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심 43미터의 종
사라진 스물일곱 분
투명 자를 옮기자 종이에서 빛이 솟았다.
투명 자를 옮기자 종이에서 빛이 솟았다.
정우찬은 손을 멈췄다. 출입대장의 두 줄만 유난히 하얬다. 지우개를 쓴 자리처럼 보였지만 확대경 아래에서는 종이 결이 끊겨 있었다. 글자를 깎아 낸 사람이 있었다. 그는 책상등을 낮추고 빛을 옆으로 보냈다. 작은 섬유들이 그림자를 만들었다.
“오래된 대장이에요. 젖으면 그렇게 벗겨집니다.”
초소 직원이 말했다. 우찬은 그가 펼쳐 둔 다른 페이지를 보았다. 젖은 모서리는 누렇게 울었고, 여기는 두 줄의 폭만큼 반듯했다.
“이날 교대하신 분을 뵐 수 있을까요?”
직원이 의자를 밀었다. “먼저 누구 잘못인지 정해 놓고 부르는 건 아니죠?”
우찬은 대답을 고르느라 잠깐 늦었다. 검은 상자가 명부에 없다는 말을 듣고부터 모든 빈칸이 누군가의 손처럼 보였다. 그 조급함을 여기까지 가지고 왔다.
“누가 어떤 시간을 적었는지 물으려는 겁니다.”
직원은 선반에서 교대일지를 꺼냈다. 첫 장이 달라붙어 조심스럽게 떼었다. 바깥 차단기가 올라가고 트럭 한 대가 지나갔다. 우찬은 출입대장을 가져가야겠다고 말하려다 직원이 손바닥으로 책을 누르는 것을 보았다. 오늘 들어올 차도 이 책에 적어야 했다.
두 사람은 책을 그 자리에 두고 촬영대를 비웠다. 우찬이 페이지 번호를 불렀고 직원이 전후 장을 넘겼다. 화면에는 긁힌 줄뿐 아니라 같은 날 들어온 다른 사람들의 이름도 남았다. 옆에서 입회자가 촬영 시간을 적는 동안 직원은 자꾸 차단기 쪽으로 눈을 돌렸다.
방문증 묶음에서는 류경문의 이름이 나왔다.
발급은 출항 사십육 분 전이었다. 카드리더에 남은 퇴장 기록은 그로부터 스물일곱 분 뒤였다. 우찬은 어젯밤 재필이 찍은 두 시각을 떠올렸다. 간격은 같았다. 그러나 같은 숫자가 같은 일을 뜻한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는 재필의 도면을 꺼내지 않고 방문증의 앞뒤 일련번호를 먼저 적었다.
“사장님은 그보다 일찍 나갔습니다.”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선사 직원이 문턱에 서 있었다. 류경문은 밖에 세운 차에서 통화 중이라고 했다. 그가 전해 온 설명은 짧았다. 카드는 운전기사가 대신 반납했다.
“기사님이 이 초소로 돌아오셨다는 말씀이죠?”
“예. 전화하면 확인할 수 있어요.”
“본인이 돌아온 시간부터 들을 수 있게 연결해 주세요.”
직원이 전화기를 들었다. 우찬은 이미 적은 퇴장 시각 위로 자를 놓았다. 초소 직원은 새 방문 차량의 번호를 받아 적었다. 조사 중인 책에 오늘의 기록이 이어졌다. 우찬은 그 소리를 들으며 기다렸다.
***
병실의 시계는 침대에서 보이지 않았다.
문재필은 창 쪽으로 몸을 돌려 앉아 있었다. 강해솔은 침대 아래에 놓인 슬리퍼를 가까이 밀었다. 신을 사람이 발을 내릴 수 있는 방향으로 돌려놓고서야 의자에 앉았다.
“그 시계, 어디 갔습니까?”
재필이 물었다. 해솔은 벽을 보았다.
“아니요. 제 손목에 있던 것.”
우찬이 보관 사진을 보여 주었다. 구조 당시 멈춘 상태로 봉인된 시계였다. 재필은 화면을 당기려다 손을 거뒀다. 익숙한 물건인데 자기 것이 아닌 것처럼 놓여 있었다.
“배 시계랑 안 맞았습니다.”
“출항 전에도요?”
재필이 고개를 끄덕였다가 입술을 물었다. 우찬은 펜을 멈췄다.
