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 구조·재난 스릴러 39화

수심 43미터의 종

일곱 번째 홈

그림을 그린 사람은 자신이 그리지 않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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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그린 사람은 자신이 그리지 않았다고 했다.

선사의 홍보 담당자는 부록 제작을 외부 업체에 맡겼다고 했고, 외부 업체는 받은 자료를 보기 좋게 옮겼을 뿐이라고 했다. 강해솔은 두 번째 통화를 마치고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누군가는 선을 그었다. 그런데 전화기 안에서는 모두 선을 옮긴 사람이 됐다.

“원본 파일은 받았어요?”

정우찬이 물었다.

“제작업체가 받은 메일을 보존하겠답니다. 제출 범위는 담당자 통해 정하고요. 적어도 지우지는 않겠죠.”

“지우지 않겠다는 답과 보존됐다는 확인은 다릅니다.”

해솔이 그를 쳐다봤다. 우찬은 더 말하지 않고 담당 조사관에게 연락했다. 말끝을 고치는 대신 확인할 일을 가져간 것이어서 해솔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때 제조사 후보 중 한 곳에서 답이 왔다.

처음에는 자기 제품이 아니라는 회신이었다. 라벨도 없고 외함이 다르다는 이유였다. 우찬이 내부 영상에서 보이는 고정부 위치와 주문 도면의 일부를 추가로 보내자, 한 시간 뒤 다른 사람이 전화했다. 개발실에서 오래 근무한 기술자였다.

“표준품은 아닙니다. 그런데 저희가 손댄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는 사진 속 빈자리를 먼저 물었다. 거기에 얇은 판이 남아 있느냐고.

해솔은 우찬의 입술이 굳어지는 것을 보았다.

다음 날 아침, 두 사람은 항구를 떠났다. 제조사는 산단 끝의 낮은 건물에 있었다. 큰 간판보다 납품 차량이 긁고 간 모서리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문을 열자 커피 냄새 대신 뜨거워진 먼지 냄새가 났다.

기술자는 작업복 위에 깨끗한 조끼를 입고 있었다. 손은 깨끗하지 않았다. 손톱 옆에 오래 밴 검은 자국을 해솔은 알아보았다. 씻지 않은 손이 아니라, 씻어도 다 지워지지 않는 일을 한 손이었다.

“제가 담당했습니다.”

그가 인사 대신 말했다.

회사 관리자가 옆에서 헛기침했다. 기술자는 의자를 빼 주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해양 연구용 축소 모형이라고 했어요. 사람이 타는 배에 들어가는 물건이면 저희도 확인할 게 달랐습니다.”

“주문서에 그렇게 적혔습니까?”

우찬이 물었다.

관리자가 파일을 내밀었다. 첫 장에는 분명 연구용이라는 문구가 있었다. 뒤쪽 변경 요청서에는 그 말이 없었다. 대신 단계별 동작 뒤 별도 신호를 끊는 출력이 추가돼 있었다.

해솔은 연구라는 글자와 출력이라는 글자를 번갈아 보았다. 몇 장만 떨어져도 같은 물건이 다른 표정을 가졌다.

“처음부터 일곱 단계가 아니었네요.”

“처음에는 여섯 위치였습니다.”

기술자가 말했다.

“시연이 끝나면 경보가 계속 울린다고, 마지막에 끊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 설명을 믿었습니다.”

“믿고 싶었던 건 아니고요?”

해솔의 말에 관리자가 고개를 들었다. 우찬이 해솔 쪽으로 손을 조금 움직였다. 말을 막을 만큼 크게는 아니었다.

기술자는 한참 말이 없었다.

“빨리 해 달라는 주문이었습니다. 추가 비용도 줬고요.”

그가 말했다.

“그렇다고 제가 이걸 배에 넣으라고 한 건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문 내용을 묻는 거예요.”

우찬이 대화를 가져갔다. 해솔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붙였다. 기술자의 손톱을 보고 같은 편이라고 생각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같은 냄새를 맡고 일했다고 같은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납품 주소는 연구소가 아니었다. 정기검사업체의 공구실이었다. 물품명은 부속 계측기. 해솔이 며칠 전 공구상에서 보았던 체육용품 명세가 떠올랐다. 물건은 이동할 때마다 이름을 바꾸고 있었다.

