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 트랙은 비어 있다
붉은 띠의 이름
열한 시가 되기 전부터 강태오는 철망 앞에 있었다.
열한 시가 되기 전부터 강태오는 철망 앞에 있었다.
그가 일찍 온 덕에 문이 빨리 열리지는 않았다. 관리인 유재성은 열쇠를 허리에 달고도 소유자 측 담당자가 도착할 때까지 손을 대지 않았다. 한이솔은 전날 찍은 사진을 태오에게 보여 주며 오늘 확인할 질문만 세 개 적게 했다. 상자 자리의 크기, 붉은 띠의 재료, 인수 사진의 번호.
“원반이 여기 있었다는 질문은 왜 없어요?”
“세 개를 확인하고 나서 할 수 있으면 하죠.”
태오는 펜을 돌렸다. 답을 미리 정해 놓고 문을 열어 버릴까 두려웠다.
소유자 측 담당자 김도현은 작업복 차림이었다. 정장을 입고 와서 절차만 읽을 줄 알았던 태오는 조금 놀랐다. 도현은 이곳의 건물주 대리인이자 현재 임차 구역의 시설 책임자였다. 옛 임차인의 소유 물건까지 마음대로 내줄 권한은 없다고 먼저 밝혔다.
“안쪽에 남은 물건의 상태를 보는 데까지는 동의합니다. 떼어 가거나 옮기려면 별도 확인이 필요합니다.”
이솔이 현장 조사 범위를 짧게 읽었다. 재성은 밤 경비가 들어온 시각을 보여 주고 철망 앞에 섰다. 열쇠가 맞지 않아 한 번 헛돌았다. 태오가 도와주려 손을 뻗자 재성이 웃으며 손잡이를 반대로 당겼다. 철망이 오래된 기침 소리를 내며 열렸다.
철망이 열리자 오래된 종이 냄새가 올라왔다. 가장 안쪽에는 누군가 잊고 간 빈 금속틀 두 개와 젖지 않도록 비닐을 씌운 작업용 사다리가 있었다. 전날 겉에서 비어 보이던 칸은 비어 있지 않았다.
“사다리는 오늘 쓰지 않습니다.”
도현이 말했다.
태오는 대답 대신 바닥 선을 확인했다. 이솔은 전날 찍은 사진과 같은 각도부터 촬영했다. 재성은 철망을 열기 전후 시각을 적었다. 세 사람이 각자 다른 일을 하는 동안 붉은 띠는 여전히 벽에 붙어 있었다.
가까이 보니 띠 아래에는 종이 섬유가 눌어붙어 있었다. 붉은 부분은 반투명했고, 옆에는 더 오래된 황갈색 점착 자국도 있었다. 이솔은 작은 빛을 비추기 전에 도현에게 물었다.
“표면 가까이서 보기만 하겠습니다. 괜찮을까요?”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태오는 어제부터 입안에 맴돌던 이름을 삼켰다. 셸락이라고 부르면 무언가 한꺼번에 설명될 것 같았다. 그러나 띠는 원반처럼 둥글지 않았고, 오래 붙은 포장 테이프의 가장자리처럼 곧았다.
“포장재일까요?”
“그럴 수도 있죠. 현장에서 재료를 단정하지 않겠습니다.”
이솔은 붉은 띠를 사진에 담았다. 태오는 가느다란 섬유 끝을 손톱으로 들어 보고 싶었다. 도현이 채취는 오늘 범위 밖이라고 말하자 태오의 턱이 굳었다.
“기다린 사이 또 없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상태를 남기자는 겁니다.”
도현의 대답은 차가웠지만 불친절하지 않았다. 그는 이 칸의 정리 작업을 일주일 미뤘다. 태오는 그제야 어깨를 내렸다. 곧장 답을 갖지 못해도 벽이 내일 그대로 있을 가능성은 얻었다.
