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 트랙은 비어 있다
뽑힌 액션 하나
다음 날 아침, 악기보존실의 확대촬영대는 수술대처럼 희었다.
다음 날 아침, 악기보존실의 확대촬영대는 수술대처럼 희었다.
업라이트피아노는 그 옆에 앞판을 연 채 서 있었다. 검은 몸체 안에 여든여덟 개의 액션이 빽빽하게 걸렸고, 저음부의 밝은 부품 하나에만 작은 종이표가 매달려 있었다.
최노을은 종이표를 떼고 말했다. “번호는 사진에만 남깁니다. 움직일 때 걸리면 펠트 찢어져요.”
백정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침부터 그의 오른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전날 전화에서 누군가의 버릇을 안다고 했지만 이름은 아직 말하지 않았다.
한이솔은 수리전표 사본을 촬영대 옆에 놓았다. `저음부 액션 1점 교체. 부품번호 47.` 날짜는 1998년 9월 17일. 화영역 창고로 발송된 날과 같았다.
“47초하고 같은 숫자네요.” 노을이 말했다.
“같다고 연결하지 맙시다.” 이솔이 답했다.
“알아요. 그냥 숫자가 자꾸 따라다닌다고요.”
백정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조율사한테 47은 특별하지 않소. 건반도, 현도, 부품도 번호가 붙어. 숫자는 원래 흔한 거요.”
그는 가방에서 납작 드라이버 세 개를 꺼냈다. 폭이 조금씩 달랐다. 밝은 액션 나사 홈의 은색 상처에 차례로 가까이 대 보았지만 닿지는 않았다.
“가운데 것이오.”
“상처 폭이 같습니까?” 이솔이 물었다.
“같아 보이는 거지. 누가 쥐었는지는 몰라.”
말은 조심스러워졌지만 손은 조급했다. 백정호가 가운데 드라이버를 잡자 노을이 손목을 막았다.
“제가 풉니다.”
“피아노 액션 나사를 보존가가 푼다고?”
“선생님 손이 떨리니까요.”
백정호의 얼굴이 붉어졌다. “안 떨려.”
드라이버 끝이 금속 접시에서 미끄러져 짧은 소리를 냈다. 노을은 손을 놓지 않았다. 둘 사이에서 공구가 멈췄다.
이솔이 말했다. “오늘 안 해도 됩니다.”
“칠 일은 얼마 안 남았잖소.”
“피아노는 조건부 보존으로 바뀌었습니다.”
백정호가 그제야 이솔을 보았다. 폐기 시한이 지났다는 것을 몰랐던 사람처럼 숨을 내쉬었다. 그의 손에서 드라이버가 빠졌다.
“내가 늦게 와서 망칠까 봐 그랬소.”
“무엇에 늦었습니까?”
“그 사람한테.”
노을은 공구를 내려놓고 장갑을 갈았다. “십 분 쉽니다. 커피는 밖에서.”
백정호는 복도로 나가지 않았다. 피아노 의자에 앉아 무릎 위에 두 손을 포갰다. 건반 덮개는 닫혀 있었다.
“내 밑에서 일한 사람 이름은 백승준이오.” 그가 말했다. “조카였어. 성이 같아서 다들 아들인 줄 알았지. 나는 그게 싫지 않았고, 걔는 싫었을 거요.”
이솔은 이름을 적지 않았다. “지금 연락할 생각은 없습니다.”
“죽었다고 들었소. 십 년 전에.”
조사팀이 기관 기록으로 확인한 죽음은 아니었다. 백정호는 승준의 누나에게서 부고를 받고 장례식에 참석했다고 진술했다. 이솔은 그 범위를 넘겨 사망을 확정해 적지 않았다. 백정호는 조카가 방송국의 잡일과 외부 창고 수리를 도맡았고, 자기 이름 대신 백정호 공방 이름으로 돈을 받았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본 날에도 피아노 얘기만 했소.” 백정호의 눈은 닫힌 건반 덮개에 머물렀다. “승준이가 자기 공방을 차리겠다고 했는데, 나는 손님부터 데려오라고 했지. 이름은 간판보다 늦게 생긴다고.”
“그래서 떠났습니까?”
