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판 위 다섯 센티
장비함의 네 열쇠
“일은 네 칸인데 문은 왜 한 사람 거예요?”
“일은 네 칸인데 문은 왜 한 사람 거예요?”
단비의 질문 뒤에서 장비함 열쇠가 흔들렸다.
배진수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열쇠를 쥔 손만 작업복 주머니로 들어갔다. 장비함 문에는 소라온의 의자, 김단비의 스틱, 윤혜주의 기록기, 진수의 구급상자 이름표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네 사람의 서명 아래 자물쇠는 하나였다.
“체육관에서 저한테 인계한 겁니다.” 진수가 말했다. “잃어버리면 제가 책임져야 합니다.”
“그러니까 형이 없으면 우리 물건도 못 꺼내죠.”
“훈련할 때 제가 없었던 적은 없습니다.”
혜주가 기록기 가방을 들어 보였다. “지난 화요일엔 병원 주차장에서 바로 와서 십이 분 늦었잖아요.”
진수의 입이 다물렸다.
라온은 문을 한 번 당겨 봤다. 단단히 잠겨 있었다. 방금 빙판에서는 단비에게 두 번째 히트를 돌려줬다. 그 선택을 가능하게 한 스틱은 진수 주머니를 지나야만 나올 수 있었다.
“오늘은 이미 끝났습니다.” 진수가 말했다. “다음 훈련 전에 시설 규정을 확인하죠.”
단비가 스틱을 어깨에 기대었다. “또 다음이네요.”
그는 더 따지지 않았다. 대신 자기 이름이 붙은 칸을 손가락으로 두 번 두드렸다. 책임이라고 쓰인 종이가 잠긴 문 위에서 가볍게 떨렸다.
다음 일요일, 임태규가 집중훈련 시작 전에 장비실로 왔다. 그는 열쇠를 더 만들겠다는 말부터 하지 않았다. 장비함의 큰 공용문을 열고 안쪽 구조를 살폈다. 의자 고정구역, 스틱 걸이, 기록기 선반, 구급상자 칸마다 작은 잠금문과 번호 홈이 이미 있었지만, 팀은 내부 잠금문을 모두 열어 둔 채 큰 문 마스터키 하나만 써 왔다.
“시설 자산과 팀 장비가 섞여 있습니다.” 태규가 말했다. “복사 열쇠를 아무한테나 주는 건 안 됩니다. 그렇다고 대표 한 명만 열어야 한다는 규정도 없습니다.”
진수가 물었다. “분실하면요?”
“수령한 번호 기준으로 보고합니다. 누가 언제 썼는지 남기면 네 사람 분실이 한 사람 책임으로 합쳐지지 않죠.”
태규는 대여 규정의 열쇠 항목을 보여 줬다. 장비 담당자는 큰 공용문과 자기 안쪽 칸만 열리는 번호키를 받을 수 있었고, 네 칸을 모두 여는 마스터키는 코치가 보관하게 돼 있었다. 지금까지 팀이 간단하다는 이유로 내부 잠금을 쓰지 않고 한 사람에게 마스터키를 맡겼을 뿐이었다.
“편했던 적 없는데요.” 단비가 말했다.
진수가 그를 봤다. “적어도 잃어버리진 않았습니다.”
“필요할 때 못 꺼내는 것도 잃어버린 거랑 비슷해요.”
오미란이 둘 사이에 타이머를 놓았다.
“제한키 발급 승인은 끝났지만 봉인번호 등록은 오늘 훈련 뒤에 됩니다. 그전에는 시설 규정상 기존 마스터키를 써야 하고, 혼합 장비라 큰 문을 열린 채 둘 수도 없어.”
단비가 기막힌 표정을 지었다. “하필 훈련 뒤예요?”
“태규 씨도 지금 번호를 받아 왔어. 오늘 고장을 기다리자는 뜻이 아니라, 승인 전 장비를 임의로 열어 두지 않겠다는 뜻이야.”
진수는 열쇠를 꺼내 장비함을 열었다. 라온은 경기용 의자의 끈과 제동을 확인했다. 단비는 스틱 네 자루의 헤드와 결합부를 훑었다. 두 번째 스틱의 고무 캡 한쪽이 조금 납작했지만 손으로 비틀었을 때 밀리지는 않았다.
“공용으로 쓰고, 대회용은 남깁니다.” 단비가 말했다.
라온이 납작한 면을 만져 봤다. “오늘 끝나고 다시 봐요. 지금 교체할 정도는 아닙니다.”
진수는 두 사람이 스틱을 걸이에 돌려놓자 문을 닫았다. 철컥 소리가 났다.
첫 전술 세트는 측면 가드 두 개에서 시작했다. 라온이 첫 돌을 오른쪽 앞선에 세웠고, 혜주의 드로가 그 뒤에 반쯤 숨었다. 단비는 대회용이 아닌 공용 스틱으로 얇은 히트를 준비했다.