“몇 분 차이였는지—”
“그걸 내가 알면 어제 그렇게 적었겠습니까.”
목소리가 커지자 병실 문이 조금 열렸다. 간호사가 안을 보고 다시 닫았다. 재필은 그 문을 보며 말을 낮췄다.
“저 시계는 물에 들어가서 멈췄어요. 그 전부터 틀렸는지, 멈춘 뒤에 당신들 시계랑 틀린 건지. 나는 지금 바늘을 봐도 모르겠다고요.”
우찬이 사진을 내렸다.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오차를 한꺼번에 묻고 있었다. 그는 시계 확인 항목을 접고 어제 받은 도면만 폈다.
“여기서 선이 멈췄습니다. 이때 갑판을 비우셨습니까?”
재필은 선을 따라 손가락을 옮겼다. 조타실에서 계단 앞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종이를 뚫었던 구멍이 눈에 띄었다.
“기관실 경보 점검 때문에.”
해솔이 재필을 보았다. 어제는 그 말이 없었다. 우찬의 펜도 같은 자리에서 멎었다.
“누가 부르셨습니까?”
“나를 부른 게 아니라, 벨이.”
“점검 시작 시각이 기억나십니까?”
재필이 의자 팔걸이를 움켜쥐었다. 손등에 혈관이 솟았다. 우찬은 질문을 거두지 못한 채 그 손을 보고 있었다.
“시간을 묻지 마십시오. 몇 시였는지는 틀릴 수 있어도 무슨 소리가 먼저였는지는 압니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우찬은 진동을 껐다. 화면 위에 선사 직원의 이름이 남았다. 면담 방식에 항의하겠다는 메시지였다. 그는 전화기를 뒤집었지만 재필은 이미 이름을 읽었다.
“회사에서 뭐랍니까?”
“나중에 제가 듣겠습니다.”
“내가 또 말을 바꿨답니까?”
재필이 도면을 우찬 쪽으로 밀었다. 뒤집힌 종이 아래로 녹색 컨테이너 사진이 나왔다. 그는 그것을 보고 다시 종이를 덮었다.
해솔이 일어났다.
“오늘 여기까지 하죠.”
우찬은 펜을 든 채 해솔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기관실에 누구와 있었는지 묻지도 못했다. 해솔은 문 쪽으로 가며 말했다.
“간호사에게 우리가 언제 왔는지 물어보세요. 재필 씨가 회복할 시간도 같이 잡아야겠습니다.”
“면담은 한 번뿐이었습니다.”
“그 전에는 회사 전화, 그 전에는 다른 조사 전화가 왔답니다.”
우찬은 재필에게 확인하려다 멈췄다. 방금 그 확인도 질문 하나였다. 펜 뚜껑을 닫았다.
“좋습니다. 시계는 접고, 들은 순서부터 당신 말로 남겨 주십시오. 지금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가 빈 메모지를 놓았다. 시간 칸도, 이미 그린 배 모양도 없었다. 재필은 그것을 가져가지 않았다. 다만 도면을 덮고 있던 손을 조금 풀었다.
***
복도 끝에서 우찬은 류경문의 전화를 받았다.
“환자한테 회사 이름을 계속 묻는다고 들었습니다.”
“기관실에 내려간 경위를 물었습니다.”
“살아남은 사람을 몰아세워 답이 나옵니까. 출입 기록도 기사에게 맡긴 일이라고 했잖아요.”
유리문 너머에서 재필이 고개를 숙였다. 우찬은 그 모습을 피하려고 벽 쪽으로 돌아섰다.
“기사님의 반납 여부는 별도로 듣겠습니다. 초소 방문 목적도 확인 중입니다.”
“인사하러 간 겁니다. 출항 때 들르는 게 드문 일도 아닌데.”
“대장에는 다른 말이 적혔던 것 같습니다.”
우찬은 더 말하지 않았다. 아직 비스듬한 빛에서 드러난 필압을 판독해야 했다. 류경문은 무엇이 적혔느냐고 두 번 물었고, 우찬은 확인되는 대로 알려 주겠다고 답했다. 통화가 끝났는데도 전화기를 한동안 귀에 대고 있었다.
해솔이 정수기 물을 가져왔다.
“끝까지 물었으면 답이 나왔을 것 같습니까?”
우찬은 컵을 받았다. 손가락이 종이 가장자리를 눌러 작은 주름을 만들었다.
