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증언석에 앉는 날
먼저 건너간 돈
은실의 휴대전화가 울린 것은 새벽 국을 끓일 때였다. 입금 알림이었다. 그녀는 냄비 불을 줄이고 화면을 열었다. 공장이 주문했던 입회자 도시락값이었다. 손해배상도 지원금도 아닌, 제값에 만든 열네 끼의 대금이었다.
은실의 휴대전화가 울린 것은 새벽 국을 끓일 때였다. 입금 알림이었다. 그녀는 냄비 불을 줄이고 화면을 열었다. 공장이 주문했던 입회자 도시락값이었다. 손해배상도 지원금도 아닌, 제값에 만든 열네 끼의 대금이었다.
은실은 오래 서서 숫자를 보지 않았다. 장부에서 해당 줄에 선을 긋고 가스 불을 다시 켰다. 받아야 할 돈을 받았다는 사실을 감격으로 꾸미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날 무를 써는 소리는 전날보다 조금 가벼웠다.
아침에 만석이 도시락 상자를 가지러 오자 그녀는 앞치마 주머니에서 영수증을 꺼냈다. 오늘 것은 마을 주문이었다. 이번에는 그가 비용을 묻기 전에 누가 주문했고 누가 낼 것인지부터 읽었다. 은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주문서를 보네.”
“나이가 들어도 배우는 건 빨라.”
“두 번 틀리고 세 번째 맞힌 걸 빠르다고 합니까?”
만석은 대꾸 대신 상자를 들었다. 은실이 손잡이 한쪽을 잡아 들어 올려 주었다. 바다는 아직 닫혀 있었지만, 국을 끓이고 사람을 먹이는 일까지 모두 판결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그날 법원 앞 회의실에는 종이 여섯 묶음이 놓였다. 가람은 서류를 일부러 하나로 철하지 않았다. P-17 각인이 찍힌 사진, 관편 분석, 밸브 시험, 운전기록, 물과 퇴적물 자료, 실제 손실자료였다. 서로 다른 곳에서 온 종이를 한 줄로 꿰려면 각각의 매듭을 봐야 했다.
최다온은 창문 가까운 자리에서 현장도를 펼쳤다. 회사 전문가 상호는 자기 도면과 다른 표시가 있는지 확인했다. 만석은 그 둘이 마주 앉으면 으레 답답해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오늘은 도시락 상자부터 열었다. 점심을 넘겨 배가 고파지면 모두 같은 말을 더 크게 하게 된다는 것을 배웠다.
“밥 먹고 싸웁시다.”
상호가 수저를 들며 말했다. “아직 시작 안 했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
탁자 끝에서 배세희가 웃다가 곧 표정을 거뒀다. 자기 회사가 보낸 완료통지 사진이 한 묶음에 들어 있었다. 세희는 그 문서를 가람에게 맡긴 뒤에도 눈을 떼지 못했다. 누군가 자기 이름을 읽는 순간 직접 설명해야 한다는 생각이 몸에 붙어 있었다.
가람은 오늘 확인할 문장을 읽었다. 회사가 폐쇄됐다고 설명한 지하관이 현장에 존재한다는 점, 일부 구간에 오래된 손상이 있다는 점, 닫힘으로 표시한 밸브가 제한된 시험에서 밀폐를 유지하지 못했다는 점. 관편 채취와 임시 격리로 현장 상태가 바뀐 시점도 빼지 않았다.
회사 대리인은 최초 누출일을 특정하지 못한다는 문장을 더 앞에 놓자고 했다. 만석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 말이 또 모든 사실을 가리는 앞표지가 될 것 같았다. 가람은 문장의 위치 대신 제목을 바꾸었다. 확인된 사실과 남은 다툼을 나란히 놓았다.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의 각주가 되지 않도록 했다.
다온은 임시 격리 뒤 물 시료의 변화도 설명했다. 전체 바다가 회복됐다는 뜻은 아니었다. 해당 조치와 관찰된 변화의 관계를 검토할 근거가 생겼다는 말이었다. 상호는 다른 공정 변화와 날씨의 영향을 함께 남기자고 했다. 다온은 그 항목을 이미 적어 두었다. 두 사람은 처음으로 같은 페이지에서 오래 멈추지 않았다.