“바깥 반 개.” 진수가 불렀다.
“바깥 반 개, 중간 속도.”
단비가 스틱을 밀었다. 릴리스 직전 손잡이 끝이 장갑 안에서 아주 조금 돌아갔다. 돌은 목표보다 안쪽을 두껍게 맞혔다. 상대 역할 스톤은 빠졌지만 단비의 돌도 중앙을 가로질러 뒤로 흘렀다.
단비가 자기 손바닥을 폈다. “헤드가 아니라 손잡이 쪽이 돌아요.”
라온이 스틱을 받아 결합부를 잡았다. 힘을 주자 손잡이가 한 칸 미끄러졌다.
“사용 중지. 예비로 바꿔야 합니다.”
혜주가 장비함으로 갔다. 문은 잠겨 있었다.
“진수 오빠, 열쇠.”
진수는 반대편 하우스에서 스톤 위치를 보고 있었다. 불러도 빙판 냉각기 소리에 첫 목소리가 묻혔다. 두 번째 부름에 그가 돌아봤다. 의자를 돌려 장비실 쪽으로 오려면 세워 둔 스톤 사이를 피해 나가야 했다.
“주머니 안쪽입니다. 잠깐만요.”
단비가 맨손으로 자물쇠를 잡았다가 놓았다. “제 스틱이 안에서 쉬고 있네요.”
진수가 도착해 지퍼를 내렸다. 작업복 안쪽 안전고리에 묶인 열쇠줄이 바퀴 옆에 걸렸다. 급하게 당기자 고리가 더 조여졌다.
“가만있어요.” 라온이 말했다. “끊으면 반납도 못 합니다.”
그가 고리를 눌러 열쇠줄을 뺐다. 문이 열린 시각은 단비가 이상을 말한 뒤 사 분이 지나서였다.
대회용 스틱을 꺼낸 단비는 바로 투구 위치로 갔다. 기다린 시간을 돌려받으려는 듯 스틱을 너무 빨리 당겼다.
“호출부터.” 진수가 말했다.
“알아요.”
단비는 접점을 복창했지만 숨이 가라앉지 않았다. 두 번째 히트는 가드 앞을 스치지도 못하고 빈 길로 빠졌다. 스톤이 하우스 뒤 고무에 닿는 소리가 유난히 컸다.
“이건 열쇠 탓 아닙니다.” 진수가 말했다.
단비가 돌아섰다. “누가 열쇠 탓이라고 했어요?”
“지금 표정이 그렇습니다.”
“사 분 기다리고 같은 몸으로 던질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 할 말은 아니죠.”
“그래도 호출을 지키는 건 선수 몫입니다.”
단비가 스틱을 바닥에 눕혔다. 던지지는 않았다. 화가 나도 장비로 소리를 내지 않겠다는 동작이었다.
라온이 두 사람이 아니라 하우스를 가리켰다. 방금 빠진 돌 때문에 중앙이 비었고, 상대 역할 스톤 두 개가 측면에 남아 있었다.
“실패는 단비 씨 몫이 맞습니다. 그런데 다시 던질 조건을 늦게 만든 건 문입니다. 둘을 하나로 만들지 맙시다.”
혜주가 타이머를 읽었다. 전술 시간은 열두 분 남아 있었다.
“지금 또 누가 더 잘못했는지 정하면 한 엔드가 통째로 없어져요.”
서로의 몫을 가르는 동안 삼 분이 더 흘렀다. 진수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빙판 위로 내밀지는 못하고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문을 잠근 건 접니다.”
단비가 말했다. “스톤을 놓친 건 저고요.”
“그러면 다음 돌은?” 라온이 물었다.
단비는 열린 중앙과 자기 스톤이 빠져나간 길을 봤다. “히트는 그만. 혜주 언니 돌 뒤로 프리즈.”
진수가 성공률을 물었다. 혜주가 최근 기록을 확인했다.
“같은 거리 여덟 번 중 다섯.”
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채택. 중앙 뒤 프리즈.”
단비는 이번에는 손잡이를 두 번 비틀어 고정 상태를 확인했다. 숨을 한 번 길게 내쉰 뒤 스틱을 밀었다. 돌은 중앙 가드를 지나 혜주의 스톤 뒤쪽에 붙었다. 완전히 숨지는 않았지만 상대가 한 번에 두 개를 빼기 어려운 간격이었다.
“노랑.” 혜주가 말했다.
“방금은 파랑 아니에요?”
“다음 돌이 살면 파랑.”
라온이 웃었다. “그 말 지난주에 단비 씨가 했습니다.”
진수의 마지막 드로가 단비 돌 옆에 섰다. 측면 두 개를 내준 대신 중앙 두 개를 얻었다. 미란은 한 점 승패를 붙이지 않고 스톤을 그대로 두게 했다.
