휠체어 컬링 스포츠 성장물 39화

빙판 위 다섯 센티

한쪽짜리 이력서

소라온은 작업대 앞에 앉아 종이를 반으로 접었다가 폈다. 임태규가 준 빈 종이는 한 장이었다. 적을 것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사고 전 공장에서 했던 정비 일을 어디까지 지금 할 수 있는 일로 써야 할지 몰랐다. 열두 개 캡의 마모를 살펴본 수요일 밤과, 사고 전 하루에 수십 개 기계를 멈추던 시간 사이에는 몸을 다시 배운 계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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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라온은 작업대 앞에 앉아 종이를 반으로 접었다가 폈다. 임태규가 준 빈 종이는 한 장이었다. 적을 것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사고 전 공장에서 했던 정비 일을 어디까지 지금 할 수 있는 일로 써야 할지 몰랐다. 열두 개 캡의 마모를 살펴본 수요일 밤과, 사고 전 하루에 수십 개 기계를 멈추던 시간 사이에는 몸을 다시 배운 계절이 있었다.

라온의 휴대전화에 수리 접수 알림이 떴다. 고객은 전자기기의 충전 단자가 흔들린다고 했다. 오늘 가져갈 수 있느냐는 물음에 그는 ‘오후 확인 후 말씀드리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직업재활 상담서를 쓰는 한 시간은 수리비가 들어오지 않는 한 시간이었다. 그렇다고 빈칸을 다음 주로 미루면 그때도 같은 알림이 올 것이다.

첫 줄에 그는 ‘정비 경험’이라고 썼다. 공장 설비의 결합부를 점검하고 교체 이력을 남겼다는 말이 이어졌다. 다음 줄에는 ‘현재 작업 사례’라고 쓰고, 컬링장 스틱의 고무 캡을 상태별로 분류한 일을 적었다. 그는 처음에는 ‘안전기준 수립’이라고 썼다가 지웠다. 새 캡 여섯 개를 어디에 먼저 달지 결정한 것은 중요한 일이었지만, 공식 규격을 만든 것은 아니었다.

문이 열리고 단비가 들어왔다. 학교 이동지원 업무가 끝난 뒤라 목소리가 낮았다.

“뭘 그렇게 지워요?”

“제 이력서요.”

“지우면 더 좋아져요?”

“거짓말은 줄어들죠.”

단비는 맞은편 의자에 앉아 어제 새 캡을 단 스틱을 굴렸다. 새 장비가 곧 좋은 투구를 뜻하지 않는다는 걸 둘 다 봤다. 단비의 돌은 목표보다 뒤에 멈췄고, 그 오차 때문에 팀은 두 점을 노리던 배치를 한 점 지키기로 바꿨다. 라온이 그 결과를 적으려 하자 단비가 손가락을 올렸다.

“제가 틀렸다고만 쓰지 마요. 새 캡에 맞춰 첫 밀기를 조절하려 했는데 놓는 순간을 같이 못 봤다고 적어요.”

“확정된 원인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다음에 확인할 거라고요. 당신이 어제 그렇게 말했잖아요.”

라온은 웃었다. 경기 기록이 직업 자격의 증거가 될 수는 없지만, 작업 뒤 사용 결과를 확인했다는 사실은 적을 수 있었다. 다만 공용 스틱은 다음 생활체육 시간에 실제 첫 투구를 확인해야 했다. 그는 그 칸에 ‘결합 점검 완료, 사용감 확인 예정’이라고 썼다. 완료되지 않은 일을 완료로 쓰면 이력서가 아니라 광고가 된다.

태규는 늦게 도착해 라온의 종이를 한 번 읽었다. “공장에서는 뭐가 본인 책임이었습니까?”

“설비가 멈춘 뒤 분해 순서를 적고, 다시 가동하기 전 담당자와 확인했어요.”

“여기에는 ‘설비 정비 전반’이라고 쓰여 있네요.”

라온이 펜을 들었다. 큰 말 한 줄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이 읽으면 설비 전체를 혼자 책임진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담당 구간과 확인 절차를 나누어 적었다. 사고 전 경험을 줄이는 기분이 들어 손끝이 무거웠다.