관리자는 반품 기록을 찾겠다고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간 뒤 기술자는 작은 모형을 시험대 위에 놓았다. 청람호에서 회수한 원물이 아니었다. 회사에 남아 있던 설계와 부품으로 기능을 보여 줄 별도 모형이었다.

“저희 표준 회로와 주문 변경 회로를 번갈아 보여 드리겠습니다.”

우찬은 먼저 부품 목록과 도면의 대응을 확인했다. 기록 담당자가 카메라 위치를 잡았다. 시험대는 배와 연결돼 있지 않았고, 표시등이 실제 경보와 전원 회로를 대신했다. 해솔은 소리 없는 그 안전한 자리가 이상하게 잔인하다고 느꼈다.

여섯 번째 위치까지 작은 표시가 차례로 바뀌었다.

그 뒤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표준 구조였다.

기술자는 작동을 멈추고, 변경된 구조를 보여 주었다. 손가락 끝만 한 판이 제자리에 들어갔다. 다시 시연이 시작됐다. 여섯 번째 표시 다음에, 계속 켜져 있던 표시등이 꺼졌다.

그뿐이었다.

아무것도 터지지 않았다. 방 안에 놀랄 만한 소리도 나지 않았다. 해솔은 자신의 숨만 들었다. 누군가의 퇴근을 앞당기기 위해 손봤을 작은 기능이, 배 안에서는 살려 달라는 소리를 멈추게 할 수 있었다.

“전체 비상전원을 이 물건 하나로 끊는 겁니까?”

우찬이 물었다.

“모형에서 끊도록 만든 건 지정된 회로뿐입니다. 실제 선박에 어떻게 물렸는지는 배선을 봐야 합니다.”

해솔은 시험대의 어두워진 등을 보았다. 마음은 이미 청람호 안으로 달려갔지만 손은 책상 위에 남겨 두었다. 여기서 꺼진 불과 그날 꺼진 불 사이에는 아직 선이 필요했다.

기술자가 회수 장치의 영상을 확대했다. 빈 홈 주변의 고정 흔적은 변경된 부품이 놓일 위치와 맞았다. 하지만 부품 자체는 남아 있지 않았다.

“없애려고 뗀 겁니까?”

해솔이 물었다.

“제가 그건 말씀 못 드립니다. 침수 뒤에 떨어질 수도 있고, 회수 전에 빠졌을 수도 있습니다.”

기술자는 이번에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해솔도 더 몰아붙이지 않았다. 아까의 거친 질문을 사과할 문장이 목까지 올라왔지만 지금 하면 좋은 사람으로 보이려는 것 같았다. 그는 물을 마셨다. 나중에 해야 할 말로 남겼다.

돌아오는 길에 해솔은 차창을 조금 열었다. 바람 소리가 들어오자 머릿속의 꺼진 표시등이 희미해졌다.

“왜 제가 먼저 범인을 만들어 버리죠?”

그가 말했다.

우찬은 운전대를 잡은 채 대답했다.

“빨리 끝내고 싶어서겠죠.”

“당신도 그래요?”

“오늘 아침엔 그랬습니다. 제조사에서 인정했다는 말 들었을 때.”

차가 신호에 멎었다. 횡단보도에서 아이가 엄마 손을 뿌리치고 두 발을 모아 뛰었다. 엄마가 다시 손을 잡았다. 해솔은 그 짧은 실랑이를 끝까지 보았다.

“물건이 자백한 줄 알았어요.”

우찬이 덧붙였다.

“물건은 주문받은 대로 움직였겠죠. 자백할 입은 따로 있고요.”

우찬이 그를 돌아보았다. 해솔은 창문을 닫았다. 서로가 잘못 달려갈 때 붙잡는 일이 혼자 조심하는 것보다 조금 나았다.

항구에 도착했을 때 박은서는 기록 두 묶음을 나란히 놓고 있었다. 하나는 제조사 시험 결과, 하나는 사고 당시 기록이었다. 그 옆에 별도로 작성한 선체 배선 확인도가 있었다. 실제로 어느 회로가 제어함 쪽과 이어졌는지, 아직 확인하지 못한 구간이 어디인지 색을 달리해 표시돼 있었다.