벽의 검은 직각은 생각보다 컸다. 사진 속 흰 표지 상자의 세 번째 단 위치와 비슷했지만, 현재 사다리 끝이 닿았던 자리일 수도 있었다. 재성이 사다리를 언제부터 보관했는지 찾아보겠다고 했다. 태오는 자 끝을 벽에 대기 전에 멈췄다. 고정 볼트와 함께 찍으면 나중에 높이를 비교할 수 있었다.
관리실에는 두 장의 인수 사진이 있었다. 재성이 전날 기억한 흰 표지는 첫 사진의 왼쪽에 있었다. 그런데 그 사진은 1998년 것이 아니었다. 현재 소유자가 건물을 넘겨받은 뒤 찍은 사진이었다. 뒤쪽 날짜가 분명했다. 태오는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수인의 원반과는 상관없는 상자네요.”
“그 사진 속 상자는요.”
이솔이 바로 고쳤다. 예전 자리에 닮은 상자가 있었을 가능성과, 눈앞 사진의 상자를 동일시하지 않기로 했다.
재성이 사진을 돌려 보였다. 흰 표지의 아래 두 자리는 ‘12’였다. 1998년 사진에서는 읽히지 않던 자리였다. 두 시점의 상자가 같다면 놀라운 일이지만, 재성은 새 임차인의 열두 번째 보관상자일 수도 있다고 했다.
태오는 억울한 듯 웃었다.
“여기서 숫자는 매번 다른 사람 것입니까?”
“가끔은 그렇죠.”
“그럼 우리가 따라온 314도?”
이솔은 대답을 고르다 사진 속 기둥을 가리켰다.
“그 숫자는 위치를 찾는 데 도움이 됐어요. 누가 피아노에 썼는지는 여전히 물어야 하지만요.”
도현이 오래된 인수목록을 가져왔다. 목록에는 선반과 고정 설비만 있었다. 그러나 한 장 뒤에 끼운 창고 운영일지에는 1999년 초 옛 임차인이 철수할 때 반출차가 들어온 시각이 적혀 있었다. 종이의 끝이 닳아 차량번호 일부는 손가락으로 가려야 읽혔다.
반출차 번호 끝 네 자리는 4712가 아니었다. 태오는 차이부터 표시했다. 피아노 액션을 실었던 차와 같은 차라고 할 근거가 없어졌다. 더 놀라운 건 반출 일정 옆의 수령 장소였다. 윤태문 제작실 별관.
도현은 서류 귀퉁이의 ‘열둘’을 가리켰다. 전날 흰 표지에서도 본 숫자였다. 태오가 벌써 말을 꺼내려 하자 이솔이 종이를 돌려 읽었다. 반출 횟수를 적는 칸이었다. 열둘은 품목 수량이 아니라 그 달의 열두 번째 차량 출입이었다.
“숫자가 같다는 사실도 기록해 주세요.”
태오가 말했다.
“같은 뜻이 아니었다는 사실도요.”
이솔은 둘 다 적었다. 기쁘지 않은 발견이었다. 하지만 다음에 누군가 흰 표지의 ‘12’를 원반 열두 장이라고 읽을 때, 멈출 수 있는 근거가 됐다. 도현은 자기 회사 자료가 오래된 음악 사건에 쓰일 줄 몰랐다며 얼굴을 찌푸렸다.
“이 때문에 우리 임차인 물건에 봉인을 더하면 안 됩니다. 지금 쓰는 분들은 아무 잘못 없어요.”
“오늘 쓰는 사람의 이름은 조사 기록에 넣지 않겠습니다.”
이솔이 말했다.
“그럼 왜 사진에 송장이 안 보이게 찍었는지 알겠습니다.”
도현의 목소리가 조금 풀렸다. 태오는 오전에 그가 까다롭다고 생각했던 일을 떠올렸다. 남의 물건을 맡은 사람에게는 까다로운 것이 직업이었다. 과거를 찾겠다는 자신도 현재 남의 짐을 지나가야 했다.
재성이 바닥에 놓인 임시 상자를 옮기려 하자 도현이 막았다. 조사팀이 부탁하지도 않은 일이었다. 재성은 구역을 넓혀 주고 싶었다고 했다. 이솔은 그 친절이 사진 전후 상태를 바꿀 수 있다고 설명했다. 재성은 상자를 제자리에 두고 손을 털었다.
