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 트랙은 비어 있다
역순으로 읽는 음정
그날 밤의 복원실에서는 종이도 소리를 냈다.
그날 밤의 복원실에서는 종이도 소리를 냈다.
한이솔이 악보 보호지를 넘길 때마다 얇은 비닐이 숨을 들이켰다. 창밖의 빗방울은 환기 덕트 위를 타고 흘렀고, 벽 안쪽 배관에서는 누군가 손톱으로 두드리는 듯한 팽창음이 간간이 났다. 불을 절반만 켠 방 한가운데 수인의 카덴차 사본이 놓여 있었다. 양옆에는 업라이트피아노 액션의 `4-7`과 레일의 `314` 확대 사진이 서로 닿지 않게 떨어져 있었다.
오후에 강태오는 제한 출입 신청을 보완하다가 김연복에게 시설기록 88번의 사진 부속이 따로 없는지 재조회를 부탁했다. 연복은 도면 봉투와 미정리 밀착인화를 확인한 뒤 야간 근무가 끝나기 전에 전화하겠다고 했다. 복원실 전화기에는 그 회신을 기다린다는 메모가 붙어 있었다.
서문주는 문턱에서 그 배치를 보고 웃지 않았다.
“이번에는 숫자로 사람을 부르네요.”
“사람을 부른 게 아닙니다.” 이솔이 의자를 빼 주었다. “연주 방향을 기억하는 분이 필요했어요.”
문주는 앉지 않았다. 우산을 접은 손에서 물이 한 방울씩 떨어졌다. 백정호는 오래전부터 와 있던 사람처럼 벽 쪽 의자에 등을 붙이고 있었다. 무릎 위에는 빈 공구가방만 놓여 있었다. 조카 백승준의 이름을 말한 뒤로, 그는 가방을 열 때보다 닫고 있을 때 더 많은 것을 지키는 얼굴을 했다.
“나는 그 곡을 불렀어요.” 문주가 말했다. “기억을 빌리러 온 사람 취급은 하지 말아요.”
“그래서 연주해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솔은 건반 대신 스피커 앞으로 갔다. 수인이 참여한 공식 음반의 카덴차와, 방송국 리허설 테이프에서 같은 부분만 잘라 놓은 두 파일이 준비돼 있었다. 어느 것도 47초 원반에서 복원한 소리는 아니었다. 출처가 다른 소리를 한 파일처럼 이어 붙이지 않기 위해 재생창도 둘로 나뉘어 있었다.
첫 번째 재생 버튼을 눌렀다.
낮은 노이즈 뒤로 피아노가 네 번 내려왔다. 마지막 음은 방 안에 남지 못하고 보컬이 들어오는 순간 잘렸다. 문주는 눈을 감지 않았다. 손가락만 코트 자락 위에서 움직였다. 넷째 손가락, 셋째, 둘째, 엄지. 실제 운지와 맞지 않을 수도 있는 오래된 몸짓이었다.
두 번째 파일에서는 같은 음형이 반음 높았다. 속도도 조금 빨랐다. 문주의 손가락이 이번에는 셋째 박자에서 멎었다.
“공연 전에 키를 올렸어요.” 그가 말했다. “내가 아래 음에서 자꾸 숨이 걸렸으니까.”
이솔은 두 파형을 겹치지 않고 위아래로 놓았다. 음의 높이를 숫자로 바꾸면 첫 파일과 두 번째 파일의 값은 전부 달라졌다. 음정 간격만 남기면 하행 방향은 같았지만, `4-7-3-1` 같은 배열은 나오지 않았다. 어느 음을 하나로 정할지, 흰건반만 셀지 검은건반까지 셀지에 따라 수열은 얼마든지 바뀌었다.
“끝에서 읽으면 주소가 된다고 하지 않았어요?” 문주가 물었다.
“어제는 그럴 수 있는지 시험할 방향만 생겼습니다.” 이솔이 말했다. “오늘 소리로 맞춰 보니 숫자는 고정되지 않아요.”
“그럼 수인이 남긴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거예요?”
백정호가 공구가방 손잡이를 놓았다. “곡이 남았잖소.”
문주가 그를 돌아봤다. “당신은 수인을 얼마나 알았죠?”
“모르오.”
“그런데 뭘 남겼는지는 압니까?”
“사람을 몰라도 조율사는 곡이 있는지 없는지는 알아.”
문주의 젖은 우산 끝이 바닥에서 미끄러졌다. 짧고 거친 마찰음이 났다. 이솔은 두 사람 사이에 설명을 끼워 넣지 않았다. 백정호는 조카가 남긴 수리번호를 되찾고 싶어 했고, 문주는 수인의 연주가 평범한 작업표 아래로 들어가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어느 쪽도 숫자만 다투고 있지 않았다.