세희가 만석 쪽으로 문서를 밀었다. “여기 마지막 줄 보세요.”
과거 피해가 없었다고 확인한 것은 아니라는 문장이 있었다. 만석은 그것을 두 번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가 원했던 모든 문장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 얻은 결과가 내일 자기 말을 지우는 데 쓰이지 않도록 잡아 줄 손잡이는 있었다.
문제가 생긴 것은 앞으로의 현장 관리비 항목이었다. 임시 격리와 감시를 유지하는 비용은 당분간 집행하기로 했지만, 기간이 길어지면 승인 절차를 다시 밟겠다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가람이 물었다. 승인이 늦는 동안 현재 조치를 해제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냐고. 회사 대리인은 그런 뜻이 아니라고 답했다.
“그러면 그 부분은 문장으로 남겨 주십시오.”
그 문장을 고치는 동안 만석의 휴대전화가 두 번 울렸다. 재문이었다. 만석은 회의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려다 세 번째에는 밖으로 나갔다. 재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작았다.
“창구에서 내 통장이 안 맞는대.”
“무슨 통장?”
“긴급지원 받는 통장. 예전에 쓰던 걸 적었나 봐. 오늘 마감 전에 바꿔야 한다는데, 배 수리기사도 와 있어.”
만석은 회의실 문을 돌아봤다. 여기서 자기 눈으로 들어야 할 말도 남아 있었다. 그렇다고 재문에게 또 하루 기다리라고 쉽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는 가람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자리를 비웠다. 자기 몫의 확인이 필요한 항목은 따로 남겨 달라고 했다. 대표 한 사람이 회의에 앉아 있는 동안 주민 한 사람의 돈이 다시 멈추는 일이 우스웠다.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지원창구 앞에는 정미도 있었다. 그녀는 대야 대신 서류봉투를 들고 있었다. 재문의 통장 문제를 듣고 필요한 확인을 도와주러 왔다고 했다. 직원은 만석이 왔다고 줄을 앞으로 보내 주지 않았다. 만석도 그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대신 재문 본인이 확인할 방법을 정확히 물었다.
직원은 본인 확인과 변경 절차를 설명했다. 계좌번호를 마을 단체방으로 보내지는 말라고 덧붙였다. 정미가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사진을 받아 대신 보여 주면 빨리 끝날 줄 알았던 것이다. 만석은 재문에게 다시 전화해 현장 수리기사와 시간을 조정할 수 있는지 물었다.
재문이 화를 냈다. 돈 받으러 다니느라 돈 버는 준비를 못 한다고 했다. 만석은 그 말을 끊지 않았다. 자신이 도와준다는 이유로 재문의 순서를 정해 줄 수는 없었다. 잠시 뒤 재문이 직접 오겠다고 했다. 기사에게 작업 내용을 적어 놓고 출항 전 최종 확인은 자기가 돌아와 함께 하기로 했다고 했다.
가람에게서 회의 문구가 도착했다. 만석은 복도 의자에서 자기 확인이 필요한 부분만 읽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척 서명하지는 않았다. 빠진 자료는 나중에 보겠다고 답했다. 그때 정미가 봉투에서 작은 빵을 꺼냈다. 오늘도 남의 식사 시간을 걱정하는 사람이었다.
“딸이 준 거야?”
“오늘은 제가 샀어요. 애가 우리 다 먹여 살리는 줄 알겠네.”
만석은 빵을 받으며 웃었다. 어제 법원에서 떡을 얻어먹고 오늘 또 얻어먹는다는 사실이 조금 민망했다. 다음에는 자기가 준비하겠다고 하자 정미는 다음 일정이나 제때 알려 달라고 했다. 언제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모르는 기다림이 제일 비싸다고 했다.
