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 트랙은 비어 있다
비가 부르는 창고
원본 사진은 화면보다 작았다.
원본 사진은 화면보다 작았다.
밤새 이솔의 모니터를 채웠던 벽돌창고가 아침에는 손바닥 안에 들어왔다. 김연복이 밀착인화를 받침 위에 놓았다. 한이솔은 자기 그림자가 사진을 덮지 않도록 의자를 옮겼다. 강태오는 확대경 손잡이에 손을 얹고도 집어 들지 않았다.
“어제는 저 상자가 방만 했는데.”
“오늘은 이 크기예요.”
“작아지면 답도 작아집니까?”
이솔은 첫 번째 컷을 보았다. “욕심은 좀 작아져야겠죠.”
사진 속 기둥의 흰 표지판에는 두 줄의 글자가 붙어 있었다. 전날 화면에서 읽은 ‘구역’은 아래쪽 줄의 끝이었다. 원본에서는 그 위에 작게 붙은 ‘준공창고’ 네 글자와 앞의 숫자 획도 보였다. 이솔은 서로 다른 줄을 하나의 표기로 이어 읽지 않고 위아래를 따로 옮겼다.
연복이 같은 봉투에서 도면을 펼쳤다. 제삼 준공창고. 외벽의 창문 간격과 끝 기둥의 보강대가 사진과 맞았다. 그 안쪽 첫 통로에서 네 번째 칸까지 이어지는 기둥 번호도 다음 컷들에 나뉘어 보였다.
태오가 낮게 말했다. “삼, 일, 사.”
“위치 후보와 맞습니다.” 이솔이 말했다. “그 숫자를 피아노에 쓴 사람이 이걸 뜻했는지는 아직 모르고요.”
“이번엔 당신이 먼저 기뻐해도 되는데.”
이솔은 확대경을 내려놓았다. 기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어젯밤 아무것도 읽히지 않던 사진이 아침에는 한 곳을 가리켰다. 다만 기쁜 표정을 지으면 그곳에 수인이 앉아 있을 것처럼 태오의 눈이 먼저 달려갈까 봐 두려웠다.
여섯 번째 컷의 상자는 여전히 어두웠다. 흰 표지에 두 묶음의 획이 있었지만 풀어 읽을 수는 없었다. 사진을 크게 만든다고 사라진 획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태오는 같은 곳을 세 번 본 뒤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원반이 아니라 빈 상자일 수도 있겠네요.”
연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사진 보관자이지 그날 창고를 본 사람은 아니에요.”
대신 사진 뒷면에는 다른 것이 있었다. 선반 상단을 비우고 네 번째 칸의 차단망을 보수하라는 짧은 지시였다. 당시 사진이 도면 봉투에 들어간 이유였다. 빈칸을 증명하려고 찍은 사진이 아니라, 손볼 곳을 알려 주려고 찍은 사진.
이솔은 흰 표지보다 그 지시를 오래 읽었다. 누군가 기억하려고 남긴 비밀만이 사람을 되찾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벽을 고치려고 찍어 둔 사진도 오래 기다릴 수 있었다.
허용된 복제본과 열람 확인을 받아 나온 뒤 태오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현 창고 관리인 유재성이었다. 신청한 공용통로와 외벽 조사는 가능하나, 보관칸 개방은 소유자 측 입회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오늘 오후에는 어렵고 내일 오전에 담당자가 올 수 있었다.
태오는 전화를 끊고 차 키를 꺼냈다.
“오늘은 벽만 보는 겁니다.” 이솔이 말했다.
“알아요.”
“알고 가는 것과 가서 참는 건 달라서요.”
태오는 대답 대신 사진 봉투를 뒷좌석에 눕혔다. 젖은 우산은 그 반대편 발밑에 놓았다.
화영철도창고 앞에는 더 이상 선로가 없었다. 아스팔트의 긴 균열이 옛 레일처럼 두 줄로 뻗어 있었다. 비가 고이면 그 선만 검게 보였다. 태오는 차에서 내리다가 그 위에 발을 디뎠다. 물이 신발 옆구리까지 튀었다.
“길은 없어졌는데 발은 계속 걸리네요.”
이솔은 벽을 보았다. 오래된 적벽돌 위에 물류회사 이름이 새로 칠해져 있었다. 한쪽 창문은 막혔고 다른 창문에는 환풍기가 들어갔다. 사진 속 지붕의 낮은 꺾임은 남아 있었다.
재성은 관리실에서 따뜻한 물을 내주었다. 벽에는 현재 임차 구역 배치도가 걸려 있었다. 3번 창고라는 옛 이름은 쓰지 않았다. 배송 대기구역, 반환물품 구역, 임시보관 구역이라는 기능이 숫자 자리를 차지했다.
태오가 사진을 꺼내자 재성은 천장 쪽을 봤다.