“열쇠 때문에 잃은 사 분, 다툰 삼 분, 남은 아홉 분에 바꾼 전술까지가 오늘 결과야.”
태규가 하우스 가장자리에서 배치를 보고 있었다. “문을 바꾸면 투구 실패가 없어지는 건 아닙니다. 다만 장비를 바꿀 시간을 한 사람 주머니에서 찾지는 않게 되죠.”
훈련 뒤 네 사람은 문에 붙어 있던 옛 이름표부터 떼었다. 혜주는 현장 경기기록은 계속 맡되 기록기 충전·보관까지 혼자 지지 않기로 했고, 진수는 원자료 표본 확인과 가까운 기록기 칸을 맡겠다고 했다. 대신 혜주는 훈련 전후 봉인만 확인하면 되는 구급상자 칸을 택했다. 경기 역할이 아니라 장비 보관 책임을 바꾼 것이었다.
장비실 바닥에 새 네 색 표찰이 놓였다. 파랑은 라온의 의자와 수리 점검, 주황은 단비의 스틱, 초록은 혜주의 구급상자, 노랑은 진수의 기록기였다. 태규가 번호가 다른 제한키 네 개를 하나씩 봉인봉투에서 꺼냈다. 각 열쇠는 큰 공용문과 같은 색 안쪽 칸만 열었고 다른 세 칸에는 돌아가지 않았다. 네 칸을 모두 여는 마스터키는 미란에게 갔다.
혜주는 초록 열쇠를 들고 물었다. “구급상자 기록에 제 몸 치수도 적습니까?”
“아니요.” 태규가 답했다. “반출 시각과 봉인 이상만 남깁니다. 개인 의자 치수나 건강정보는 공개표에 쓰지 않습니다.”
진수 앞에는 노란 열쇠가 놓였다. 큰 공용문과 기록기 선반만 여는 번호였다.
“전체 상태는 누가 마지막으로 확인합니까?” 그가 물었다.
미란이 대답했다. “각자 자기 칸을 반납하고 잠근다. 전체 문은 내가 확인한다. 네가 네 칸을 다시 여는 절차는 없다.”
“분실이 생기면요?”
“잃어버린 번호만 중지한다. 네 이름으로 네 사람 몫을 보고하지 않는다.”
진수는 마스터 열쇠를 손에서 오래 굴렸다. 금속 모서리가 손바닥에 붉은 자국을 남겼다. 그것을 놓으면 권한보다 책임이 먼저 빠져나갈 것 같았다.
단비가 재촉하지 않았다. 방금 자기 실패를 열쇠 하나로 덮지 않았듯, 진수의 불안도 욕심 하나로 부르지 않기로 한 얼굴이었다.
진수는 마스터 열쇠를 미란에게 건넸다.
“제가 또 다른 칸을 열려고 하면 막아 주세요.”
“막기 전에 묻겠습니다.” 라온이 말했다. “어느 결함 때문에 여는지.”
“결함 표시가 없으면 안 엽니다.”
네 사람은 자기 열쇠로 자기 칸을 한 번씩 열고 닫았다. 열쇠 수령 시각과 번호만 반납판에 남겼다. 진수는 라온의 의자 칸을 확인하지 않았고, 라온도 기록기 선반의 충전 표시를 대신 보지 않았다.
단비가 스틱 걸이에 공용 스틱을 넣다가 바닥에서 검은 고무 조각 하나를 주웠다. 낮에 확인했던 납작한 캡과 같은 재질이었다.
“이거, 떨어진 거 아니에요?”
라온이 주황 열쇠를 빌려 달라고 하지 않았다. 단비가 자기 칸을 열고 스틱 두 자루를 꺼내 작업대에 놓았다. 라온은 허락을 확인한 뒤 캡을 나란히 눌러 봤다. 두 개 모두 같은 방향으로 평평해져 있었다.
“한 개 불량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진수의 손이 예전처럼 먼저 움직였다가 노란 열쇠 앞에서 멈췄다.
“전부 꺼내 볼까요?”
단비가 스틱 걸이 안을 바라봤다. “오늘은 제 칸이니까 제가 꺼낼게요. 라온 씨는 어디를 볼지만 말해요.”
스틱들이 하나씩 작업대 위에 놓였다. 방금 프리즈를 만든 대회용 캡에도 아주 얕은 평면이 있었다. 성공한 돌 아래에도 마모는 진행되고 있었다.
라온은 고무 조각을 손톱으로 눌렀다. 눌린 자국이 천천히 되돌아왔다.
“다음에는 고장 난 뒤 바꾸는 게 아니라, 몇 번 썼을 때 이 모양이 생기는지 봐야겠습니다.”
빙판에서는 스톤 하나가 다음 스톤의 길을 만들었다. 장비함 안에서는 닳은 캡 하나가 아직 던지지 않은 다음 샷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