재문이 왔을 때 창구 마감까지 사십 분이 남아 있었다. 그는 숨을 고르지 못한 채 봉투를 열었다. 직원이 서두르지 말고 필요한 서류부터 꺼내 달라고 했다. 만석은 옆에서 말을 대신하려다가 정미의 손짓을 보고 한 걸음 물러났다. 재문은 자기 계좌를 고르고, 지급 성격과 이후 정산 안내를 직접 들었다. 지원을 받는다고 소송에서 어떤 주장도 모두 포기하는 것은 아니라는 안내 문구를 그는 두 번 읽었다.
절차를 마친 뒤 재문이 물었다. “이제 들어오는 겁니까?”
직원은 처리 완료와 실제 입금을 구분해 설명했다. 오늘 지급 목록에 반영됐는지 확인하고 문자로 알려 주겠다고 했다. 재문은 영수증을 받아 봉투에 넣었다. 입금된 척 기뻐하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다.
셋이 창구를 나오자 만석의 전화가 울렸다. 세희였다. 회의에서 현재 격리 유지와 비용 집행의 책임 창구가 정해졌다고 했다. 야간조 추가 근무비는 대조가 끝난 부분부터 처리하고 남은 쟁점은 별도 표로 남겼다. 만석은 해결된 것과 남은 것을 다시 읽어 달라고 했다. 이번에는 말이 길어져도 끊지 않았다.
재문은 부두로 먼저 돌아갔다. 수리기사가 약속대로 기다리고 있었다. 만석이 늦은 값이라며 커피를 사겠다고 하자 기사는 재문과 정한 작업시간 안이라고 답했다. 만석은 그제야 자기 마음대로 누구의 비용을 갚아 주려 하지 않기로 했다. 오늘 내내 남의 돈 옆에서 서성였지만, 자기 것이 아닌 결정도 많았다.
해가 기울 때 재문의 휴대전화에 입금 알림이 왔다. 그는 화면을 보더니 만석을 부르지 않았다. 먼저 집에 전화를 걸었다. 이번 주 약값과 밀린 공과금부터 낼 수 있겠다고 말했다. 만석은 배 반대편으로 걸어가 계류줄을 만지는 척했다. 재문이 전화를 끊고 나서야 돌아왔다.
“들어왔네.”
“들어왔어.”
두 사람은 금액을 소리 내지 않았다. 배의 손실을 모두 메울 돈은 아니었고, 과거 피해를 끝내는 돈도 아니었다. 그래도 오늘 저녁 누군가는 창구가 아니라 식탁에서 할 말을 얻었다. 재문은 낡은 영수증 상자를 만석에게 보여 주었다. 안쪽에 새 지급 안내문이 나란히 들어 있었다. 옛날 잃은 돈과 오늘 받은 돈을 같은 것으로 섞지는 않았다.
저녁 회관에서 가람은 지하관 조사로 확보한 결과를 주민들에게 설명했다. 누군가는 이제 회사가 끝난 것이냐고 물었다. 가람은 아니라고 답했다. 어떤 설비를 왜 지금 멈춰야 하는지 설명할 근거가 더 단단해진 것이며, 책임과 배상, 복구의 범위는 계속 다퉈야 했다. 만석은 그 답을 대신 꾸미지 않았다. 재문의 통장 이야기도 허락 없이 꺼내지 않았다.
회의가 끝나자 세희가 뒤늦게 들어왔다. 손에 든 자료는 위험평가서의 확인용 사본이었다. 원본 제출 범위를 조율한 끝에 우선 함께 읽을 수 있는 부분이 왔다고 했다. 첫 장에는 오래된 밸브 번호가, 다음 장에는 붉은 밑줄이 있었다.
가람은 자료를 받기 전에 출처와 확인 범위를 물었다. 세희가 답하는 동안 만석은 밑줄 아래 단어를 읽었다. 점검 권고. 권고 뒤에는 완료 여부를 회신해 달라는 문장이 이어졌다. 그가 며칠째 듣던 ‘완료’가 이번에는 질문의 끝에 붙어 있었다.
만석은 의자를 다시 빼 앉았다. 오늘은 끝났다고 생각해 벗어 놓은 안경을 썼다. 가람도 가방 지퍼를 닫지 않았다. 바다에 묻힌 관의 위치를 알아냈다고, 그 관을 보고도 돌아섰던 사람들의 하루까지 다 알아낸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