“저 못 자국이면 찾을 수 있겠네요.”
“표지판을 기억하십니까?”
“그때는 여기 없었어요. 그런데 간판 뗀 자리에 물이 새서 제가 실리콘을 쐈습니다. 지금도 비 많이 오면 샙니다.”
그는 오래된 것을 기억하는 사람인 척하지 않았다. 이솔은 그 말이 좋았다. 재성이 아는 것은 자기 손으로 고친 구멍이었다. 그 구멍까지는 따라갈 수 있었다.
공용통로로 들어서자 냄새가 먼저 달라졌다. 젖은 종이와 차가운 쇠, 오래 닫힌 곳의 먼지가 섞여 있었다. 지붕 홈통에서 물이 떨어졌다. 세 번 빠르게, 조금 쉬었다 두 번. 이솔의 발이 멈췄다.
피아노의 네 음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몸은 잠깐 그 뒤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어젯밤 문주가 흥얼거리던 숨이 아직 귀에 남아 있었다.
“왜요?” 태오가 물었다.
“소리가 비슷한 줄 알았어요.”
“뭐랑?”
“찾는 것하고요.”
재성은 발밑 양동이를 옮겼다. 물 떨어지는 간격이 그대로인데 소리는 높아졌다. 그는 원래 통에 받으면 복도 끝까지 울려서 밤 경비가 싫어한다고 했다. 이솔은 자기 귀가 원한 답을 창고가 내주는 듯한 착각에서 빠져나왔다.
태오는 웃지 않았다. 그도 처음 들어왔을 때 어디선가 바늘 잡음이 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현재의 첫 통로에는 배송 상자가 쌓여 있었다. 재성은 조사 때문에 임차인의 상자를 옮길 수는 없다며 반대편 공용길로 안내했다. 사진 속 보강대가 그쪽에서 보였다. 이솔은 선반 수를 세지 않고 기둥 간격부터 맞췄다. 선반은 교체할 수 있지만 기둥은 쉽게 옮기지 못했다.
기둥 아래 번호는 페인트로 덮여 있었다. 정면에서는 아무것도 안 보였지만 옆에서 비스듬히 비추자 낮은 요철이 나왔다. 숫자 전체가 아니라 끝 획 하나였다. 그것만으로 네 번째 칸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태오가 도면을 펴고 이솔이 창문과 보강대를 가리켰다. 재성은 두 사람이 종이 위의 길을 찾는 동안 사다리에 오르지 말라고 했다. 바닥 선 밖은 임차인의 작업구역이었고, 위 선반은 한동안 안전점검을 받지 못했다.
“밑에서만 봐도 됩니다.” 이솔이 말했다.
태오는 자기 신발 앞의 선을 내려다봤다. 무릎을 굽히면 안쪽이 더 보일 것 같았다. 몸을 낮추다가 이솔이 카메라를 아래로 내리는 것을 봤다.
“왜 안 찍어요?”
“옆 회사 송장이 나옵니다. 각도를 바꿀게요.”
그는 사진 속 상자가 어디 있는지보다 오늘의 상자가 누구 것인지 먼저 보았다. 낯선 이름과 주소들이 투명 포장지 아래 붙어 있었다. 자기 물건이 누군가의 미스터리를 위해 찍히는 걸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기둥과 창문을 맞추고 나니 옛 네 번째 칸이 나왔다. 지금은 철망문으로 막힌 작은 보관칸이었다. 안쪽 선반은 비어 보였지만 깊은 곳은 어두웠다. 문에는 낡은 번호판 대신 손글씨로 ‘임의 이동 금지’라고 붙어 있었다.
“비어 있는데 왜 잠갔습니까?” 태오가 물었다.
“눈에 안 보인다고 빈 건 아닙니다. 뒤에 남은 물건이 있어요. 맡긴 분이 와서 확인해야죠.”
태오는 철망 사이를 들여다봤다. 얇은 빛줄기가 세 번째 단 높이를 가로질렀다. 벽에는 검은 직각 자국이 남아 있었다. 사진 속 상자의 모서리가 있던 곳과 비슷한 높이였다.
그가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 이솔은 손을 잡지 않았다.
“사진에서 지금 확인할 수 있는 건 어느 면이죠?”
태오의 손이 멈췄다.
“앞쪽하고 왼쪽. 뒤는 안 보이고.”
“벽 자국은 뒤쪽입니다. 같은 상자가 남긴 것인지 따로 봐야 해요.”
“압니다.”
이번에는 그 말이 작았다. 태오는 자기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이솔에게 말한 것이 아니라 자기한테 한 대답 같았다.
재성이 관리실에서 가져온 이동등을 통로 바닥에 세웠다. 빛은 철망의 그림자를 길게 늘렸다. 이솔은 허락된 위치에서 벽과 선반을 촬영했다. 높이를 가늠할 기준은 재성이 공용 기둥에 댄 자였다. 안쪽 자국에 직접 자를 붙인 것처럼 기록하지 않았다.