“그날은. 나중에는 돌아왔소. 내 장례식에 올 거라며 농담도 했지.” 백정호가 마른 웃음을 냈다. “결국 내가 그 애 장례식에 갔지만.”
복도 환풍기에서 낮은 바람 소리가 흘러왔다. 이솔은 수인이 떠난 일을 돌연한 사라짐으로 써 버린 사람들을 생각했다. 떠나는 사람은 그날 하나의 문을 닫는 것이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물건을 돌려받고, 돈을 포기하거나 요구하고, 돌아올 가능성과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을 함께 견뎠다. 백승준의 삶도 삼각형을 닫는 4 하나로 요약할 수 없었다.
“이름을 되찾아 주고 싶으신 건 이해합니다.” 이솔이 말했다. “하지만 수인이 남긴 선택까지 그 이름에 붙이지는 않겠습니다.”
백정호는 한참 뒤 대답했다. “그게 그렇게 다른 일이오?”
“떠난 사람에게는 다릅니다.”
“승준 씨가 이 숫자를 썼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아이 4는 삼각형을 닫았소. 어제 본 것처럼. 수리한 부품 안쪽에는 늘 자기 번호를 남겼고.”
“그렇다면 더더욱 필체를 따로 봐야 합니다.”
“내가 장례까지 치른 사람한테 누가 손해를 줍니까?”
“사망 경위도 확인하지 않은 채 그 사람 이름으로 산 사람의 선택을 덮을 수도 있습니다.”
백정호는 닫힌 건반 덮개 위에 손을 얹었다가 곧 거뒀다. 수인을 찾지 않기로 한 결정은 사람을 덜 알아내겠다는 약속이 아니었다. 알아낸 사실을 누구의 삶 위에 어떻게 놓을지 고르겠다는 약속이었다.
휴식 뒤 노을이 나사를 풀었다. 한 번에 돌리지 않고 장력을 조금씩 빼자 오래 눌린 펠트가 미세하게 일어났다. 금속 접시가 빠질 때 둔한 딸깍임이 났다.
“이제 들어요.”
백정호와 노을이 양쪽을 받치고 밝은 액션을 수평으로 뽑았다. 이솔은 손을 대지 않고 빈자리를 보았다. 옆 액션과 맞닿던 면에 먼지가 끊긴 선이 있었고, 아래 받침에는 검은 가루가 얇게 쌓여 있었다.
왼쪽 면에는 숫자가 있었다.
4-7.
가로획은 짧고 7의 끝은 왼쪽으로 꺾였다. 백정호가 숨을 삼켰다.
“승준이 글씨요.”
이솔은 수리전표를 보았다. 부품번호 47. 숫자가 같다는 사실은 해당 부품과 전표를 연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안쪽 표식이 누가 원반 위치를 남긴 암호라는 뜻은 아니었다. 단순 수리번호일 수도 있었다.
노을은 확대경을 움직였다. “흑연 두께가 달라요.”
“뭐가?”
“액션 레일 314보다 굵어요. 4-7은 무른 연필, 314는 단단한 연필 같아요.”
백정호는 고개를 저었다. “연필을 바꿔 쓸 수도 있지.”
“그렇죠.” 노을은 더 말하지 않았다.
이솔은 4-7과 314를 같은 배율로 띄웠다. 4의 모양은 닮았지만 멈춘 자리와 압력이 달랐다. 314의 4에는 연필심이 부러진 작은 홈이 있었고, 4-7은 한 번에 미끄러졌다. 한 사람이 다른 날 쓴 것인지, 서로 배운 두 사람이 쓴 것인지 사진만으로 갈리지 않았다.
“수리전표 담당자 칸을 보죠.” 이솔이 말했다.
전표의 담당자 서명은 푸른 볼펜이었다. `백승준` 세 글자 아래에 숫자 47이 작게 적혀 있었다. 7의 끝이 왼쪽으로 꺾였다. 액션 안쪽과 닮았다.
백정호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이번에는 손이 떨리지 않았다. “그러면 됐잖소. 승준이가 교체한 부품이고, 승준이가 남긴 숫자요.”
“4-7은 그 설명이 맞습니다.”
“314도 같은 4잖소.”