여섯 압력 변화의 간격은 주문 설정과 맞았다. 기록이 멎는 시점도 마지막 단계 다음에 들어왔다. 그러나 멎은 모든 기록을 같은 장치 탓으로 계산하지는 않았다. 이미 손상으로 끊긴 센서도 있었다.

은서가 그 센서 하나에 동그라미를 쳤다.

“이것까지 가져가면 이야기는 예뻐지죠. 대신 틀립니다.”

해솔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쁜 이야기를 만들려고 죽은 사람들의 시간을 고치고 싶지는 않았다.

접점판 수색은 다음 날 오전에 진행됐다. 선체 안정과 진입 가능 구역을 다시 확인한 뒤, 회수 장치 아래쪽의 열린 배수 구간만 대상으로 삼았다. 좁은 곳으로 몸을 밀어 넣지는 않았다. 해솔은 관찰 장비로 보이는 범위를 살폈다.

탁한 물속에서 작은 금속 조각이 반짝였다.

심장이 먼저 뛰었다. 그러나 가까이 가져온 화면에는 구겨진 포장재가 있었다. 그다음 것은 와셔였다. 크기가 달랐다. 다음은 검은 찌꺼기였다. 해솔은 그것들이 답이 아니라는 이유로 화를 내고 있는 자신을 느꼈다.

정해 둔 시간이 다가왔을 때 그는 조금 더 보자는 말을 삼켰다.

“오늘 범위 여기까지.”

통신으로 전한 목소리는 생각보다 차분했다. 수면에서 들을 사람들은 그가 얼마나 그 말을 하기 싫었는지 몰랐을 것이다.

접점판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배수 구간에서 채취한 퇴적물 한 묶음이 분석대에 올라갔다. 은서는 처음부터 청동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색깔만으로 결론 내리지 않고 금속성 입자를 따로 분리했다. 오후의 예비 결과는 구리와 주석을 포함한 입자였다.

해솔은 잠수 때 본 종을 떠올렸다.

“청람호 종에서 떨어진 걸까요?”

“배에 그런 성분을 가진 물건이 종만 있는 건 아니에요.”

은서가 말했다.

해솔은 웃었다. 기분이 좋아서가 아니라 자신이 또 어디까지 달려갔는지 알아서였다.

은서는 비교 대상으로 확보한 종 표면의 상태 자료를 꺼냈다. 입자의 성분만이 아니라 손상 위치와 주변 흔적도 확인해야 했다. 바로 답이 되지는 않았지만, 배수 구간 위쪽에 걸려 있던 가는 줄의 방향을 다시 볼 이유가 생겼다.

저녁 회의에서 해솔은 그 줄을 그렸다. 종의 로프, 은색 레버, 제어함. 아직 확인되지 않은 구간은 실선으로 잇지 않았다. 은서는 당일 수색 촬영분에서 옆으로 비껴 찍힌 구간을 따로 꺼냈다. 줄 끝과 작은 부속 암이 같은 화면에 들어와 있었다. 우찬은 다음 날 항구 시험장에서 볼 제조사 기술자에게 그 촬영 시각과 위치를 함께 보냈다. 정지 화면만 보고 어느 쪽이 다른 쪽을 당겼다고 쓰지는 않았다.

우찬이 그림을 보다가 물었다.

“종이 울려서 장치가 움직인 걸까요, 움직인 걸 알려 준 걸까요?”

해솔은 펜을 멈췄다.

그는 지금까지 종소리를 시작 신호로만 생각했다. 누군가 밧줄을 잡아당기면 다른 누군가 행동한다. 하지만 돌아가는 기계가, 자기 일을 하고 있다고 바깥에 소리를 낼 수도 있었다.

첫 번째 종. 두 번째 종. 세 번째 종.

재필은 세 번째에 움직였다고 했다. 그 소리를 사람을 부르는 경보라고 믿고.

해솔은 재필의 번호가 떠 있는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았다. 아직 그에게 바꿔 줄 대답이 없었다.

대신 종 옆의 빈칸에 두 개의 화살표를 그렸다. 하나는 장치로 들어갔고, 하나는 장치에서 나왔다.

내일은 어느 쪽인지 확인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