 건넬 때는 떨리지 않았던 손이 그제야 움직였다. 가람은 그 손을 보지 않는 척하며 문장을 계속 읽었다. 권고 아래에는 배관 점검 결과와 주변 토양 확인 내용을 회신해 달라는 요구가 있었다. 받은 날짜를 가리키는 도장은 다음 쪽의 좁은 모서리에 찍혀 있었다.

“그럼 알고도 안 고쳤네.”

만석이 말했다. 세희가 고개를 들었다.

“저도 그 말을 먼저 했어요. 그런데 이 사본에는 회신이 없어요. 회신한 게 없다는 뜻은 아니고요.”

“종이가 또 우리를 기다리게 하는군.”

가람은 권고를 읽은 사람과 일을 결정한 사람을 찾겠다고 말했다. 만석은 이미 들어 본 대답이라는 얼굴이었다. 가람은 말을 보태는 대신 자기 의자를 세희 쪽으로 당겼다. 수신인이 환경관리팀으로 되어 있지 않았다. 생산본부장실이라는 글자가 반듯했다.

세희가 종이 한 귀퉁이를 접으려다 멈췄다. “우리는 그때 새 측정기를 들여왔어요. 그 설치회의는 했는데, 이 자료를 같이 읽은 기억은 없어요.”

“없다고 하지 않고 기억이 없다고 하셨네요.”

“그걸로 도망가려는 건 아닙니다.”

“알아요. 그래서 내일 직접 물으려고요.”

가람은 생산본부장실에 자료 열람과 설명을 요청하겠다고 했다. 세희가 동행할 수 있는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매번 가람 옆에서 자기 회사의 문을 여는 사람이 되는 것에 지쳐 있었다. 가람도 자료를 받은 순간부터 그녀가 다음 문까지 열어 줄 것처럼 생각한 자신을 알아차렸다.

은실이 커다란 쟁반을 내려놓았다. 밤에 팔리지 않은 감자전이었다. 만석이 지갑을 꺼내자 은실이 손등을 쳤다.

“이건 내가 먹으려고 남긴 거야. 회의비 계산하지 마.”

“아까는 공짜로 주지 말라더니.”

“내가 정한 공짜는 내 몫이지.”

세희가 웃었다. 웃음이 나오는 얼굴을 만석은 오랜만에 보았다. 가람은 종이를 조금 밀고 접시를 놓았다. 뜨거울 때 부친 전은 아니었지만 가운데가 두툼했고, 씹을수록 감자 맛이 났다. 세희는 자기 회사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식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은실은 누구 입맛인지 알아도 전값을 더 받지는 않는다고 했다.

회관 밖에서 고함이 들렸다. 재문이었다. 그는 전화를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으로 골목 건너편을 가리켰다. 조업 중단이 길어지면 창고를 비워 달라는 연락이 왔다고 했다. 수리한 배를 둘 곳은 있어도 장비를 둘 곳이 없어질 판이었다. 만석이 문을 나서려는데 가람이 붙잡았다.

“오늘 저 문서도 중요합니다.”

“저 사람한테는 장비 둘 데가 오늘 문서지.”

말을 하고 만석도 잠깐 굳었다. 가람을 나무라려고 한 말이 아니었다. 그래도 가람의 얼굴에서 불이 하나 꺼졌다. 그는 회관 문을 잡은 채 뒤를 돌아봤다. 가람이 자료를 봉투에 넣고 따라 나왔다. 세희는 자기 가방을 챙기지 않은 채 앉아 있었다. 은실이 그녀 앞에 전 한 조각을 더 놓았다.

창고 주인은 재문의 장비를 당장 버리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다음 주부터 다른 거래처 물건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재문은 그 말을 배신처럼 들었다. 예전에는 조개값이 들어오면 늦게 준 사용료도 웃으며 받아 주던 사람이었다. 주인은 웃지 않았다. 자기에게도 밀린 납품대금이 있었다.

“바다가 닫힌 건 내가 만든 일이 아니잖아.”

주인이 말했다. 재문은 전화기에 대고 그럼 내가 만든 일이냐고 소리쳤다. 만석이 전화를 받아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재문은 주지 않았다. 가람이 휴대전화 스피커를 켜도 되는지 물었다. 재문이 직접 버튼을 눌렀다.

가람은 다음 주 입고량과 비워야 할 넓이를 물었다. 창고 전체가 아니라 출입문 안쪽 한 줄이었다. 재문이 가진 어구 가운데 지금 수리에 필요한 것과 당분간 쓰지 못하는 것을 나누면 절반은 옮길 수 있었다. 하지만 옮길 곳이 없었다. 만석은 회관 뒤편을 떠올렸다가 입을 닫았다. 그곳은 아이들이 방과 후 쓰기로 한 자리였다.

재문이 그 표정을 읽었다. “또 남의 방 빌리려고?”

“생각만 했어.”

“생각도 물어보고 해.”

가람은 은실에게 빈 공간이 있는 집을 물을 수 있겠느냐고 했다. 은실은 회관 문에서 듣고 있었다. 손에 쥔 집게를 앞치마에 꽂더니 골목 끝 작은 가게로 걸어갔다. 셔터가 절반 내려와 있는 정미의 가게였다. 지난번 그 틈에서 서로 얼굴을 보았던 일이 만석에게 떠올랐다.

정미는 가게를 닫은 것이 아니라 진열대를 옮기는 중이었다. 장사가 적어 냉장고 하나를 줄였다. 바닥에는 네모난 먼지 자국이 남아 있었다. 재문이 어구를 여기에 두면 냄새가 밴다며 먼저 거절했다. 정미는 그물 말고 물에 닿지 않은 부품 상자는 둘 수 있다고 말했다.