“선 굵기와 멈춤이 다릅니다.”
“사람 글씨가 기계처럼 늘 같아?”
“그래서 다른 자료가 필요합니다.”
백정호는 작업대 가장자리를 쥐었다. “당신은 사람을 끝까지 종이보다 아래에 두는군.”
“반대예요.” 이솔이 말했다. “선생님이 승준 씨를 기억하는 방식 하나로 그 사람의 모든 행동을 정하면, 다른 삶은 없어집니다.”
공방에서 백정호가 했던 말이 돌아왔다. 기술이 이름을 대신 끌고 다닌다. 지금 그는 조카의 기술을 되찾으려다 원반과 수인의 선택까지 조카의 것으로 만들려 하고 있었다.
백정호의 손이 풀렸다. 그는 액션 안쪽의 4-7을 다시 보았다.
“그 아이는 이름을 남기고 싶어 했을까.”
“모르겠습니다.”
“그 말은 참 편리하오.”
“편하지 않습니다.”
이솔은 수인의 악보 사본을 꺼냈다. 글씨가 아니라 음형의 방향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마지막 카덴차는 고음에서 저음으로 내려왔다. 사진을 액션 진행 방향과 나란히 두자 수리번호 4-7은 연주 방향과 반대로 놓여 있었다.
노을이 말했다. “4-7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보면 7-4네요.”
“그건 뒤집으면 다 그렇지.” 백정호가 대꾸했다.
“맞아요. 그래서 단서가 아니에요.”
노을의 짧은 대답에 이솔은 미소를 참았다. 우연한 대칭을 의미로 만들지 않는 일은 때때로 발견보다 힘이 들었다.
그들은 액션을 돌려놓기 전 빈자리를 촬영했다. 받침 아래에는 종이 섬유 한 올이 끼어 있었다. 노을이 핀셋을 가져왔지만 이솔은 수리전표 봉투의 찢긴 가장자리와 먼저 비교했다. 섬유 색과 폭이 비슷했으나 한 올만으로 동일 종이를 말할 수는 없었다.
백정호가 액션을 받쳤다. 다시 끼우는 순간 그의 손이 조금 떨렸지만 노을은 재촉하지 않았다. 나사 홈이 제자리를 찾자 그는 손끝으로 금속 접시를 한 번 눌렀다.
“승준이는 물건을 고치고도 자기 이름을 앞에 쓰지 못했소.” 그가 말했다. “내가 공방 이름을 지키겠다고 그랬지.”
“이번에는 확인된 일만 그 사람 이름 옆에 놓겠습니다.” 이솔이 말했다. “이 액션을 교체했고, 4-7을 적었다는 데까지.”
백정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리전표를 시간순으로 다시 놓던 이솔은 두 표식의 방향이 섞여 있다는 데서 손을 멈췄다. 전표의 `47번 부품`과 액션의 `4-7`은 수리번호로는 같은 쪽에서 읽혔다. 반면 레일의 314는 창고 작업표의 항목 순서로 읽을 때만 시설기록과 맞았다. 수인의 카덴차가 높은 음에서 낮은 음으로 내려간다는 사실은 방향 하나를 보여 줄 뿐, 숫자를 더 만들어 주지는 않았다.
314와 4-7은 같은 사람이 쓴 글씨도, 같은 목적으로 남긴 표식도 아닐 수 있었다.
이솔은 사진 두 장을 악보 양옆으로 갈라 놓았다. 한쪽은 부품번호로, 다른 쪽은 작업 위치 후보로. 이어 붙이지 않자 오히려 다음 확인이 선명해졌다. 당시 창고 사진에서 작업표를 어느 방향으로 붙였는지, 상자 표기는 어디서부터 읽었는지 먼저 찾아야 했다.
“악보는 답안지가 아니네요.” 노을이 말했다.
“수인이 어느 쪽으로 연주했는지는 말해 줘요.” 이솔은 하행선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가 떼었다. “창고가 어느 쪽으로 번호를 붙였는지는 창고 기록이 말해야 하고요.”
숫자는 한 줄 암호가 되지 않았다. 대신 서로 다른 두 표식이 각자 검증받아야 할 방향이 남았다.