“약하게 쓰라는 뜻이 아닙니다.” 태규가 말했다. “어디까지 직접 했는지 보이면 해 본 일이 더 선명해져요.”

라온은 종이를 다시 보았다. 자신에게는 자랑할 경험이 많았다. 그 경험을 사고 이전에만 묶어 두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현재는 높은 작업대 앞에 오래 서서 일할 수 없고, 좁은 공간에서 부품을 들고 방향을 바꾸는 일이 느렸다. 그는 ‘필요한 교육’ 칸에 조절 가능한 작업대 사용, 현재 자세에서의 케이블 정비, 기록 양식 훈련을 적었다.

단비가 읽다가 눈썹을 올렸다. “이런 걸 써도 돼요? 못하는 일 같잖아요.”

“필요한 교육이니까 쓰는 거죠.”

“나는 면접 보면 강한 것부터 말하라고 배웠는데.”

“강한 건 위에 다 썼어요.”

태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담은 선발전이 아니에요. 어느 교육이 필요한지 보러 가는 거니까.”

그 말에 라온은 종이를 덮었다. 선발전이 아니라는 말이 이상하게 더 떨리게 했다. 선발전이라면 남보다 잘하는 모습을 보여 주면 된다. 상담에서는 자신이 배우지 않은 것까지 남 앞에 올려놓아야 한다.

점심때 혜주가 도서관 근무 전에 잠깐 들렀다. 어제 생활체육 회원이 공용 스틱을 쓴 첫 기록을 가져왔다. 결합은 안정적이었지만 손잡이가 처음보다 무겁게 느껴져 투구 두 번 뒤 다른 자루로 바꾸었다고 했다. 기록에는 자세한 진단이 없었다. 라온은 공용 장비가 ‘검증 완료’됐다는 줄을 쓰려다가 멈췄다. “첫 사용 확인, 손잡이 느낌 추가 점검”으로 고쳤다.

“또 지우네요.” 혜주가 말했다.

“이번엔 줄이는 게 아니라 정확하게 쓰는 거예요.”

혜주는 시계를 봤다. 막차 이야기를 꺼내던 지난달과 달리 낮 교대에도 분 단위 여유가 없었다. 그는 라온의 종이 아래 작은 글씨를 보았다. ‘사용기록 정리: 일요일 밤’.

“이것도 일로 쓸 거면 시간도 적어요. 밤에 몇 분 했는지.”

라온은 일요일에 급한 수리 한 건을 미루고 상세 입력을 맡았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는 팀을 도운 시간이라고만 생각했다. 고객이 기다린 시간과 자기 수입의 구멍이 함께 있었다. 그는 분량 대신 실제 소요시간과 다른 사람의 확인 범위를 썼다. 혜주는 자기가 현장에서 동그라미와 화살표로 남긴 기초기록을 붙여 주었다. 이력서 한쪽에 다른 사람 손도 있었다.

오후에 직업재활 상담 창구로 갔을 때 라온은 종이를 두 장 낼 뻔했다. 사고 전 경력만 적힌 오래된 이력서가 가방에 있었다. 그 종이에는 현재의 작업대도, 단비의 돌도 없었다. 그는 두 장을 겹쳐 보다가 새 한 장만 냈다. 오래된 경력이 사라진 게 아니라 새 종이 안에서 자리를 바꿨다.

상담자는 지원 가능 여부를 그 자리에서 확정하지 않았다. 기초 강좌 일정과 작업평가 절차를 설명하고, 라온이 실제로 해 온 수리 사례를 두세 건 더 가져오라고 했다. 경기 성적표는 요구하지 않았다. 라온은 준비할 자료를 받아 적다가 상담자가 묻는 말을 들었다.

“교육을 시작하면 매주 언제 올 수 있습니까?”

“지금 팀 훈련은 수요일 저녁 일곱 시부터 여덟 시, 일요일에 따로 있습니다.”

“그 외 시간도 수리 일을 하시죠?”