문주가 마침내 의자에 앉았다. 그는 악보의 마지막 두 마디를 손톱으로 짚지 않고 허공에서 따라갔다.
“처음에는 세 음이었어요.”
이솔이 재생을 멈췄다.
“확실합니까?”
“내가 한 번만 더 시간을 달라고 했어요. 가사 첫 자음이 자꾸 음보다 먼저 나와서. 수인이 한 음을 덧붙였죠. 내려갈 계단 하나를 더 준다고 했어요.”
문주는 그때 웃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윤태문은 녹음 시간을 먹는다고 화를 냈고, 수인은 대꾸하지 않은 채 같은 네 음을 다시 쳤다. 문주는 그 네 번째 음 뒤에서 겨우 숨을 놓고 노래를 시작했다.
“나는 그게 나를 위한 거였다고 생각했어요.” 문주가 말했다. “이제 와서는 탈출 경로였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고.”
“둘 중 하나로 정할 필요 없습니다.” 이솔이 말했다. “그날 문주 씨가 노래를 시작하게 만든 음이었다는 건 지금 기억으로 확인할 수 있어요. 창고 주소였다는 건 확인되지 않았고요.”
“기억은 또 틀릴 수 있잖아요.”
“그래서 악보를 봅니다.”
이솔은 초고 사본과 최종보를 나란히 폈다. 초고 마지막에는 세 개의 음표가 있었고, 최종보에는 같은 방향으로 내려가는 음이 하나 더 연필로 들어가 있었다. 그 옆에 작게 `M 숨`이라고 적혀 있었다. 필적은 아직 확인하지 않았지만, 문주의 기억과 악보의 수정 순서는 서로 기대지 않고 같은 장면을 가리켰다.
문주의 입술이 조금 벌어졌다. 그는 자기 이름 첫 글자를 만지듯 종이 위의 M을 바라보았다.
“저걸 잊고 있었네요.”
“잊은 게 아니라 다른 일들 밑에 있었겠죠.”
문주는 손을 무릎 아래로 넣었다. 떨림을 감추려는 동작이었다. “수인은 늘 내가 숨을 못 쉰 걸 고쳐 줬어요. 나는 그 애가 숨을 못 쉰 건 못 봤고.”
백정호가 몸을 앞으로 숙였다가 다시 기대었다. 위로를 하려는 사람의 동작은 아니었다. 오래 미뤄 둔 자기 말을 꺼낼 때의 자세였다.
“승준이도 내 표식을 따라 썼소.” 그가 말했다. “종이 한 장 아끼겠다고 칸을 안 그리고 점으로 갈랐지. 나는 그게 서툴다고만 했어. 공방 이름 아래서 일하게 해 놓고, 자기 방식은 촌스럽다고 지웠소.”
문주는 백정호를 보았다. 이번에는 누구를 얼마나 아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래서 그 숫자가 조카분 것이라고 믿고 싶은 거군요.”
“4-7은 수리전표에도 있소.”
“314는요?”
백정호는 대답하기까지 오래 걸렸다. 재생을 멈춘 뒤에도 전원이 켜진 스피커 회로에서 약한 잡음이 흘렀다.
“모르오.”
말은 짧았으나 아침과 달랐다. 모른다는 말로 조카를 밀어내는 대신, 조카에게 하지 않은 일까지 얹지 않으려는 얼굴이었다.
이솔은 두 숫자 사진 사이에 빈 종이를 놓았다. 그 위에는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4-7은 교체 부품을 가리킬 가능성이 큽니다. 314는 당시 시설표기로 세 번째 준공창고, 첫 통로, 네 번째 칸 후보와 맞고요. 두 표식을 악보로 묶어 새 주소를 만들지는 않겠습니다.”
문주가 물었다. “그럼 오늘 우리는 뭘 찾은 거죠?”
“잘못된 질문 하나요.”
백정호가 코웃음을 쳤다. “밤에 사람 둘 불러 놓고 성과가 대단하군.”
“선생님은 왜 오셨어요?” 문주가 물었다.
“내 조카 이름 또 빼먹을까 봐.”
“그건 솔직하네요.”
“가수들은 안 솔직하오?”
“노래할 때는 대개 남의 말을 하죠.”
그 말 뒤에 작은 웃음이 붙었다. 화해라고 부르기에는 짧았고, 싸움을 멈추기에는 충분했다.