“매일 여기서 일하다 보니 뭐가 원래 자리였는지 기억 못 해요. 오늘부터는 그림을 붙여 두죠.”
그는 칸 밖 공용벽에 현재 배치도를 붙였다. 도현이 서명했고 태오도 자신이 본 범위에만 확인 표시를 했다. 오래된 원반을 찾는 일에 현재 상자의 위치까지 기록하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이건 상자 번호가 아니라 장소입니다.”
이솔이 말했다.
도현은 목록의 반출 품목을 손끝으로 짚었다. ‘기록물 상자’. 태오가 소리 내어 읽었다. 입에 걸리는 말이었다. 원반이라고 불러 주면 편했을 텐데, 종이는 끝내 그 말을 주지 않았다.
태오는 문주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다. 손가락이 번호 위에서 멎었다. 어제 문주는 수인의 소리가 아니라 상자부터 알려 달라고 했다. 오늘 상자를 특정하지 못했다고 말하면 실망할 것이다. 그런데 운송 기록을 말하면 문주는 다음 질문을 할 수 있었다.
태오는 문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문주가 받자 그는 별관행 기록을 찾았다고 말했다.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상자는 봤어요?”
“지금 있는 상자는 다른 시대 거예요. 벽에 남은 자리와 운송 기록만.”
“당신이 전화를 건 건 수인을 찾았기 때문이 아니군요.”
태오는 철망을 돌아봤다. “아닙니다. 사실은 조금 기대했어요. 문을 열면 누가 남겨 둔 물건이 있을까 하고.”
문주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태오는 끊긴 줄 알고 휴대전화를 귀에서 떼었다. 그때 문주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그 기대까지 숨기진 마요. 대신 내 앞에서 발견한 척하지는 마요.”
태오는 알겠다고 했다. 전화를 끊고 나니 붉은 띠가 사람의 피처럼 보이던 착각도, 기록물 상자가 수인의 가방처럼 보이던 착각도 한층 옅어졌다. 기대를 인정하자 현장이 조금 덜 자기 것이 됐다.
태오는 그 답을 이솔에게 보여 주었다. 이솔은 고개를 끄덕였다.
점심 무렵 재성이 사다리의 현재 반입 날짜를 찾았다. 태오는 사다리를 벽 앞에 세워 보려다가 그만뒀다. 손잡이가 닿지 않는데도 자국은 비슷한 높이에 있었다. 다른 사다리가 있었을 수도 있었다. 그는 현재 물건을 옮겨 과거 모양을 만들고 싶은 마음을 접었다.
나오는 길에 태오는 철망을 돌아봤다. 빈 칸을 연 오늘, 기대하던 원반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원반이었을 수도 있는 물건의 운송 목적지가 처음으로 종이에 나타났다. 그가 이솔에게 물었다.
“별관이 지금도 있습니까?”
“건물은 남아 있대요. 관리 권한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또 기다리는군요.”
“이번에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고 기다리죠.”
재성이 철망을 잠갔다. 태오는 마지막으로 붉은 띠를 보았다. 이름을 붙이지 않고도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것들이 있었다.
차 안에서 이솔은 노을에게 사진을 보냈다. 노을은 해상도가 더 좋은 것보다 이전 조명 각도의 원본을 먼저 달라고 했다. 색이 달라진 까닭이 재료인지 빛인지 확인해야 했다. 이솔은 재성의 이동등 위치를 떠올려 간단한 평면도를 그렸다. 그 그림 한 장이 ‘붉다’는 말보다 더 오래 버틸지도 몰랐다.
빗물은 차 지붕을 두드리다 멎었다. 태오는 와이퍼를 켜지 않은 채 앞유리의 한 방울이 길을 찾는 것을 보았다. 창고 안에서라면 물소리를 오래된 음반의 신호라 부르고 싶었을 것이다. 밖에서는 그저 비였다. 그래도 목적지 이름이 적힌 종이 한 장은 빗물처럼 손끝까지 와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