“네. 예약을 묶어야 합니다. 아직 수입을 멈출 수는 없어요.”

상담자는 교육 시간표를 주고 바로 서명하라고 하지 않았다. 한 달 훈련표와 수리 예약을 함께 놓고 가능한 조합을 가져오라고 했다. 라온은 ‘가능하면’이라는 말이 사람마다 다른 크기라는 걸 알았다. 그는 오늘 받지 않은 결정을 실패로 적지 않았다.

상담실을 나오기 전, 라온은 창가에 놓인 작업대 사진을 가리켰다. 높이를 바꿀 수 있는 상판 옆에 케이블이 걸려 있었다. 사진만 봐서는 휠체어가 안쪽까지 들어갈지 알 수 없었다.

“평가 때 실제로 저기서 작업하나요?”

“기본 작업대가 저 모델입니다. 조절 범위는 현장에서 확인해야 합니다.”

“제가 쓰는 의자로 접근할 수 없다면 그 결과도 기록되나요?”

상담자가 펜을 멈췄다. “작업 능력만 보는 평가는 아니니까요. 대체 배치가 필요한지도 남겨야 해요.”

라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고 뒤 자신에게 맞지 않는 물건 앞에 앉아 시간을 재는 일은 여러 번 있었다. 그때는 못 해낸 시간이 전부 자신의 속도처럼 기록됐다. 이번에는 시작 전에 접근 여부를 확인해 달라고 요청할 수 있었다. 평가를 쉽게 해 달라는 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가려내자는 말이었다.

“그리고 이건 제 경기용 스틱이 아닙니다.” 그는 사례 사진을 가리켰다. “팀 장비를 허락받아 점검한 거예요. 고친 뒤 마지막 사용 확인은 다른 회원이 했고요.”

상담자는 사진 아래 ‘팀 공용 장비, 사용자 피드백 추적’이라고 적었다. 라온은 마음이 놓이면서도 조금 아쉬웠다. 자신의 기술을 자랑하는 자리에 다른 사람의 허락과 사용감까지 들어가면 문장이 길어졌다. 하지만 그 문장이 길어진 만큼 작업은 실제에 가까워졌다.

밖에서 기다리던 태규가 물었다. “지원서 냈어요?”

“초안은 냈고 일정은 다시 가져오래요. 작업 사례도 두 건 더.”

“그럼 다음에 같이 볼 수 있겠네요.”

라온은 수리 의뢰인의 허락 없이 사례 사진을 가져올 수 없다고 했다. 태규는 이름과 기기번호를 가린 작업기록도 충분하다고 답했다. 라온은 ‘두 건 더’가 오늘 밤 고객의 물건을 급히 열어야 한다는 뜻이 아님을 그제야 알았다. 자신이 가진 기록 가운데 설명할 수 있는 것을 고르면 된다.

돌아오는 길에 수리 고객에게서 다시 메시지가 왔다. 라온은 부품을 오늘 진단만 하고 수리는 다음 날 할 수 있다고 답했다. 고객은 기다리겠다고 했다. 시간을 양쪽에 정확히 알린 뒤 그는 버스 창에 비친 한쪽짜리 이력서를 봤다. 반으로 접힌 선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펼치면 사고 전과 지금의 일을 한 면에서 읽을 수 있었다.

빈칸도 그 한 면 안에 남아 있었다.

저녁에 진수가 팀 단체방에 다음 수요일 추가 연습 가능 시간을 물었다. 대회가 다가온다는 이유였다. 단비는 바로 찬성했다. 혜주는 도서관 교대가 아직 안 나왔다고 했다. 라온은 상담 시간표 사진을 찍다 멈췄다. 한쪽 종이에 적힌 일을 지키려면, 오늘 배운 대로 아직 결정되지 않은 시간을 결정된 것처럼 말하지 않아야 했다. 그는 ‘한 달 생활표를 먼저 맞춰 보자’고 썼다. 단비의 답장이 금세 올라왔다. ‘또 표야?’ 라온은 웃지 못했다. 내일은 그 표가 누가 빠져도 책임을 몰아주지 않는 약속이 될지 시험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