“돈은 받을 거예요.”

그 말에 만석이 웃었다. 정미는 웃지 않았다. 자기 가게가 동네의 불행을 모아 두는 무료 창고가 되는 건 싫다고 했다. 가람이 기간을 일주일로 정하고, 상자 크기와 들어갈 자리를 같이 보자고 했다. 재문이 손가락으로 바닥을 재다가 줄자를 가져오겠다며 돌아섰다. 적어도 오늘 밤 장비를 버릴 일은 없어졌다.

가람은 셔터 안쪽에 기대서 숨을 골랐다. 종이 한 묶음을 받는 것과 장비 상자 네 개의 자리를 얻는 일이 같은 저녁에 일어났다. 그동안 그녀는 앞의 일이 뒤의 일을 해결할 거라고 믿었다. 그 순서가 맞을 때도 있겠지만, 오늘 재문은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아까 말은 좀 세게 나갔습니다.” 만석이 말했다.

“맞는 말이었어요.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고요.”

“나도 듣기 싫은 맞는 말을 요즘 많이 들어.”

둘은 셔터를 조금 더 올렸다. 가람이 손을 넣어 철판을 밀자 차가운 먼지가 손목에 묻었다. 정미가 걸레를 던져 줬다. 만석은 그녀가 두 사람을 위로하지 않는 것이 고마웠다. 여기서는 손을 씻고 상자를 옮기면 됐다.

밤늦게 회관으로 돌아왔을 때 세희는 아직 있었다. 은실과 빈 접시를 닦고 있었다. 가람이 내일 요청할 문장을 보여 주자 그녀가 생산본부장실의 내선번호 하나를 가리켰다. 자기 번호가 아니라 대표 접수번호였다. 회사에 공문을 넣으면 이쪽에서도 답을 해야 한다고 했다.

“내가 동행하면 문은 빨리 열릴 겁니다.”

세희가 말했다. 가람은 내일 아침까지 생각해 달라고 답했다. 문을 여는 데 필요한 사람인지, 그 안에서 자기 말을 해야 하는 사람인지 세희가 먼저 골라야 했다. 세희는 접시를 행주 위에 엎어 놓고 한참 손을 떼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생산본부장실에서는 자료를 열람할 시간으로 오후 네 시를 제안했다. 가람은 세희에게 시간을 전하고, 회사 대리인에게도 같은 연락이 갔는지 확인했다. 만석은 가겠다는 말을 참았다. 그는 오전에 재문과 정미의 가게로 상자를 옮겨야 했다.

재문의 상자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부품을 조금 빼서 나누자는 만석의 말에 재문이 처음에는 성을 냈다. 그래도 두 번째 상자를 들다가 자기 어깨도 내려갔다. 넷으로 세었던 상자가 여섯이 됐다. 정미는 바닥에 테이프로 그어 둔 선을 조금 옮겼다. 사람 지나갈 길은 그대로 남겼다.

작업이 끝나자 재문이 사용료를 건넸다. 정미는 돈을 받고 기간을 적은 종이를 줬다. 재문은 그 종이를 옛 반품 확인서와 같은 상자에 넣으려다 따로 주머니에 꽂았다. 오늘 얻은 자리는 옛날 잃은 물건과 다른 곳에 두고 싶었다.

상자를 옮긴 뒤 재문은 가게 입구의 삐걱거리는 문을 만졌다. 문이 끝까지 닫히지 않아 아래쪽 나사를 조이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정미가 허락하자 그는 자기 공구함에서 드라이버를 꺼냈다. 만석은 도와주겠다며 문짝을 잡았지만 재문이 반대쪽을 받쳐야 한다고 타박했다. 바다에서 같은 배를 밀어 본 두 사람이 작은 문 앞에서 한참 자리를 바꾸었다.

정미의 딸이 학교에 가다 그들을 봤다. 아이는 자기네 가게를 부수는 것이냐고 물었다. 정미가 고치는 거라고 답하자 아이는 왜 문이 더 크게 열려 있느냐고 했다. 재문은 나사를 두 개 조이고 손잡이를 당겼다. 문이 한 번에 닫혔다. 아이가 이번에는 스스로 열고 닫아 봤다. 예전처럼 어깨로 밀 필요가 없었다.

“이건 얼마 드려요?” 정미가 물었다.

“나사 두 개 값 받으면 내가 너무 하잖아.”

“아까는 생각도 물어보라며.”

재문이 입을 벌렸다가 웃었다. 그는 사용료를 깎지 말고 다음에 공구 하나 빌려 달라고 했다. 정미는 공구를 빌릴 일은 모르겠지만 약속을 받았다. 아이가 닫힌 문 안에서 손을 흔들었다. 만석은 자기 손바닥의 먼지를 털었다. 오늘 해낼 수 있는 일이 아직 있다는 것이, 어제 입금된 돈보다 조금 뒤늦게 재문의 어깨에 닿는 듯했다.

가람이 공장에 도착했을 때 세희가 정문 바깥에 서 있었다. 출입증을 목에 걸지 않았다. 주머니에서 꺼내 손에 쥐었다.

“함께 들어가겠습니다. 누가 문서를 받았는지 물어보는 자리에는 나도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설명하기 싫은 질문에는 바로 답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번에는 질문을 받으러 온 게 아니에요.”

세희가 유리문을 밀었다. 가람은 한 걸음 뒤에서 따라갔다. 복도 끝에는 생산량 그래프가 커다랗게 붙어 있었다. 상승하는 선 아래에 작은 빨간 표시 하나가 있었고, 가람은 그 모양이 자기 봉투 안의 밑줄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희는 그래프를 보지 않았다. 본부장실 문을 향해 곧장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