기다리던 복원실 전화가 울렸다. 기록관의 김연복이었다. 태오의 재조회 요청에 따라 시설기록 88번 봉투 안쪽까지 살피다가 밀착인화 한 장을 찾았다고 했다. 도면과 같은 날 촬영된 재고사진 여섯 컷이었다. 원본은 다음 날 입회 아래 볼 수 있고, 지금은 열람 승인된 저해상도 스캔만 보낸다고 했다.
“사진이 왜 도면 봉투에 있었습니까?” 이솔이 물었다.
“뒷면에 배치도 수정 지시가 적혀 있어요. 사진 자체가 재고 증명이라고는 아직 말하지 마세요.”
파일이 도착할 때까지 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빗소리가 굵어졌다. 문주는 아까 들은 네 음을 아주 작게 흥얼거렸다. 음정은 두 번째 파일보다도 낮았다. 정확한 음을 찾으려는 노래가 아니라 몸 안에 남은 간격을 더듬는 소리였다.
백정호가 가방에서 음차를 꺼냈다. 치지는 않고 손바닥 위에 올려놓기만 했다.
스캔 화면에는 벽돌창고 내부가 비스듬히 찍혀 있었다. 작업자 둘이 긴 선반 사이에 서 있었고, 얼굴은 빛이 번져 알아볼 수 없었다. 이솔은 사람부터 확대하지 않았다. 사진 아래 촬영판의 날짜와 시설기록 번호, 필름 가장자리의 컷 순서를 먼저 확인했다. 1998년 9월 18일. 업라이트 액션이 창고로 간 다음 날이었다.
첫 번째 컷의 천장 기둥에는 흰 표지판이 매달려 있었다. 끝의 `구역` 두 글자는 컸지만 앞 숫자는 빛이 번져 모서리만 남았다.
두 번째 컷은 같은 기둥에서 안쪽을 향해 찍혔다. 철제 선반 끝에도 작은 패가 박혀 있었다. 몇 열인지 읽기에는 화소가 모자랐다. 다만 표지판과 열 패가 사진을 찍는 사람의 시선 기준으로 왼쪽에서 오른쪽, 입구에서 안쪽으로 이어진다는 배치는 보였다.
문주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숫자는 안 보이네요.”
“표지를 붙인 자리만 보입니다.” 이솔이 말했다. “악보를 어느 쪽으로 읽었는지와는 별개예요. 내일 원본에서 창고 표기 방향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백정호가 화면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작업자들의 흐린 얼굴이 아니라 선반의 높이를 보았다.
“저 선반은 액션 상자를 눕혀 놓기에는 얕소.”
“원반 상자는요?” 문주가 물었다.
“규격을 봐야지.”
이솔은 세 번째 컷으로 넘겼다. 선반 앞을 지나던 지게차가 사진의 절반을 가리고 있었다. 네 번째 컷에는 빈 통로만 남았다. 다섯 번째 컷은 초점이 흔들려 상자 모서리들이 물속 물건처럼 겹쳐 보였다.
마지막 컷에서 문주가 의자를 밀었다.
선반 세 번째 단, 가장 안쪽 상자의 모서리에 흰 종이가 붙어 있었다. 접힌 면 위로 검은 흔적이 두 묶음 보였지만 숫자인지 글자인지도 가를 수 없었다. 상자의 깊이 역시 그림자에 잠겨 액션 상자인지 다른 포장물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문주가 화면을 향해 손을 뻗다가 멈췄다. 손끝과 사진 사이에는 유리도 종이도 없었지만, 그는 끝내 닿지 않았다.
“수인이 쓴 걸까요?”
“글씨인지도 판독되지 않습니다.” 이솔이 말했다.
“그럼 저건 뭡니까?” 백정호가 물었다.
“내일 원본에서 상자와 표지의 방향을 확인할 대상입니다.”
문주는 고개를 숙였다. 방금까지 수인의 비밀이라고 믿고 싶었던 숫자는 사진 속에서 끝내 읽히지 않았다. 그런데 실망한 얼굴은 아니었다. 누군가 자기만 알아보라고 남긴 암호가 없어도, 수인이 숨 쉬게 해 준 네 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솔은 스피커를 껐다. 회로 잡음이 멎자 빗소리가 방 전체를 차지했다.
화면에는 구역 표지와 열 패가 서로 다른 높이에 걸려 있었다. 그 안쪽 세 번째 단에는 글자를 읽을 수 없는 흰 표지를 단 상자 하나가 있었다.
한 줄로 이어 붙인 암호는 없었다.
대신 같은 날 같은 창고를 찍은 여섯 장의 사진이, 다음 날 원본에서 확인해야 할 표지 세 곳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