“점검했다는 말이 처음 나왔습니다.”
“나도 들었어요.”
“어제 말씀과 맞춰 보고 싶었습니다.”
“나중에도 맞출 수 있잖아요.”
우찬은 물을 마셨다. 그 말이 언제나 맞는 것은 아니었다. 오늘이 지나면 사라질 기록도 있었고, 사람은 설명을 바꿀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을 이유로 재필의 팔걸이를 붙든 손까지 밀어붙여도 되는지는 다른 문제였다.
“저 먼저 초소에 다녀오겠습니다.”
해솔은 고개를 끄덕였다. 잡지 않았다. 우찬이 엘리베이터로 가는 동안 종이컵의 주름을 펴 보았지만, 한번 접힌 곳은 그대로 남았다.
***
초소 촬영본에는 종이에서 깎이지 않은 것이 있었다.
책상등을 옆으로 옮겼을 때 찍은 사진이었다. 잉크는 없어졌지만 눌러 쓴 자국이 남아 있었다. 우찬과 초소 직원은 화면을 돌려 가며 같은 글자를 읽었다.
화물 점검.
직원이 입술을 닦았다. “그때 접수한 사람한테 이걸 보여 줘야겠습니다.”
우찬은 고개를 끄덕이고 사진의 원래 촬영 시각을 확인했다. 카드리더의 퇴장 기록은 여전히 스물일곱 분 뒤였다. 운전기사가 대신 반납했다는 설명이 사실이더라도 방문 목적까지 인사로 바뀌지는 않았다.
직원은 대장을 덮지 못했다. 긁힌 두 줄 옆으로 오늘의 차량 번호가 이어져 있었다.
“이 책을 처음부터 잘 지켰으면 됐을 텐데.”
“오늘 페이지도 남겨 주세요.”
우찬이 말했다. 직원은 새로운 줄에 펜을 놓았다. 차단기 밖에서 기적이 울렸다. 청람호가 아닌 배의 소리였다. 우찬은 그 소리가 가라앉을 때까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
해솔은 병실로 들어가지 않고 문 앞에서 기다렸다.
간호사가 짧게 얼굴을 볼 수 있다고 했지만, 재필은 문을 닫지 말아 달라고 했다. 그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메모지를 무릎에 올려놓았다. 흰 종이는 아직 비어 있었다.
“기억이 없는 게 아닙니다.”
재필이 말했다.
해솔은 가까이 가지 않았다. 대답도 서두르지 않았다.
“기억나는 순서가 무서운 거예요. 내가 먼저 내려간 건지, 누가 나를 내려보낸 건지. 벨이 울리고 내가 어디를 봤는지. 말하면 내가 살아 나온 길도 달라질 것 같아서.”
복도에서는 배식차가 지나갔다. 재필이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종이를 보았다. 해솔은 방 안에 놓인 물컵의 위치만 확인했다. 재필의 손이 닿는 곳에 있었다.
“지금은 저한테 안 말하셔도 됩니다.”
“그러면 당신도 기다려요?”
해솔은 종을 두고 물 위로 올라왔던 일을 떠올렸다. 자기가 기다릴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위험해졌던 문 앞이었다.
“옆에서 기다릴게요. 문은 열어 두고.”
재필은 메모지를 내려놓았다. 해솔이 복도 의자에 앉자 안에서 펜을 여는 소리가 났다. 곧 멎었다. 다시 났다. 해솔은 그 소리를 듣는 동안 전화를 꺼내 우찬에게 면담을 다시 잡지 말라고 보냈다.
한참 뒤 종이 한 장이 문밖으로 나왔다.
첫 줄에는 시각이 없었다.
‘세 번 울린 기관실 벨 뒤 갑판이 기울었다.’
우찬이 돌아왔을 때 해솔은 그 문장을 읽어 주지 않고 종이를 내밀었다. 우찬은 끝까지 본 뒤 메모지를 봉투 위에 놓았다. 아래로 다음 질문을 적으려다 펜을 거두었다.
“이 순서부터 찾겠습니다.”
스물일곱 분은 아직 비어 있었다. 대신 그 빈 시간 안에서 처음으로 소리 하나가 제자리를 얻었다. 해솔은 멀리 바다에서 들었던 세 번과, 재필이 육지에서 적은 세 번을 번갈아 생각했다. 같은 벨인지 알아내려면 다시 배의 기록을 들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