검은 직각 아래에는 가느다란 붉은 띠가 있었다.
처음에는 녹처럼 보였다. 빛을 옮기자 일부가 투명하게 반짝였다. 태오는 숨을 들이켰다. 원반 가장자리에서 본 붉은 빛이 떠올랐을 것이다. 이솔도 같은 생각을 했다.
“셸락입니까?” 재성이 물었다.
“색만으로는 모릅니다. 도장이나 포장재 조각일 수도 있어요.”
“저걸 채취하면 되겠네요.”
“오늘 허가 범위에는 없습니다. 내일 문을 연 뒤 가까이 보고 정해야 합니다.”
태오는 고개를 돌렸다. 오래된 창고 냄새가 갑자기 답답했다. 만약 누군가 밤사이 쓸어버리면 어떻게 하느냐는 말이 목까지 올라왔다. 재성은 그 표정을 보고 먼저 말했다.
“이 칸은 내일 입회 전까지 청소나 이동 작업을 넣지 않겠습니다. 제 열쇠로 제가 관리하는 문이에요. 그렇게 써 드릴게요.”
“누가 따로 들어오면요?”
“그러면 제가 본 시간을 남겨야죠. 아무도 절대 못 들어온다는 약속은 못 합니다.”
태오는 벽의 검은 자국을 다시 봤다. 마침내 사진 봉투를 접지 않고 품에 안았다. 오늘 할 수 없는 일을 마음속에서 계속 하면, 할 수 있는 일까지 놓칠 것 같았다.
관리실로 돌아오는 길에 전화가 왔다. 서문주였다. 태오는 이솔에게 전화를 넘기려다 스피커 대신 자기 귀에 댔다. 창고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
“상자는 찾았어요?”
“상자가 있었을 수 있는 자리는 찾았습니다.”
“그건 찾았다는 말이에요, 못 찾았다는 말이에요?”
“오늘 문은 못 엽니다.”
전화 너머에서 긴 숨이 들렸다. 태오는 문주가 화낼 줄 알았다. 대신 낯선 질문이 왔다.
“그럼 오늘 거기서 무슨 소리가 나요?”
태오는 복도를 돌아봤다. 홈통 물방울, 이동등 선을 감는 소리, 재성이 열쇠를 허리에 거는 소리. 그는 하나씩 말했다. 문주는 끝까지 들었다.
“녹음은 안 했죠?”
“네.”
“좋아요. 나중에 그걸 수인의 방 소리라고 붙이는 사람 있을까 봐.”
태오는 어젯밤 문주가 수인을 얼마나 아느냐고 묻던 모습을 떠올렸다. 오늘 그는 그 사람을 모르기 때문에 지킬 수 있는 것이 생겼다.
“내일 사진에서 확인하면 알려 드리겠습니다.”
“수인 말고 상자부터요.”
문주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관리실에서 내일 입회 시간을 적었다. 소유자 측 담당자는 오전 열한 시, 관리인은 열 시 반부터 현장에 있기로 했다. 문을 열 수 있는 사람과 조사할 수 있는 범위가 같은 것은 아니어서, 채취 여부는 현장에서 다시 확인하기로 했다.
재성이 돌아갈 차를 묻다가 봉투의 사진 한 장을 봤다.
“이 앞에 흰 종이 붙은 상자요. 옛 물건 인수할 때 찍은 사진에도 비슷한 게 있었던 것 같은데.”
태오가 의자를 당겼다. “어디 있습니까?”
“제 기억을 먼저 믿지는 마세요. 내일 담당자가 인수목록 가져옵니다. 번호가 맞는지 보죠.”
이솔은 시계를 봤다. 문을 못 연 오늘이 아무것도 못 한 날은 아니었다. 사진의 흐린 숫자를 현실의 한 칸으로 옮겼고, 그 칸 앞에서 멈출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도 빨리 내일이 왔으면 좋겠다는 마음까지는 접지 못했다.
밖으로 나오자 비가 잦아들었다. 태오는 차 문을 열기 전에 뒤를 돌아봤다. 검은 자국은 벽 뒤로 사라졌고 창고는 다시 이름 없는 건물처럼 보였다.
이솔의 카메라에는 붉은 띠 한 장이 남아 있었다. 아직 원반 가루도, 수인의 흔적도 아닌 작은 반짝임이었다.
그녀는 사진 이름에 내일의 결론을 붙이지 않았다. 대신 촬영한 위치와 시각을 적었다. 태오가 시동을 걸자 와이퍼가 한 번 움직였다.
다음 날 열한 시까지는, 아무도 듣지 않은 일곱 번째 트랙처럼 시간이 비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